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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Sep 20. 2015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비행운(飛行雲)과 비행운(非幸運) 사이

293p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 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297p

그래도 그 애들, 제가 전공을 속이고 저희들을 가르치는 풋내기 강사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저를 참 잘 따라주었어요.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301p

취기가 올랐을 즈음 제 옛 애인은 술잔을 기울이며 꽤 어른스러운 말투로 중얼댔어요.

"살아보니 사람이 제일 큰 재산인 것 같더라."     


그리고 두 달 뒤, 저는 한 달에 3백만 원, 많게는 천만 원도 벌 수 있다는, 그렇지만 그 전에 제가 먼저 물건을 8백만 원어치 사야 된다는 이상한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오십 대 남성의 강의를 들었어요.

너무 빤해서 들을 게 없는 강연 같죠?

맞아요, 언니. 그런데 그 빤한 게 사람 맘을 막 쥐고 흔들데요?     


'꿈'이라는 말을 듣는데 가슴 한쪽이 싸한 게 찌르르 아픈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어요. 그리고 실은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말을 간절히 듣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말 그대로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은 거.     


306p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팔고 있는 게 물건이 아니었더라고요. 제가 팔고 있던 건 사람이었어요.      


316p

언니, 가을이 깊네요. 밖을 보니 은행나무 몇 그루가 바람에 후드득 머리채를 털고 있어요.

세상은 앞으로 더 추워지겠죠?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근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중략)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당장 제 앞을 가르는 물의 세기는 가파르고, 돌다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어 눈에 보이지 조차 않네요. 그래서 이렇게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오래된 물음표 하나만 응시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돈'과 역시 중요한 '시간'을 헤아리며, 초조해질 때마다, 한 손으로 짚어왔고, 지금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것.     


'어찌해야 하나.'

그러면 저항하듯 제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요.

'내가, 무얼, 더.'     


317p

언니,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마흔의, 환갑의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게 될지, 어떤 말을 붙잡고 어떤 믿음을 감당하며 살지 모르겠어요.      

바뀌는 건 상황이 아니라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바꿀 수 없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언니는 엽서 끝자락에 그렇게 적었죠?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거 같다고. 

조만간 다시 옛날이 될 오늘이, 이렇게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있네요.      


김애란_비행운_서른 中     


김애란 작가의 책 <비행운>,  그중 <서른>은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어느덧 20대의 긴 터널을 지나 서른이 된 수인은 언니에게 편지를 썼다. 너무도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이 편지. 서른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고, 자신도 지나온 그 시절의 아이들을 보며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는 비극적인 편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서른>의 수인에게서 희망을 봤다. 절망 속에 빠진 수인은 끊임없이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우울하고 초조하다고 말하는 수인의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실낱같은 희망이 결국 절망의 터널을 뚫고 나올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긴다. 수인은 절망 속에서도 간절히 구원을 바라 왔으며, 이제는 누군가를 구원하겠다는 작은 의지가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수인은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정죄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언니에게 자기고백을 할 뿐이다.      


수인은 비행(飛行)을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했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후에 누군가의 손을 잡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됐을 거라 믿는다.      


나 역시 <서른>의 수인처럼 초조하고  불안해질 때가 있다. 서른이 되었을 때 과연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서른이 된 나도 내가 ‘시시한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우울해질까. ‘엄청난 어른’은 되지 못했더라도, 누군가가 내민 손을 끌어올려 줄 수는 없을지언정, 그 손을 매몰차게 쳐내는 그런 서른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잘됐으면 좋겠다. 지금은 비록 누군가가 손을 내밀만한 사람도 아니지만, 언젠가는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 적어도 그 손을 잡아줄 수는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수인이 편지를 쓴 그 ‘언니’처럼 말이다.   

       

어제 만난 친구가 그런 말을 했어

눈과 귀를 닫고 입을 막으면 

행복할 거야     


너는 톱니바퀴 속 작고 작은 부품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사랑에 정복당할 시간도 없는 

희한한 시대에서 열심히 사는구나     


마지막 저금통장에

들어있는 19만 원을 들고서 

나는 어디로 갈까     


울지 마 달라질 건 없어

울지 마 그냥 그림자처럼 살아가

가만히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그럼 지금보다 행복할 거래     


너는 바뀌지 않을 글자를 보면서

다시 써볼까 상상했지

사랑에 정복당할 시간도 없는 

희한한 시대에서 열심히 생각한다     


마지막 저금통장에

들어있는 19만 원을 들고서

나는 어디로 갈까     


울지 마 어쩔 수 없다고

울지 마 네가 잠자코 있었으니까

눈 감고 귀 막고 입을 닫고 살면

그럼 지금보다 행복할 거래     


그래도 세상 한 가운데

어차피 혼자 걸어가야만 한다면

눈 뜨고 잘 듣고 목소릴 내보면

그럼 지금보다 나아지겠지

그리고는 천천히 

살아가는 거지     


옥상달빛_희한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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