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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도 반짝임 하나쯤은

마음까지 얼어붙지 않게 하는 작은 의식

by 이 순간


겨울의 문턱에 서면, 가장 먼저 얼어붙는 건 마음이다.

그래서 세차를 한다.


나는 생계형 직장인이다. 가끔 차에 월세차 홍보지가 꽂혀 있지만 이용하지 않는다. 내 경제 사정이 잔고가 넉넉한 붉은색이라면 혹 연락해볼까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겨울 찬 공기는 이제 시작인데, 우리 살림은 이미 허리띠부터 단단히 졸라맨 상태다. 그래서 내 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한다. 그중 하나가 세차다.


강추위가 오기 전에 세차를 했다. 세차는 늘 나의 컨디션과 기분을 고려해 즉흥적으로 실시된다. 기분이 찌뿌둥한데 마침 1시간 정도의 짬이 난다면 그날이 바로 세차하는 날이다. 그래서 10번 중 9번은 직장룩 그대로 세차장에 들어선다. 그날 입은 옷이 드레스 수준만 아니면 주저 없이 간다. (드레스는 없지만, 아주 가끔 발목까지 오는 샤스커트—망사—를 입기도 한다.) 세차할 때는 반쯤 내 몸도 씻겨지기 때문에 가진 옷 중 비싼 축에 속하는 것들은 조심히 벗어두고 시작한다.


날씨는 따스한데 다음 주부터 한파가 온다고 한다. 게다가 아이들 귀가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는 오늘은, 겨울맞이 세차에 딱 맞는 날이다. 남편이 예전에 멋진 청소 바구니와 세차용품을 사줬었는데, 언젠가 본인 차를 세차한다고 가져가 버렸다.


어쩔 수 없다. 세차장과 붙어 있는 마트에서 세차용품을 고른다. 집 청소도 업체를 부를 수 없으니 건조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를 하나씩 모아 레벨 업하듯 들였던 것처럼, 셀프 세차도 도구를 하나씩 모으며 성장하는 중이다. 체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아이템의 도움은 필수다. 템빨은 무시 못한다.


검은색 나일론 장갑을 끼고, 거친 면으로 두 손바닥을 한 번 비벼본다. 차에 늘 구비해 둔 오래된 운동화는 이미 출동 준비를 마쳤다. 나의 키를 고려해 발판까지 꺼내 놓고 작업을 시작한다.


20대에 처음 운전할 땐 한 손으로 핸들 돌리는 것도 버거웠던 근육무지랭이였지만, 이제는 한 손으로 고압수를 쏘는 일쯤은 거뜬하다. 고압수의 진동이 손목을 울리고 ‘치이익—’ 하고 물안개가 튀어 오르면 그 특유의 차가운 냄새가 공기 속으로 파고든다. 곧 후들거리는 손아귀와 마주하지만, 시간제한이 있으니 빠르게 땟국물을 씻겨낸다.

카샴푸는 오늘 생략한다. 폼건으로 뿌린 하얀 거품이 차 표면 위에 폭신하게 쌓이고, 부드러운 미트 장갑으로 도장면을 천천히 굴려가며 닦아낸다.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내 의상도 거품과 함께 세척되기 마련이다.


세차장은 편안한 장소 중 하나다. 세차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에 집중하고, 각자의 속도로 열중한다. 자신의 차를 아끼는 모습은 중년도, 사회초년생도 다 멋져 보인다. 옷에 점점이 묻은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순간, 나 또한 마음만큼은 영화 트랜스포머의 메간 폭스다. 물론 현실은 컴퓨터 앞에서 거북목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그녀의 반짝임을 빌려온다.


여유가 있다면 실내 청소를 하고 바닥 매트도 탈탈 털고, 본넷에 왁스를 발라 반질반질 광을 내고, 크롬 부분까지 반짝이게 닦아줄 텐데- 그러면 차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들어진 모습으로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얼른 집에 들어가 저녁 밥상을 준비해야 한다. 지금 서둘러 시작하면 가족들이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함께 맛볼 수 있을 테다.


집은 아무리 청소해도 아이들 귀가 후 1시간만 지나면 폭탄 맞은 집이 되지만, 자동차는 날씨만 잘 맞으면 꽤 오래 깨끗함을 유지한다. 요 며칠 다른 지역엔 첫눈이 펑펑 내렸는데, 내가 사는 동네는 눈 조각, 빗방울 하나 떨어질 기미가 없다. 아쉽냐고? 전혀. 내 손으로 닦아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는 건 묘하게 큰 보람이다.


세차한 지 며칠이 지나도 깨끗한 내 차를 보며 흐뭇해진다. 이런 작은 반짝임 하나면 겨울을 나기에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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