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nes own Seoul

탐폰의 진자운동

by 한량

나는 전형적인 문과생, 이건 반은 타고났고 반은 주입된 결과라고 본다. 세상은 그리 또각 분절되지 않으니. 그래서 그랬을까. 문과생이라고 과학 수업을 패스할 수 없는 세대였다. 더불어 대학에 가서도 여러 계열의 교양 수업을 이수해야 졸업이 가능했다. 생물과 지구과학에는 분명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었다. 식물의 생장점, 세포의 분열, 그리고 남중 고도까지. 주로 풀과 빛, 날씨와 천체에 관련된 부분에 나는 쉽게 매혹되었다. 화학은 화학 나름대로의 가지런한 정렬이 마음에 들었다. 복잡한 수식을 더하고 뺐을 때 똑 떨어지는 명료성, 그건 내가 잠시 엿볼 수 있는 합리적 세계였다. 문제는 늘 물리였다.


왜 갑자기 엘리베이터의 추락 속도를 구하라고 하지? 그 안에 든 사람은 어쩌고.


정말이지 아무도 그 안에 든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뿐만 아니다. 오십 킬로미터 퍼 아워로 달리는 버스에 탄 사람이 펄쩍 뛰어올랐다 다시 떨어지면 그 사람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가? 정답은 관성이 어쩌고 저쩌고 하겠지만, 우리에겐 여러 논의들이 남아있었다. 달리는 버스에서 함부로 뛰어오르는 것에 대한 윤리적 관점과, 안전벨트 미착용에 관한 우려, 나아가 사회적 합의의 여부까지. 그런 걸 쏙 빼놓은 물리책은 언제나 가혹하고 잔인했다.


그러나 그런 나도 확실히 알 수 있는 물리법칙이 있다. 진자운동, 그것도 탐폰의 진자운동이다. 써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눈부신 발명품인지. 탐폰을 쓴 이후로 자면서 피가 새지 않을까, 옷과 이불을 적시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많이 덜게 되었다. 대외적인 활동에서의 우려도 차차 줄어들었다. 그래서 언젠가 완경할 때까지 문자 그대로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동반자가 되었다. 그러나 베테랑이 된 지금도 여전히 껄끄럽고 불편한 순간들이 있다. 바로 새 탐폰으로 교체하기 위해 엉거주춤 두 다리를 벌릴 때다.


다리 사이에 늘어뜨린 실을 찾아 엄지와 검지로 쥐고 잡아당긴다. 이런 때 뭉클한 것은 마음만이 아니다. 피를 한껏 흡수해 무겁고 두툼해진 탐폰이 뭉클, 몸 밖으로 밀려 나온다. 그리고 어김없이 진자운동이 시작된다. 서커스의 공중그네가 이런 느낌일까. 탐폰은 자유로이 회전하며 붉고 진한 피를 턱턱 뿌린다. 예상할 수 있는 장소부터 나중에야 발견하고 놀라게 되는 곳까지. 피는 물보다 진하기에, 그 얼룩은 사뭇 강렬하게 남는다. 물론 나는 지성 있는 교양인이자 23년 차 생리인으로서 이 모두를 매끄럽고 말끔하게 처리할 수 있다. 지난밤 몰래 저지른 살인 흔적을 지우는 것처럼 능숙하고 프로다운 손놀림으로 닦고 지운다. 변기에 혹은 타일에, 속옷과 바지, 매트리스나 이불보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는 일. '여성들은 완력이 약하기에 우발적인 범죄보다 계획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많죠. 그에 기인해 같은 범죄라 해도 여성들에게 더 높은 형량이 선고됩니다.' 그럴 땐 꼭 이런 문장이 떠오르곤 했다.


가끔은 작은 플라스틱 안의 하얀 솜을 생각한다. 이 넉넉한 흡수력과 정교한 구조, 티 없이 밝은 하얀 솜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남자들을 위한 게 아닐까? 하는 고까운 의심도 든다. 세상의 반, 거기에 다시 사분의 일이 아랫도리에 피칠갑을 하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까무러칠지 모른다. 심약한 심장이 박동을 멈추고, 적녹색맹을 제외한 이들의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많이? 그렇게나 오래? 그제야 이런 질문을 던질지 모른다.


응, 생리 기간의 전후에도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는 호르몬이 아랫배를 당기고 밀어대곤 하지.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해. 피임약을 먹고 시험을 치르고, 출근을 하고 야근을 하지. '엄마'라는 발음만은 누구보다 또렷한 아기가 '엄마, 엄마, 엄마' 연이어 불러대는 소리에 점점 울음이 섞여들 때, 민첩하고 가쁜 손놀림으로 탐폰을 바꿔 끼우고 잔여물을 처리하고 비누로 손을 씻지. 서둘러 속옷과 바지를 꿰어 입고 잠긴 화장실 문을 두드리던 아기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문을 열지. 그래서 언젠가 둘만의 나들이에서, 나는 아기가 유아차 속에서 잠든 것에 몹시 안도했어. 아무리 넉넉한 크기의 화장실이라고 해도 이 모든 거창한 작업을 깨어있는 아기와 함께 하긴 어려우니까. 만약 아기가 잠들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참아야 했을 거야. 탐폰이 퉁퉁 불고, 생리대가 축축해져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러다 혹시 엉덩이에 얼룩이라도 졌다면 그 얼룩 위로 칠칠치 못한 사람, 깔끔하지 못한 사람, 자기 관리 못하는 사람, 제정신 아닌 사람, 미친 사람, 더러운 년이란 말이 덕지덕지 붙게 되겠지.


죄를 지은 몸, 불결한 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속죄해야 하는 몸. 숲 속 움막에서 생리 기간을 나야하는 여성들을 생각한다. 한 날 한 시 우리 모두가 피를 뚝뚝 흘리며 거리를 행진한다면 이런 것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 밝고 맑고 환한 미소의 소녀들이 하얀 배경 앞에서 빙글빙글 돌며 날렵함과 발랄함을 뽐내는 생리대 광고 말고, 붉고 진하고 때론 탁하고 거무튀튀한 핏자국만 낭자한 광고가 나온다면 좀 달라질까. 나는 내 몸에서 나오는 피를 매달 보기에 그 피가 하나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은데, 겪을 리 없는 누군가의 무서움과 두려움, 거기에서 유발되는 거부감과 역함을 방지하기 위해 보송하고 매끈한 척 위장하는 것이 몹시 피로하다. 피로로 점철된 한 주를 보내고서 그 힘듦을 잊지 않기 위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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