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나의 내면에서 완성된다

자극의 아픔은 내 마음이 결정한다

by 장승희


[Prologue: 어느 늦은 오후의 대화(실제 기반)]


[인사과장]

오늘 노동부 진정이 두 건이나 더 들어와서 진이 다 빠지네요.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무리한 주장들인데, 노동부는 일단 다 접수하니까요. 이를 반박하려면 공문 만드는 데만 한참을 매달려야 합니다. 정당하게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의 맹점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태도를 볼 때면 회의감이 듭니다. 근무 태만으로 적발된 직원이 오히려 신고하겠다며 큰소리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나]

법치주의가 강화되면서, 역설적으로 개인의 윤리의식은 옅어진 것 같습니다. 도덕과 신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법과 보상이 대체하면서, 자본주의의 삭막한 단면이 드러나는 것이겠죠.


[인사과장]

어떻게 자기 역량을 키울지 고민하기보다, 분쟁을 만들어 보상금을 타내는 데만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기분입니다.


결핍이 선 함이 된 세상에서

채팅방의 알림이 멈추고 적막이 흐른다. 인사과장의 깊은 한숨이 텍스트 너머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 마음이 영 개운치 않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 같다는 그 무력감. 나 역시 그 기분을 알기에 섣불리 위로조차 건넬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책임 없는 자들이 펜대를 굴릴 때

문득 이 모든 부조리가 단순히 몇몇 악성 민원인의 일탈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더 깊은 곳, 우리 사회가 '정의'를 규정하는 방식 그 자체에 있다.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권한과 책임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권한을 가진 자가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책임을 지는 자에게 마땅한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건 조직 운영의 대원칙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기업의 생존과 성과에 대한 무한 책임은 오롯이 경영자가 짊어지는데, 인사와 경영에 개입할 권한은 책임질 일 없는 법원과 정치권이 휘두르고 있다. 또한 정치와 법은 '약자 보호'라는 미명 아래, 근로자의 편으로 과도하게 기울여진 측면도 있다.


책임을 지지 않는 자가 권한을 행사할 때,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붕괴한다. 법원이 경영의 영역에 들어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이, 시장의 자율성은 질식하고 조직은 관료주의의 늪으로 빠져든다. 인사과장이 겪는 저 고초도 결국, 책임과 권한의 균형추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파생된 비극이 아닐까.


결핍의 뇌과학, 그리고 르상티망

대화 도중, 인사과장은 악성 민원인들을 '시간 빌게이츠'라 부르며 날 선 비난을 쏟아냈다. 평소 그런 거친 언어를 쓰실 분이 아닌데, 오죽 답답했으면 그러셨을까 싶어 씁쓸함이 밀려왔다. 우리는 흔히 약자를 곧 선(善)으로 여기고, 그들을 돕는 것이야말로 정의라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센딜 멀레이너선과 엘다 샤퍼는 저서 《결핍의 경제학》에서 '터널링(Tunneling)' 현상을 경고했다. 돈이든 시간이든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인간의 뇌는 당장의 결핍을 해결하는 데 모든 인지적 자원을 쏟아붓는다. 그 결과 시야가 터널처럼 좁아지고, 장기적인 안목이나 도덕, 타인에 대한 배려를 고민할 '마음의 대역폭'이 쪼그라든다. 이 책은 여러 실험을 통해 결핍된 사람의 뇌가 얼마나 충동적이고, 판단력이 흐려지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문득, 이 이론의 칼날이 비단 그들만을 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엄밀히 말해 인사과장 역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인지적 자원이 고갈된 '터널링' 상태가 아닐까. 평소답지 않은 거친 언사와 감정적인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그 또한 여유를 잃어버린 '결핍'의 희생자라는 방증(傍證)인 셈이다.


물론 우리는 사회 구조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그 '결핍'이 만들어낸 편협함과 비윤리성까지 무조건적으로 옹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정의의 방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를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라 불렀다. 겉으로는 공정과 평등을 외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누구보다 타인을 지배하고 착취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가진 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끌어내림으로써 비틀린 쾌감을 느낀다.


신이 죽은 자리에 들어선 소송장

"신이 사라진 자리를 법과 돈이 채웠다." 채팅 중 내가 한 말이지만, 참 뼈아픈 말이다. 예전엔 "사람이 그러면 못써"라는 어른들의 말 한마디면 부끄러움을 알았는데, 이젠 "법대로 해"가 인사가 되었다.


고속버스나 KTX에서 좌석을 끝까지 뒤로 젖힌 앞 사람에게 조금만 세워달라고 부탁하면, '원래 젖혀지게 만든 걸 쓰는 게 무슨 문제냐'며 오히려 역정을 내곤 한다. 법적으로 문제없음을 면죄부 삼아 타인의 불편을 외면하는 이런 태도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어야 하는데, 어느새 도덕의 전부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법이 도덕의 자리를 찬탈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성찰하기보다 법 뒤에 숨어 자신의 결핍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법망만 피하면, 혹은 법을 이용해 이득을 취할 수만 있다면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서로가 서로를 잠재적 피의자로 보고, 대화보다는 고소장을 먼저 날리는 사회. 그곳에서 인간애를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결핍은 내면의 마음에서 완성된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100만 원을 벌어 뛸 듯이 기뻐하다가도, 친구가 200만 원 벌었다는 소리에 순식간에 불행해지는 게 우리네 자화상 아닌가. 내 손에 쥐어진 100만 원이라는 '외부요인'은 변함이 없는데, 타인과의 비교가 시작되는 순간 내 풍요는 빈곤으로 돌변한다.


우리는 지금 너무 지독한 경쟁 관계에 내몰려 있다. '절대적 결핍'이 아니라, 남보다 덜 가졌다는 '상대적 결핍'이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다. 결핍에 쫓기는 자들은 도덕을 지킬 인내심을 잃어버리고, 정치권과 법원은 그들의 비명소리에 기계적인 판결문만 찍어내며 그들의 자의식만 비대하게 키워주고 있다.


정치권과 사법부가 그들의 불평을 들어준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판결문은 갈등을 봉합할 뿐, 결핍의 본질을 치유하지 못한다. 진짜 필요한 것은 소송장이 아니라, 이 미친듯한 경쟁의 속도를 늦추자는 사회적 합의다.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남을 이겨야만 내가 사는 구조를 완화하려는 치열한 논의가 필요하다.


왜 우리는 이토록 서로를 할퀴며 치열하게만 살아야 하는 걸까. 문득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남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기보다,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하고 긍정할 수 있는 주인이 되기를. 그런 사람들로 넘쳐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지 깊이 고민하게 되는 밤이다.


물론, 아까 마신 막걸리 때문에 괜히 감상적이 된 건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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