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어족, ‘조기 은퇴'의 꿈이 향하는 곳

칼 폴라니의 '사회적 자유'로 나아가야 할 때

by 한영섭


파이어족 ‘조기 은퇴'의 꿈이 향하는 곳

: 칼 폴라니의 '사회적 자유'로 나아가야 할 때


한영섭 (금융과 미래)


최근 청년들 사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파이어(FIRE)족' 열풍을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 젊은 세대가 '경제적 자유'라는 깃발 아래 조기 은퇴를 꿈꾸는 모습은, 언뜻 보기에 치밀한 재무 계획과 강력한 실행력을 갖춘 성공담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청년들의 간절한 열망과 다른 삶에 대한 동경에 깊이 공감한다. 과도한 노동 시간, 불확실한 미래, 끝없는 경쟁에서 벗어나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통제하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아가는 삶.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풍요로운 해방구처럼 느껴지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파이어 운동은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글로벌 현상이지만, 유독 한국 사회에서 이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 데에는 우리 사회의 고유한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 극심한 취업난을 뚫어도 기다리는 것은 불안정한 고용과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소득의 대부분을 주거 비용이나 빚 갚는 데 쏟아부어야 하는 현실, 그리고 국가나 사회가 나의 노후를 책임져 주리라는 기대가 희박하다는 절망감이다. 이러한 구조적 압박 속에서 '파이어'는 단순한 라이프스타일 선택이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로부터 어떻게든 나 홀로 살아남아 인간다운 삶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파이어족이 추구하는 '경제적 자유'는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극단적인 절약과 물질적 자산 축적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시장의 변동성에 자신의 안녕을 온전히 내맡기는 삶이,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이상일까? 이 지점에서 인류학자이자 경제사상가인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통찰을 빌려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폴라니는 그의 역작 『거대한 전환』에서 인간의 삶이 시장 논리에 예속되면서 발생하는 비극을 경고했다. 그리고 시장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market)와 더불어, 사회적 자유(Social Freedom)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적 자유란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 일을 하지 않을 자유가 아니다. 이는 인간이 경제적 이해관계에만 지배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안전한 관계를 맺고, 서로 신뢰하며 연대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이다. 경제가 인간과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시장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할 때, 인간은 고립되고 불안해지며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된다.


파이어족이 돈이라는 물질적 부를 통해 쟁취하려는 '경제적 자유'는 어쩌면 시장 논리 안에서의 자유일 뿐, 폴라니가 말한 '사회적 자유'와는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오롯이 개인의 자산에만 의존하는 삶은 공동체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타인과의 신뢰 관계나 사회적 연결망인 '사회적 부'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또한, 물질적 부 축적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소진을 겪거나 삶의 의미를 잃는다면 '정신적 부'를 잃게 될 수도 있다.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투자는 결국 우리가 살아갈 '생태적 부'를 훼손하기도 한다.

진정한 풍요와 지속가능한 사회는 바로 이 생태적 부, 정신적 부, 사회적 부, 그리고 물질적 부라는 네 가지 차원의 부를 균형 있게 쌓아가고 서로 연결시킬 때 가능하다고 믿는다.


* 생태적 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그 자체의 건강함이다. 이는 모든 생명 활동의 근원이자 미래 세대의 자산이다.

* 정신적 부: 내면의 평화, 삶의 의미와 목적, 타인과의 공감 능력 등 인간 내면의 충만함이다.

* 사회적 부: 서로 돕고 신뢰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공동체의 힘, 끈끈한 관계망이다.

* 물질적 부: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자율적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자산이다.


파이어족이 추구하는 물질적 부는 물론 중요하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될 때 우리는 생태적, 정신적, 사회적 부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부가 고갈될 때, 물질적 부만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근본적인 불안정과 고립에 빠지게 된다. 파이어족의 절박한 동경은, 사실 물질적 부를 넘어선 이 세 가지 부의 빈곤을 우리 사회가 겪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이다.

결론적으로, 파이어 열풍은 청년들이 느끼는 깊은 좌절과 더 나은 삶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투영된 현상이다. 그러나 개인이 물질적 부만을 좇아 시스템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만으로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그것이 책임있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써 자유인지 묻지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물질적 부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장 사회를 넘어, 인간과 사회, 생태계가 조화롭게 공존하며 네 가지 부가 모두 풍요로운 사회를 향한 과감한 전환을 시작해야 한다. 이는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모든 시민이 생태적, 정신적, 사회적, 물질적 부를 고르게 누릴 수 있도록 시스템을 재설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체를 복원하며, 환경을 보호하고, 인간적인 노동과 돌봄의 가치를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파이어족의 절박한 꿈을 넘어선, 모두가 함께 누리는 진정한 '사회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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