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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싫어 떠나려고요

기행문입니다

by 한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더운 나라로 간 건 한국의 추위가 싫었던 이유도 있지만 지금이 겨울이니 차라리 더운 게 낫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건 다 머리로 하는 계산이고 막상 부딪혀보면 원래 싫었던 건 어딜 가도 싫은 건데 말이죠. 우리나라가 아니라고, 원래 더운 나라라고, 춥지 않다고 해서 더운 게 좋을 리가 있겠어요.


생각보다 덥고 습해서 땀을 뻘뻘 흘리고 돌아왔죠.


요즘은 여기저기 외국을 다니고 공항을 이용하다 보면 새삼 우리나라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중교통도 체계적이고, 공공시설도 깨끗하고, 모든 건 디지털화되어 있고.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후줄근 한 사람들은 없으니까요.


이번 여행에서 확실히 느낀 건 바로 날씨에 대한 이해, 그로 인한 사람들의 생활,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는 가치 들입니다.


LA에 가보면 365일 참 하늘이 맑습니다. 천사의 도시라고 할 만큼 그리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들의 연속이죠. 그래서 일까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엇이든 꼭 오늘이 아닌 내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우린 바로 오늘이어야 하잖아요. 내일 갑자기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어떻게 해요. 작년 연말만 해도 제주도에서 인천을 향한 비행기는 며칠 동안 뜨지 않았습니다.


우린 사계절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열대야로 괴로워도 또 며칠 지나면 시원한 가을이 오고 낙엽이 다 떨어지고 나면 겨울을 준비도 하고, 꽁꽁 얼었던 얼음도 봄이 되면 알아서 녹는데 말이죠. 생각해 보세요. 어느 한 계절로만 살아가야 한다면 얼마나 지겨워요. 우린 옷장에 나시와 패딩이 함께 있는걸요. 홍수도 나고 대설주의보도 내리고 아주 가끔은 태풍도 불죠. 그러니 우리는 늘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덥기만 한 나라는 12월이라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해 놓고 캐럴은 크게 틀어 놓았는데 정작 에어컨이 없으면 밖으로 나가기도 힘든 걸요. 커피를 주문하며 스탭이 산타모자를 쓰고 있길래 물어보니 태어나서 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사람이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더위에 적응하고 맞서는데 활용하므로 다른 장기적인 일이나 변화를 해야 하는 일은 어쩐지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왜 저걸 고치지 않지?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니 이해가 가더군요.


그냥 지금 이대로의 환경과 조건에 만족하며 사는 삶.


그래서였을까요. 그들은 정확하지 않았고, 빠르지 않았고. 주체적이지 않았어요. 대신 타인에 대해 너그럽고 작은 일에 감사해하며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아요.


한국 사람들은 외국의 여행지에서 같은 한국인을 만나는 것을 썩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한국인은 스스로 한국 사람들이 가진 특성들을 싫어하기도 하고 자신은 그렇게 안보이려고 노력들을 하죠. 저 역시도 어딜 가나 급하고 불만 많고 표정은 화나 있고 태도는 무례하고 행동은 얌체 같기도 한 일부 눈에 띄는 한국 사람들로는 안 보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무엇이든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빠른 시간에 개선하기 위해 다 함께 노력하는 사람들, 늘 다음 세대를 걱정하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미 부지런한 사람들, 알아서 질서를 지키고 에너지를 한데 모을 줄 아는 사람들.


저는 이 국민성이 바로 더 나은 미래를 염원하는 강렬한 열망이며 그것은 늘 같은 날씨로는 살 수 없었던 극적인 변화무쌍에 놓여버린 기나긴 시간과 공간의 흐름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더운 나라에 며칠 다녀와서 너무 거창한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요. 이번 겨울 역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할 수 있어서 좋고, 또 실제로 그런 크리스마스도 보고 자라서 좋습니다.


적어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눈썰매를 타고 온다는 장면이 불가능하거나 터무니없는 판타지가 아니라는 점이 얼마나 고맙나요. 그렇게 올 해는 다행인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다려 보겠습니다.


여행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전혀 다른 장소에서 뜻밖의 이유로 깨닫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또 여행을 가려고 합니다. 실존 여부와 상관없는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 친척, 친구들, 선후배 모두를 뒤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추운 겨울이 싫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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