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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Aug 15. 2022

can't help -ing

숨은 제주를 발견하는 재주 1-1.

금의 mbti 테스트 유행처럼 100문 100답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활동하던 대학 동아리 Daum 카페는 100문 100답으로 가입 인사를 대신하기까지 했다. 

(다음 카페라니 호랑이 덤블링하던 시절 이야기 같긴 합니다만)100가지 질문에 답변을 다 마치고나면 그동안 나도 몰랐던 자아정체성에 한 번 놀라고, 이걸 기어코 다 대답해내는 나의 끈기에 두번 놀라게 된다는 공포의 100개 질문 중 다음 질문이 기억난다.

"좋아하는 영어 표현은?"

당시  한 살의 내가 뭐라고 대답했나 찾아봤더니

"can't help -ing(-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적어놓았더라. 당시에도 사랑 수밖에 없는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지난 글에 소개했던 강정 해안도로도 나의 'can't falling in love' 리스트에 올라가 있 바, 가만히 생각해보니 왜 내가 이곳을 사랑하는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더라. 그래서 찾아봤다. 내가 그 많은 바다 중 유독 강정해안도로(강정 바다)에 자석처럼 끌리는.



강정해안도로는...


1

제주도에서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유일한 바다다. 십 년 전만 해도 월정,세화.대평 바다 등 개발되지 않은 바다 꽤 있었는데, 그사이 모두 개발의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개발(Dog foot)을 하고 말았, 지금은 이들 모두 '이건 아니다 싶을 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렸다. 

그동안 사랑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강정해안도로만 개발되지 않은 이유 뭘까? 이곳이 '애써 찾아가야 하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추측한다. 제주도 바다 중 '도로 끝' 표지판을 보고 차를 돌려야 하는 곳은 (아마도) 여기뿐이다. 제주도에서 장소 간 이동을 할 때 이곳을 거쳐가려면 2배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이곳에 처음 가보려는 사람은 2배 이상의 애정을 필요로 하는데, 바로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한다. 그 결과 '제주도에서 반드시 가봐야 하는 관광지 Top 10' 따위의 추천에서 빠지게 되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바다가 되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 (난 그저 고마울 따름이고. 적어도 나 죽을 때까지는 그래주길 바랄 따름이고.)


2

개발되지 않았기에 사람이  않고, 사람이 몰리지 않기에 앞으로도 개발될 확률이 낮다. MBTI가 I로 시작하는 사람에게 강정해안도로는 최적의 쉼터이자 최후의 피난처다.

밤에 걸으면 걷는 사람이 나 혼자 인 경우가 많아서 감정이나 생각을 정리하는 데이만한 데가 없다. 밤에 혼자 걷는 게 겁난다면 둘이서 대화를 나누며 걸어도 좋다. 내가 여행사를 차린다면 마지막 코스는 '밤에 강정해안도로 말없이 걷기'로 하고 싶을 정도로 밤에 걷기 좋은 코스다.

어제 밤에 걷다가 아스팔트 길에서 만난 게. 놀랐냐? 나도 놀랐다

3

제주도 바다 중 좌우로 가장 먼 땅을 바라볼 수 있는 바다다. 저멀리 송악산까지 볼 수 있다. 유선형으로 길게 이어진 땅이 나를 품 안아주는 느낌이 든다. 땅끝만 보고 어도 마음이 편해진다.

저쪽 땅 끝에 보이는 게 송악산이다


4

눈높이와 바다가 수평을 이루는 지점이 많다.

절반의 하늘 + 절반의 바다 = 내 마음에 평화.

어떤 날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희미해져 온 세상이 하늘이 되었다가 바다가 되었다가 한다.

오마니, 이게 그 유명한 데칼코마니?

(드립 죄송합니다. 도저히 이 드립은 안고 넘어갈 수 없어서 그만...)


5

사람이 일정 수 이상으로 많아지면 반드시 작동하기 마런인 '진상 보존의 법칙'이 여기서는 작동되지 않는다. 주로 산책이나 운동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찾기에 대부분 매너가 좋다, 라고 쓰려는데 알박기 스멜이 나는 카라반을 발견했다. (강정해안도로에 왔다가 핸드폰으로 글을 수정하고 있다. 이 문장은 일단 보류)


6

최고의 라이딩 코스다. 오르막이 한 군데 있지만 경사가 가파르진 않다. 당신이 이곳에서 모터바이크나 자전거를 타보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이 부럽다. 이곳에서 두 바퀴의 탈것을 타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도 여기서 처음 두바퀴의 탈것 위에서 내리막을 달리던 그 기분, 또 느껴보고 싶다.)


7

강정해안도로의 끝에서 10분만 더 걸어가면 월평포구가 나온다. 월평포구 바로 위에 아는 사람만 아는 일몰 맛집이 있다. 이곳에서 제주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해안지형 조망할 수 있다.

월평 포구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봤는데... 분명 찍었는데, 없다. 내 월급처럼, 분명 있었는데, 없다. 월평 바다 중간에서 찍은 사진으로 대체한다.


8

저녁이나 밤에 운 좋으면 반딧불도 몇 마리 만날 수 있다.


9

별이 잘 보인다. 제대로 된 우주 바이브를 느낄 수 있다. Daft punk의 'Contact'를 헤드폰으로 들으면 걸으면 우주 여행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밤에 강정해안도로에서 헤드폰 끼고 춤추면서 걸어다니는 지구인을 봤다면, 그게 나다.


10

진화심리학 이론으로 접근해보자.

먼 옛날 수렵채집으로 생존하 시절, 앞이 트이지 않은 장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언제 어떤 맹수가 튀어나와 날 공격할지 모르니까.

불안에 잠식당한 인간은 앞이 시야가 탁 트인 장소를 선호하게 됐다. 이 마음이 유전되어 지금도 이런 장소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이론이 '사바나 가설'이다.

강정 해안도로가 딱 이런 장소. 가보면 무슨 뜻인지 안다.



(p.s)

스물한 살의 내가 좋아하는 영어표현으로'can't help -ing'를 꼽는 데 엘비스 프레슬리의 「can't help falling in love」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옆 대학 축제에서 야반도주라는 이름의 펑크밴드가 이 노래를 커버하는 걸 보고 펑크 밴드의 리더가 되고 싶다는 꿈을 처음 가졌고(내 꿈 중 유일하게 시도도 해보지 못한 꿈이다) 이 노래를 사랑하게 됐다.

얼마 전 엘비스 프레슬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ELVIS」가 개봉했다. 이 영화 OST에 can't help falling in love」의 2가지 버전이 실렸는데(Presley&Mark ronson, Kacey Musgraves), 두 버전 모두 아주 그냥 can't help falling in love 다. 한 번 들어보시길. can't help falling in love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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