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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요람 Apr 04. 2022

지역 문화예술의 고유한
비평 문화를 꿈꾸며

비평 - 연극 비평지 <봄> vol.17 수록 

 01

 우선 지금 당장 우리 앞에 닥친 일들 중 가장 큰 일부터 이야기해야겠다. 

 21년도 12월이 된 지금 우리는 코로나와 2년이라는 시간을 싸워 왔으며, 문화 예술계는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무수한 피해들과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면서 쌓여만 가는 무기력증과 싸워야 했다. 과연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나간 뒤에도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반면 이 과정 속에서 미래 예술에 관한 정말 수많은 논의가 있었고, 사이버 공간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의 훌륭한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개념 장사하는 보따리 장사꾼들은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개념을 끌어와 사람들을 흔들어 놓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사이 자칭 전문가라는 무리까지 만들어져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풍경과는 별개로 비대면 일상이 우리에게 가져온 것이 또 하나 있다. 재난은 언제나 취약한 부분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결국엔 이 취약한 맨살을 밖으로 그대로 끄집어 올리고야 마는 법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그동안 우리가 묻어두고 있던 사실, 어쩌면 바쁜 시간 속에서 외면하고 있던 우리 앞에 닥친 사실들을 이제야 주의 깊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두가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먼 미래의 일 일거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재난 상황을 빌미로 가속화되면서, 바로 우리 눈앞에 닥쳐버린 ‘현실’이 되어버렸고, 그제야 우린 이를 수습하려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지역 문화 예술의 많은 문제점들은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만천하에 민낯을 드러내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이 ‘문제’가 멈춘 듯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 사안이 아닌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우리를 갉아먹고 있는 문제라는데 있다. 

 요즘 수많은 레퍼런스와 비평문들을 보면 문화 예술계 미래의 암담함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처절한 의지를 만날 수 있었다. 나아가 지역 문화예술계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젊은 예술인들의 이탈과 계속되는 작품의 퀄리티 저하 문제, 안일한 창작 정신 등에 대한 자조의 분위기가 일고 있으며, 이제는 전망이 아닌 이 모든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우리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가장 답답한 부분은 문제가 있음을 직시하고 있음에도 해결 방안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문화예술 관련 중앙기관, 공연예술단체 등은 서로의 입장과 목소리를 내며, 다양한 토론회와 설문 등을 통해 문제점을 직시하려고도 하지만 서로 간의 입장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가 않고 있다. 게다가 같은 문제라고 해도 각자의 사정에 따라 문제의 인식이 상이한 경우는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문제점들 또한 비슷하더라도 그 결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라는 도시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A’라는 도시는 예술가가 예술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 ‘α’라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하지만 옆 도시 ‘B’는 ‘α’에 해당되는 문제점은 없지만, 동시에 ‘β’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중앙기관에서는 이러한 전국적인 문제점들을 종합하고 다양한 리서치를 통하여 보고서를 통해 ‘χ’라는 대안을 제시했다고 치면, 과연 이 대안 χ는 문제 ‘α’와 ‘β’에 대처를 할 수 있는 해답이 될까? 

 다들 직감하고 있겠지만 그러긴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든 ‘α’에서 발생한 또 다른 변수 ‘α+’나 ‘β’에서 나온 변수 ‘β+’가 발생할 가능성은 늘 열려 있기 때문이다. 즉 중앙 리서치나 정책적인 변화는 아주 큰 그림으로써 도시 ‘A,B,C,D....’가 모여 있는 총합으로써 ‘국가’차원에서 논의 될 수 있는 대안이지 결코 지역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만능의 해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까? 내가 보기에 어느 순간부터 수도권 외 지역에서 새로운 논의가 나오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은, 기관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지원사업들의 한계에서 오는 문제점도 있겠지만, 필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창작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일을 고립시킨 측면도 크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역 문화예술의 비평에 부재에서 오는 부분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비평에 있어 현장 예술가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평이라는 이름을 걸고 진행할 수 있는 다양한 행위-즉 학술회의, 워크숍, 비평 기능을 할 수 있는 종이매체의 발간 등등 수많은 비평적 행위가 이뤄지는 공간들 속에서 비평은 대체로 교수, 강사, 그리고 문화예술 전문가라고 불리 우는 사람들 고유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비평이라는 분야가 가장 절실한 현장 예술가들이 비평에 있어 소외되는 기묘한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즉 현직 예술가의 목소리는 직접적으로 비평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에게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 위에서 언급한 속칭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서만이 세상에 보여진다는 것이다. 또한 일부 예술가들은 이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정책적인 제안을 해줄 수 있기를 기대하는 사뭇 놀라운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물론 나는 필드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목소리만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내는 형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창작에 자극이 되는 예술적 기류는 언제나 다양한 창작자들이 모여 서로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꼭 ‘비평지’라는 확고한 물리적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여도, 예술 현장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이뤄지는 상호 간의 ‘비평’ 행위가 얼마나 창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말 안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예술가들의 소통 행위로써의 비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지금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들 중 다수가 바로 이 비평 문화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비평 자체가 현장으로부터 벗어나 객관적인 공연 관람기 혹은 리뷰가 비평의 전부인양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점은 묻어두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다시 제자리로 더 큰 파장을 몰고 돌아오게 되어있다. 이 ‘문제’라는 오발 지뢰를 처리할 방법을 몰라 땅에 잔뜩 묻어 두고, 시간이 지나고 우연한 사고로 인해 밟혔을 때 연쇄로 터져버리고 만 꼴이다. 


 더 좋은 예술로 나아가고자 하는 개성 있는 표현에 대한 갈망과 욕구는 예술가의 본능이다. 이러한 표현은 결국 다양한 예술적인 실험을 기반으로 탄생한다. 이는 개인에 의해서 발현되기도 하지만 예술이 시대를 대변하는 거울이 되기까지는 개인과 개인이 모여 이룬 집단의 힘이 필요하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잊혀가던 작가 에밀리 디킨슨을 발견하고, 윌리엄 블레이크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비평이라는 힘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장 뤽 고다르, 프랑소와 트뤼포, 에릭 로메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등의 누벨바그 영화감독들은 앙드레 바젱이 창간한 비평지 <카에뒤시네마> 지면을 통해서 이뤄진 무수한 토론 속에서 서로를 만났고, 이후 비평지면을 넘어 촬영 현장까지 이어진 비평과 토론을 통해 매우 다른-개성 있는 미학의 형태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러나 현재 지역 예술이 매너리즘에 빠진 이유는 이러한 비평적 기능을 수행할 매체나 공간이 없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연구는 언제나 실험실을 필요로 한다. 공연예술을 예로 들자면 ‘극장’이라는 연구 데이터가 널려있는 ‘필드’는 있지만 이 데이터가 모여 논의를 이루는 ‘실험실’은 없다. 이 실험실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비평 행위이다. 

 물론 여전히 열심히 비평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지역의 많은 단체나 잡지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실험실’들은 현재 현장 예술가 개개인들에 논의를 이끌어낼 만큼의 영향력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인구수가 적은 도시일수록 서로의 작품과 작업 형태에 대한 피드백은 곧 비난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문제점을 공론 화 할 수 있는 창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비평 문화는-다시 말하지만 이 글에서 비평이란 예술가와 예술가가 만나 창조적 논의를 하는 대면 행위, 비평지와 같은 지면을 통해 의견을 내는 행위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일종에 공론화되어 토론하고 문제점들을 스스로 발견하고 보완해 나가는 그리스의 아테네 광장의 스토아 같은 역할을 해야 된다. 지역 문화예술 비평의 가장 큰 역할은 나라 전체의 공론화된 문제를 인식하는 부분도 물론 있지만, 지역 내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을 돌아보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비평의 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역 내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비전들이 모이며 하나의 사조를 탄생을 예고하기도 한다. 현시대까지 이어져오는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예술사조들이 비평이라는 행위를 통해 만들어져 왔음을 기억하자. 

 이처럼 비평의 역할은 단순히 예술 생태에 이슈를 풀어놓는 역할이 전부가 아니다. 스스로 지역 내에 예술과 예술가가 자생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그 공간 안에서 다양한 주제를 공론화하는 ‘마당’으로써의 역할과 동시에 예술 본연의 역할-미학, 인문학적 탐구, 지역 예술 동향과 현재에 대한 연구 같은 예술 전반의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견인차와 같은 역할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비평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결국 예술가들이 각자의 현장에 고립된 상태를 맞이할 수밖에 없으며, 이 상황 속에서 예술적 갈망은 결코 충족되기 힘들다. 이는 결국 수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떠나 수도로 향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에 따른 인력 수급(배우와 스텝들을 포함)의 문제가 현재의 지역 예술계의 상황들과 맞물리면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몰리는 과도한 멀티성 창작활동은 작품의 질을 떨어트리는 또 하나의 골칫거리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일부 사람들에게 창작활동은 노동행위와 구별될 게 없는 그저 처리해야 될 ‘일’과 같은 위치라는 인식이 자리한 안타까운 모습까지도 보인다. 

 목적을 상실한 창작행위는 결국 이런 비참한 말로로 향할 수밖에 없다. 메시지를 담고자 하지만 몇 년째, 길면 몇십 년째 앵무새처럼 대뇌여 온 메시지가 작품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의 전부가 되고, 새로운 실험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은 대체로 기괴한 이미지만 가득한 예술의 개념적인 측면이 상실되어 있는, 즉 공감능력을 상실한 그들만의 마스터베이션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대중과 예술가, 예술가와 예술가를 기민하게 연결시키던 비평매체의 부재로 인하여 생겨난, 예술이 창작 행위의 대상(이를테면 대중)들로부터 분리되면서 갈라파고스화 되어버린 지역 예술의 현재이다. 



02

 현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렇게 짧은 지면을 통해 이 모든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나는 엄청난 비약을 감행했음을 미리 말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약간의 희망은 없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그렇다. 다만 그 앞에는 이러한 전제가 있어야 할 듯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공연이 활발하게 올라가는 서울은 다양한 단체와 개인이 경쟁하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작품에 대한 피드백에 이뤄진다. 그리고 다양한 관객들이 늘 유입되기에 작품의 창작 환경의 치열함이나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지역과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비평적인 기능이 이뤄지는 서울의 상황과 지역의 예술을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동등한 입장의 게임이 될 수가 없다. 다만 지역의 강점을 다시 살리려면 이러한 비평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함과 동시에, 이로 말미암은 지역 특유의 미학을 다시 적립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 미학이라는 것은 단순히 서울과 구별되는 지역적 특색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사투리를 쓰면서 그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식의 작품들이 지역 미학이라고 포장되어 창작되는 것을 우리는 이미 무수히 목격했을 것이다. 나는 그보다 조금 높은 차원의 미학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 지역이기에 가능한 고유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고, 이것이 지역 예술가들의 눈을 통해 작품을 통해 가공되면서 이를 하나의 미학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나는 진정한 지역 미학이라 칭하고 싶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그 지역에서 존재하던 것일 수도 있고, 완전히 새롭게 탄생한 무언가 일수도 있다. 다만 지역에서 이뤄진 논의 속에서 탄생해야 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게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지역의 이러한 미학적 실험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가 분명 있었고, 그 예를 찾아보면 무수히 많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미학적 실험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또한 어느 순간부터 지역의 비전과 미학이 각 단체 별로 파편화되어 분열되어버렸으며, 고착화되어 지금까지도 변화가 없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자면 이러한 미학적 실험의 모델이 될 만한 창작의 예시는 의외로 대중문화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음악 장르인 ‘힙합’이 그렇다. 뉴욕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힙합은 당시 대중적으로 가장 유행하던 장르인 디스코에다 펑크(funk)나 블루스 등에서 느낄 수 있는 흑인 음악 특유의 그루브 함, 재즈에서 쓰던 보컬 스킬인 스캣(skat), 그리고 파티 DJ들이 이 음악들을 샘플 삼아서 믹싱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에 맞춰 라임(압운)을 짠 즉흥적인 말장난 등이 복합적으로 섞이면서 알게 모르게 이 정체불명의 짬뽕 음악은 뒷골목 사람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가 70년도 중후반부터 20년 사이에 삽시간 전 미국으로 퍼지면서 각 지역의 특색에 맞게 다른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 지역의 기후와 이에 따른 생활 습성, 그 지역에서 유행하던 음악들, 패션과 뒷골목 파티 문화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각기 다른 도시에서, 전혀 다른 문화적 형태로 발전하면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랩 스타일과 비트 스타일이 존재하는, 그 지역만의 로컬 씬(Local Scean)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같은 미국이라고 해도 뉴욕의 랩이 다르고, LA의 랩이 다르며, 마이애미의 랩이 다르고 맴피스의 랩이 다른 이유이다. 그리고 이 로컬 씬들은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 다른 도시의 음악을 로컬 씬에서 대중들과 함께 공유하며, 이를 자신의 지역 아티스트들과 함께 또 다른 형식으로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힙합은 지금과 같은 실험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역동적인 예술의 형태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미디어의 영향과 더욱 쉬워진 지역 간 이동은 21세기 들어서 각 지역의 개성이 풍부한 작품들이 사라지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특정한 공간의 고유한 무언가는 늘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고유함은 각기 다른 공간의 각기 다른 우연들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며, 훗날 그것이 미래의 누군가에겐 갑작스러운 영감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공간이 가진 역사성과 그에 의해 변천되며 현재까지 이어져 온 특유의 고유함은 다른 공간이 가지지 못한 특성을 특정 공간에 부여하게 된다. 이렇게 지역 내에서 존재하는 무언가는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는 없으며, 지역 예술가들은 이것을 창작에 중요한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지역의 개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한다. 단지 인지하고 인지하지 못하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03

 고유 미학의 상실은 결국 지역적 물리적 특색에만 의존한 가벼운 작품들만을 양산하게 되며, 지역 예술가들에게 자극 점이 될-이른바 창작의 ‘구심점’이 될 만한 작품을 제작할 능력을 잃게 만들었다. 이를 상쇄시키기 위해 문화 예술 관련 기관에서는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지역 레퍼토리 작품들을 양산하려 해 보지만, 지역 문화 속에 제대로 적립되어있는 미학적 기틀 없이 지역의 색을 담아내려다 보니 뻔뻔스럽게 과거의 유산만을 답습하는 작품만을 생산할 수밖에는 없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지역 브랜드 공연을 타 지역의 유명한 팀들과 사람들(주로 서울)에게 맡겨 놓고 보니 지역의 색이 전혀 없는 프로타입의 대중적인 창작물이 나와 버리고, 본래 가지고 있던 취지는 갈수록 퇴색해버리고 만다.

 이렇다 보니 지역 미학의 재발견을 위한 고유한 비평 문화의 형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사항이며, 동시에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앞서 언급했듯 오해를 불러올 많은 비약이 있었고, 아직 다루지 못한 시급한 문제점들 또한 많지만 나 또한 지역의 창작자로서 창작행위를 하는 데 있어 이러한 부분이 가장 답답한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이는 작은 지역 내의 창작자들 사이에서도 소통의 부재라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단순히 두고 볼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가 지역 고유 비평 문화를 형성하면서 마주 칠 수 있는 또 다른 어려움은 지역 예술계가 비평에 객관성을 가지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들이고, 언젠가는 만났을 사람, 언젠가는 작업을 할지도 모르는 잠재적 관계, 혹은 너무나도 긴밀하게 작업으로 얽혀있었던 사이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결국 지역 문화예술 커뮤니티 사이에서 빤히 드러난 문제점을 묻어두기 매우 쉬운 구조로 만든다. 그렇기에 모종의 불의가 발생할 경우 이를 집단 눈 돌림으로 감추는 일도 서슴없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비평 문화를 한 지역 안에 정착시킨다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04

 그렇다면 어쩌면 점점 쇠퇴해가고 있는, 내가 사랑하는 예술을 지키기 위해서 ‘나’라는 개인은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또 내가 사랑하는 이 지역에서 예술다운 예술을 마음껏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가는 인생의 무수한 이야기들처럼, 지금껏 존재해 온 많은 예술작품들이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완성되어왔다.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로 단절된 이 사회 안에서 예술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집단 속에서의 인간적인 교류뿐 아니라 문제점을 과감하게 비평하고, 그래서 나온 부족한 부분들을 찾아 보완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함께 창작해나갈 수 있는 길을 지역 내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당신이 서있는 공간의 장단점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지금 어떤 공간에 서있고, 이 공간을 어떤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싶은지가 중요할 뿐이며, 당신이 서있는 땅이 어떤 시간 속에서 존재해 왔는지를 직시하며, 그 아래 묻힌 시간이 만들어낸 보물들을 찾아내라. 비평은 곧 다시 창작행위의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회귀는 순수하게 당신이 하고 싶었던 창작행위가 당신이 서 있는 도시에서 마음껏 펼쳐질 수 있도록 연구하고 말할 수 있는 인문학적 토대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술가와 예술가를 연결하고, 예술가와 대중들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곧 비평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비평 문화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지역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점점 쇠퇴해가는 지역사회의 무기력을 비롯 무수한 지역 내 문제들과 싸워야 됨을 의미한다. 이 글을 쓰면서 어쩌면 나조차도 앞서 언급한 문제점들의 반복으로 습관화된 타성에 젖어 나태한 창작행위를 지속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오긴 힘든 시기이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만들어지지 않고 이야기되지 않는 무수한 소재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때로는 이 이야기가 특정한 지역 특정한 공간에서만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들은 그 지역의 사람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야지 만이 가치가 있을 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지역 고유의 미학과 예술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이 쇠퇴해가는 지역이라는 황무지는 놀라운 양분으로 가득한 새 땅이 될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들을 내포하고 있다. 지역 내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비평 문화가 썩은 땅을 갈아엎는 쟁기가 되어, 아직은 성장 가능성만을 가진 지역문화라는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으면 한다.  


 최근 지역의 다양한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평적 교류의 필요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봄>으로 연락을 받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덕분에 이 두서없는 글이 나올 수 있었고, 덕분에 내 머릿속에서만 떠다니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던 유익한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오늘도 많은 고민, 사명감, 부담감으로 고생했을 <봄> 편집진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끝으로 이 글을 읽는 예술가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싶다.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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