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벽의 끝, 결혼 (2)
'시작되는 인연에 결코 우연이란 없다.'
버스 입구에서 내가 앉아있던 뒷자리까지 성큼성큼 걸어오던 로버트의 첫인상은 '멀대 같다.'였다.
하얀 살에 큰 키, 마른 몸, 그리고 턱 밑에는 염소 같은 수염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은 풍겼지만 뭐 빛이 번쩍 거렸다느니, 종소리가 들렸다느니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그냥 배낭여행을 하는 누군가가,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오하카로 간다는 그 사실만으로 친근함이 느껴지는 정도였달까.
오하카(Oaxaca)까지 6~7시간 정도 걸리는 버스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독일 사람이고, 몇 년 전 칠레에 교환학생으로 온 적이 있었기에, 그때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를 여행했다고 한다. 이번에 멕시코에 온 이유는 멕시코시티에서 하게 될 인턴십 때문이라고. 다만 친구들이랑 오하카에서 4박 5일을 머문 후 다시 멕시코시티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어? 나도 4박 5일 후에 멕시코시티로 돌아가야 하는데.."
우연히 만난 사람과 이번엔 우연이 같은 일정이라니.
버스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냥 동독 출신인 그가, 남북한 관계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그쪽에 대해 질문을 좀 했었고, 자기는 불교 신자라고 얘기하며 불교 얘기도 꽤 했던 거 같다. 또 둘 다 CD를 한 2~30장씩 지니고 있었기에 서로의 것을 구경하며 교환해서 듣기도 했다. 그가 김종서 9집을 듣고 카피하고 싶다고 했던 기억이 있고, 이소라 6집을 듣고는 너무 슬프다고 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그때의 로버트를 생각하면 참 편안하다. 서로 몇십 년을 알고 지낸 듯한 편안함이 있었다. 20대 때의 나는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투명하게 이야기한 적이 손에 꼽혔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 그냥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달까. 여기서도 조금 특이하고, 저기서도 조금 특이한 그런 존재. 그런데 '처음 본 이 사람한테는 왜 이렇게 내 마음속 얘기가 술술 나오지?'라는 낯선 느낌이 있었다.
그에게 나를 만났을 때 첫인상이 어땠는지 물어보자, 그는 오래 안 듯한 편암함도 있었지만, 뭔가 아무런 준비 없이 홀로 여행을 온 동양 여자에 대해 호기심이 더 컸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그 흔한 가이드북, 아니 지도 한 장 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당장 오하카에 도착해서 머물 곳도 정하지 않았더랬다. 나한테는 이게 아주 일상이었는데, 준비성이 철저한 그에게는 흠짓 놀랄만한 일이었다고. 게다가 2주간의 여행인 것에 비해 너무나도 작은 짐을 갖고 있는 것도 뭔가 이상했다고 한다.
이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버스 안에서의 일정이 나의 삶을 바꿨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의문인 점이 있다. 로버트를 만난 건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내가 그때 1등급 버스를 그냥 기다렸더라면,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을까? 아니면 오하카에서 만나서 지금처럼 인연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한 선택으로 인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경험과 인연으로 일생이 그려지는 듯하다. 어쨌든 영원히 방랑만 할 것 같았던 내가, 그 버스에서 우연이 로버트를 만난 후 다사다난한 사건을 지나 이렇게 결혼을 했다.
시작되는 인연에는 결코 우연이 없음을, 나는 믿는다. 또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연이, 우연이 아닌 그 나름대로의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