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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훤 Apr 07. 2021

호텔에 사는 직장인

앞으로도 서울에 내 집은 없을 예정

호텔에 머무른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취미나 여가 시간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지하철 위에서 보내던 시간이 완전히 단축되면서 피로도 덜하게 됐고 무엇보다 삶의 질이 올라갔다는 게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달라진 시간은 아래와 같다.


출퇴근 시간 (왕복)


전 : 2시간 30분

후 : 40분


기상 & 취침 시간


기상 : 6시 40분 → 7시 50분

취침 : 11시 30분 → 12시 30분



평일 데이트가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씻고 자기 바빴는데 이제는 책 읽을 시간이라도 생겼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긴 시간 동안 지하철에서 앉아본 적이 없었다. 서 있는 시간이 단축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로를 덜 수 있음을 뜻했다.



그런데 호텔 한 달 살기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온과 침대 위에서 과자 하나를 까먹다가 퇴실 날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중기청(중소기업 청년 전세대출)을 이용해 방을 구해야 할까.  한 달이 끝나갈 무렵에 맞춰 방을 구할 수만 있다면, 다시 본가에 돌아가는 일 없이 더 안전한 우리만의 방이 생길 수 있을 텐데.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사무실에서 들었던 이야기도 떠올리게 됐다.


“이번에 새로 입사한 분, 그분은 벌써 이 근처로 이사 왔다더라.”

“네? 어떻게요?”

“하하. 돈만 있으면 방 구하는 게 얼마나 쉬운데.”


청년 대출이니 중기청이니 하는 것들을 검색하며 좀 더 저렴한 금리를 찾아 나서는 것, '조건에 맞는 방'을 찾는 것은 내가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호텔에서 떠올린 중기청/원룸/오피스텔 같은 단어들은 너무 현실적이라 낭만적이지 못했다. 물론 '계약 만료'라는 깔끔하게 포장된 말이 사실은 '나가세요'와 닮아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다시 한 달 연장해야겠지? 지방 출장도 그때쯤이라고 했으니까. "


온과 나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중구 근처에 있는 방들을 다 찾아봤다. 단기 임대로 살아갈 순 없는 법이었다. 임대도 할 거면 장기로 해야 됐다. 그러나


매물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조건이 까다로웠을까. 우선, 대출 가능 금액인 1억을 넘지 않아야 했다. 반지하나 옥탑방은 안 됐다. 1층도 싫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많은 조건을 따진 것도 아닌데 조건을 설정하고 검색해보니 몇몇 지역은 매물이 0이었다. 괜찮다 싶은 방은 보증금 1억이 넘어갔고 나는 돈이 없었다. 중기청 관련 검색을 해보니 후기도 “겨우 구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좋은 매물은 그 자리에서 바로 나간다는 말이었다.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만지다가 문득 여기서 덜 좋은 방을 생각하는 게 서글프게 여겨졌다. 생각보다 유지하는 게 어려운 것들이 있다. 마치, 하얀색 이불처럼.


생각이 많아질 땐 빨래를 한다


“다시 집으로 가기는 싫은데.”


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이미 경험했던 것들이, 지금 당장 누리고 있는 것들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출퇴근 시간도, 문화생활도, 도심과의 접근성도, 온과의 편리한 데이트도 무엇 하나 놓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직장이 서울만 아니었다면 모든 게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 밖의 일자리를 알아봤을 땐 이상하게 임금 차이가 났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평균적인 것으로 보자면 양질의 일자리는 서울에 몰려 있는 듯했다. 위치 좋은 곳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경쟁률이 높은 곳도 있었다. 누군가는 내게 서울에서 커리어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왜 서울에서 일해야 되는지 몰랐지만 가끔은 주변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대로 따르며 편하게 살고 싶을 때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했다.


그런데 비쌌다. 비싸고 또 비쌌다.


취업하고 보니 점심 식사에 평균적으로 8,000원을 지불하고 있었다. 가끔은 10,000원을 넘겼다. 돈을 아끼려고 해야 5,000원이었고 그냥 밥을 먹는 게 10,000원, 조금 더 서비스를 갖춘 곳에서 둘이 먹으려면 35,000원은 그냥 넘어갔다.


직장은 도심에 몰려있고, 서울 내에서도 도심은 비싼 법이었다.


돈을 모으지 않고 산다고 마음먹으면 결정은 쉬웠다. 월세로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사람들이 월세보다는 전세를, 전세보다는 자가를 추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 집이 아닌 곳에서 머문다는 것은 불안감을 동반한다. 언젠가는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침대와 냉장고 하나까지 ‘빌려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이곳이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섬뜩해질 때가 있다.




꿈이나 목표는 그 자체로 놔두는 게 나을까?


그렇다고 내가 몰디브 아난타라에 1년 동안 사는 3천만 원짜리 초호화 패키지를 꿈꾼 것도 아니었다.

스테이케이션이라는 트렌드 아래 생겨난 340만 원 국내 특급 호텔 한 달 살기를 꿈꾼 것도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이건 상대적으로 소박한 꿈이다. 조금만 투자하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꿈.


글쎄, 모르겠다. 보다 분명한 것은 꿈꾸는 것보다 꿈 이후를 보는 게 더 재밌다는 사실이다.

임대라도 해서 살 수만 있으면 다행이다. 나는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으니까. 행복은


나 스스로 찾아야 되는 거니까.



방에서 방을 찾다가 온과의 데이트가 끝나버렸다. 생각할 시간 조차 없이 살고 있다.

어쩌면 직장인에게 '생각할 시간'이라는 건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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