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mbley golf course, Perth, Australia
호주 퍼스에서 연말을 보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별 감흥 없이 새해를 맞게 됩니다. 신영복선생의 글처럼, 새로 받아든 달력의 공백들이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들로 채워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낍니다. 특히 곧 대학생이 되어 가족의 품을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 할 큰 아이에게. 그러나 딜레마입니다. 소위 덕담이라 하는 말들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지, 그리고 휴가지에서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만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인생의 대부분은 소설처럼 비극적이지도 영화처럼 다이나믹하지도 않을테니 혹시라도 살면서 우연히 그런 기회를 만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가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메모지 한장에는 도스토예프스키라 적고 다른 장들에는 각각 5분과 2분 그리고 1분이라 적은 다음에 하나씩 넘겨가면서 그가 사형대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원할 것 같고 당연히 주어지는 것의 가치는 결핍되고 절박해서야만 가치가 드러난다는 이야기지만, 아이들은 금새 따분해하고 결국 잔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나간 시간이나 역사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시간은 많고 느리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번 여행에 다녀온 곳과 갈 곳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았을 것 같습니다.
평범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기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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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아직 잠들어 있는 새벽에 주섬주섬 짐을 챙겨 웸블리 골프장에 왔습니다. 큰 아이도 같이 갔으면 했지만 녀석은 밤 늦게까지 게임을 하고 늦잠자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처음 와보는 도시에서 적당한 골프장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몇군데 추천을 받기도 했고 골프장 리뷰를 찾아봤지만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보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검색 결과는 넘쳐나지만 다들 비슷비슷한 내용이라 정작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좋은 정보를 찾기 어려운 것은 인터넷이 있기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국 두세군데 골프장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비교하다가 퍼블릭 골프장으로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곳 중 하나라 웸블리 골프장을 골랐습니다.
오는 길에 맥도널드에 들러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골프장에 도착해보니 생각보다 규모가 큽니다. 호주에서 가장 크다는 드라이빙 레인지와 연회목적으로 보이는 고급 레스토랑과 간단한 카페테리아 그리고 상당히 넓은 프로샵이 있는걸로 봐서는 호주에서의 첫 라운드 목적지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이라 골프장이 조용합니다. 조금 떨어진 연습그린에서 뭔가 작업을 하고 있고 있는 그린키퍼로 보이는 사람의 굿모닝에 나도 굿모닝하고 인사하고 프로샵에서 오늘 쓸 공 몇개와 기념품을 사서 나와서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토트Tuart 코스 1번 홀 티박스에서 약간 늦장을 부리면서 앞으로 몇 시간을 함께 할 코스를 살펴봅니다. 그린까지 직선거리 340야드 내리막 짧은 파 4 우도그렉. 우측언덕을 넘기면 100야드 내외의 짧은 세컨을 남길 수 있지만 티샷에서 캐리 220야드를 편하게 보낼 수 없다면 호주의 질긴 잡풀들 사이에서 헤매게 될 것 같습니다. 첫 티샷부터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넓은 좌측으로 편하게 티샷했는데 페어웨이에 떨어진 공이 벙커까지 굴러들어갔습니다. 생각보다 우에서 좌로 흐르는 내리막이 가파른가 봅니다. 남은 거리는 120야드 밖에 안되지만 여기서는 벙커를 탈출하는데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번째 샷으로 그린에 올라가서 보기로 마무리하면서 혼잣말을 합니다. 그래도 좋은 시작이야.
두번째 홀은 지난 홀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경사를 되짚어 올라가야 하는 오르막 파4입니다. 살짝 좌측 도그렉 홀이라 페어웨이 좌측을 따라가는 티샷을 하고 싶지만 험상궂은 나무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습니다. 우측은 좀 안전할까 싶지만 페어웨이에 떨어진 티샷이 경사를 타고 내려갈 곳에 큰 벙커가 기다리고 있고, 안전하게 간다면 180야드 이상의 오르막 세컨샷을 남기게 됩니다. 역시 인덱스 1로 꼽히는 어려운 홀 답습니다.
3번 홀 티박스에 올라보니 그린플레이를 하고 있는 앞팀이 보입니다. 두명이서 퍼팅을 하고 있기에 면세점에서 사 온 시가에 불을 붙히려고 하는데 티샷을 하라고 손짓을 합니다. 매너 좋은 친구들입니다. 주변에 장애물이 없는 무난한 홀이라 5번 아이언으로 편하게 쳤는데 그린 한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퍼터를 들고 그린에 올라가서 내게 순서를 양보해준 호주 친구들에게 난 혼잔데 너희는 둘이니까 나랑 같이 칠래 물어보니까 얼굴이 빨개지면서 자기들은 정말 초보라면서 손사레를 치며 먼저 가라고 합니다. 덩치는 산만한 녀석들이 참 순진합니다. 그래 굿 게임해라.
페어웨이 양쪽을 벙커가 지키고 있고 그린은 손바닥만한 4번홀을 지나서 6번홀은 파5에 도착했습니다. 파 70 코스라서 전반과 후반에 파 5가 하나씩 밖에 없습니다. 내리막이라서 티샷이 잘 나가면 투온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욕심낸 티샷이 오른쪽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좀 뒤지면 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러프에 가득한 무릎높이의 잡풀들이 반바지 아래를 찔러대서 공찾기를 포기합니다. 아까 클럽하우스에서 샀던 로고볼 중 하나를 여기서 버리고 갑니다.
7번 홀 티박스에는 호주 친구들이 원온을 하겠다고 그린이 비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티박스에서 그린이 훤히 보이는 280야드 파 4라서 힘 좋은 친구들이 한 방을 노릴만 하겠다 싶습니다. 가만 보니 저기 멀리 200야드 부근에 오른쪽이 절반이상 부러진 큰 나무가 보입니다. 아마도 저 나무가 한창일 때는 누구도 감히 원온을 노리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페어웨이 절반을 뒤덮었을 나무를 병들게 했고 몰락한 가문의 솟을대문에는 난봉꾼들만 들락거립니다.
전반을 마치고 나니 좀 피곤합니다. 풀카트를 끌고 1시간 20분만에 9홀을 마쳤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가지고 온 시가를 피울까 아니면 최대한 빨리 게임을 마치고 가족들이 아침식사 마치기 전에 호텔로 돌아갈까 싶습니다. 바로 후반을 시작하기로 하고 티박스로 가다가 아까 굿모닝했던 나이든 그린키퍼와 마주쳤습니다. 오늘 게임 어땠냐고 물어보기에 코스가 좀 쉬운것 같은데 스코어가 잘 안 나온다고 했더니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되묻습니다. 전반적으로 장애물 숫자가 적고 그린사이드에서 대량 실점할 함정이 별로 없는것 같다고, 게다가 전장이 짧아서 너희 호주 친구들이 원온할 수있는 홀도 두어개 있는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10번 홀 왼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후반에는 큰 코 다칠거라고 껄껄 웃습니다.
좌측 나무 밑만 아니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던 10번 홀에서 티샷이 좌측 나무 밑에 떨어집니다. 여기서 설마를 만납니다
8시부터가 피크타임인 것 같습니다. 12번 홀 다음 부터는 매번 샷을 하고 한참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갑자기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후반에 있는 홀들은 특색 없이 밋밋해 보입니다. 페어웨이를 가릴듯말듯한 나무도 별로 없고 홀들이 비슷비슷해서 다이나믹했던 전반의 홀들이 아쉽습니다. 느리게 홀을 거듭하다가 15번 티박스에 올라서는데 마음이 급해집니다. 너무 늦게 가면 오후일정에 차질이 생길 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그만하고 돌아갈까 싶습니다. 어차피 홀도 거기서 거기같은데.
그러나 시작한 것은 끝을 내기로 그리고 이번이 호주에서의 마지막 라운드인것 처럼 생각하고 한 홀 한 홀 쳐나가다보니 18번 홀에 왔습니다. 페어웨이는 넓고 벙커는 그린 주변에 하나밖에 없는 만만한 350야드 파 4입니다. 여기서 버디 한번 하고 가야지 싶었지만 역시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습니다.
떠나기전에 18번 홀 그린을 내려다 보며 마치 다른 사람이 다른 시점에 만든 것 같았던 전반과 후반을 생각해봅니다. 후반에 집중력을 잃었던 것이 아쉽습니다. 내가 만일 이 동네에 산다면 주말 아침마다 이곳에서 덩치는 크지만 순진한 호주 촌사람들과 재미있는 라운드를 할법한 평이하고 접근성이 좋은 곳 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여행객으로 다시 퍼스에 온다면 일부러 이곳을 찾아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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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반구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가 아는 모든 세상은 지금 겨울인데 이곳은 여름이라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옛날 이 땅에 온 사람들에 이곳은 얼마나 먼 곳이었을까 싶습니다. 더구나 본국에서 죄를 짓고 떠밀려온 사람들에게 호주는 그야말로 버려진 세상의 끝 같이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퍼스라는 도시명은 그들이 떠나온 스코틀랜드의 지명을 따서 만든 이름이라고 하지만, 도시 곳곳에 남겨져 있는 영국식 건물과 동상들에서는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이국땅에 자리잡고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잔한 정서가 아니라 지배와 통치를 위한 권위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지역민 대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그들을 이곳에 보낸 체제와 권력에 의해 관리되어져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과거와 근원이 어찌되었건 지금 이곳은 참으로 풍요롭고 여유롭습니다.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미소를 보내고, 공원과 해변가에는 느긋한 부모들과 뛰어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합니다.
내가 새벽에 일어나 골프나간 사이에 가족들은 퍼스 시내의 쇼핑가를 돌며 각자 원하는 물건을 챙겨들고 기분 좋게 돌아왔습니다. 점심을 먹고 퍼스 북쪽에 있는 Pinnacles 사막에 갔습니다. 사막의 붉은 흙위로 수천개의 돌들이 동상같이 서 있는 이국적인 풍경이 마치 외계행성에 와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여기에서 멀리 지평선위로 떨어지는 해를 볼 것이고, 조금 더 기다렸다가 별들을 볼 것입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은하수를 볼 것이고, 아이들은 아마도 난생 처음으로 북두칠성이나 카시오페아 같은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피나클 사막에서 나는 나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지만 누군가는 아이들과 가족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주부라는 평범한 이름을 받아들인 용기있는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