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 밖을 몰랐기에 안을 썼다
에밀리 브론테는 거의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요크셔 황야 한가운데에 있는 하워스 목사관. 아버지는 목사, 어머니는 일찍 죽었고, 형제자매들도 하나씩 죽어갔다. 에밀리는 이 집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죽었다. 서른 살. 집 밖의 세상을 거의 모르는 채로.
그런 여자가 히스클리프를 썼다.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 문학사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집요하고, 가장 파괴적인 사랑을 수행하는 남자. 캐서린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감정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소유, 집착, 복수, 자기 파괴. 이 모든 것이 한 몸에 들어 있다.
어떻게 가능한가. 목사관 밖으로 나가본 적이 거의 없는 여자가, 어떻게 인간 감정의 가장 어두운 곳을 이토록 정확하게 그릴 수 있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에밀리 브론테의 화산은 밖에 있지 않았다. 안에 있었다.
황야는 창밖에 있었지만, 폭풍은 그녀의 안에 있었다. 좁은 방, 좁은 세계, 좁은 관계 — 이 좁음이 감정을 압축했다. 밖으로 나가면 감정은 흩어진다. 사람을 만나고, 풍경을 보고, 새로운 경험이 감정을 희석시킨다. 에밀리에게는 그 출구가 없었다. 감정이 갈 곳이 없었으므로, 감정은 안에서 끓었다. 끓고 끓어서, 글이 되었다.
함께 살던 언니 샬럿도 소설을 썼다. 《제인 에어》. 훌륭한 소설이다. 그러나 샬럿의 소설은 세상과 대화하는 소설이다. 사회적 계급, 여성의 위치, 도덕적 선택 — 밖의 세계와 교섭하는 이야기. 에밀리의 소설은 다르다. 세상이 없다. 사회가 없다. 있는 것은 두 사람의 감정, 그리고 황야뿐이다. 바깥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소설이다.
에밀리의 전기를 읽으면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 이 여자가 거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편지에도, 대화에도, 감정이 거의 없다. 조용하고, 내향적이고, 사람을 피했다. 황야를 혼자 걸었고, 개를 좋아했고, 사람 앞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여자의 소설에 감정이 폭발하고 있다. 일상에서 표현하지 못한 모든 것이 소설 안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글은 그녀에게 유일한 출구였다. 말로는 할 수 없었던 것, 관계 안에서는 꺼낼 수 없었던 것, 요크셔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딸로서는 보여줄 수 없었던 것 — 그 모든 것이 히스클리프의 입을 빌려, 캐서린의 몸을 빌려, 황야의 바람을 빌려 나왔다.
《폭풍의 언덕》이 출간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경악했다. 이토록 거칠고 잔인한 이야기를 누가 썼는가. 작가가 여자라는 것이 알려지자 경악은 배가 되었다. 에밀리는 출간 이듬해에 죽었다. 서른. 결핵이었다. 치료를 거부했다. 죽는 날까지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했다고 한다.
에밀리 브론테가 보여주는 것은 이것이다. 경험이 없어도 글을 쓸 수 있다. 아니, 경험이 없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밖을 모르기에 안을 더 깊이 파는 것이다. 세상이 좁을수록 자기 안의 세계는 넓어진다.
방 안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 그 방이 글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에밀리 브론테의 목사관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