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부탁한다고?

예능 전쟁터 25년 참전기 15

by 박지아피디

● 냉장고를 부탁한다고?

내가 국내 최초로

냉장고를 열었다.


요즘 나의 최애 프로그램은 <맛있는 녀석들>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칭하는 소위 삼위일체가 완벽히 갖춰진 정말 아름다운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최고의 아이템인 음식이라는 [소재], 둘째는 음식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는(?) 완벽한 [출연진], 셋째는 업계 최고의 음식을 가장 맛있는 방식으로 인간 본능 최저층까지 내려가 바닥이 보일 때까지(?) 충실하게 먹어내는 속이 꽉 찬(?) [내용]. 나는 방송이 끝날 때마다 기립박수를 친다.


내가 욕심이 많고 호기심이 많은 건 장점이다 그리고 지겨운 걸 잘 못 참는 건 단점이다. 장점과 단점이 교묘히 혼합되어 나는 새로운 것을 기획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서바이벌 독서 퀴즈왕> 얘기가 나온 김에 비록 짧게 했지만 KBS 시절에 기획했던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당시는 먹방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셰프 중심의 프로그램은 당연히 없었다. 토크쇼를 몇 년 동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데이터가 쌓이게 되었다. 어떤 내용을 보여주면 시청률이 상승하는지 게스트들의 어떤 내용을 보여줘야 관심을 갖는지?

결론은 스타들의 부엌에 들어가서 무엇을 해 먹는지 냉장고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는지를 시청자들은 가장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냉장고 문을 열면 시청률이 올라간다>는 불문율이 생겼을까? 이때 알아낸 정보로 나는 <냉장고를 열어라>라는 프로그램을 연출하게 되었다.


기획 초안은 KBS에서 만들었다. 그러나 연예인들은 웬만해선 자기 집을 공개하기를 꺼려했고 더군다나 냉장고를 오픈시키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당시 KBS 공식 섭외 사냥꾼은 나였기에 또 불려 들어가 제작을 의뢰받았다.

스타의 집에 MC랑 요리사가 무작정 쳐들어가 그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들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토크를 하는 내용이었다. 시간대 대비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오래 하지는 못했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JTBC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방송을 보았다. 그걸 보면서 머리가 띵했다. 또다시 못난 꼰대 라떼 의식이 발동되었다. 쳇! 저거 내가 벌써 10년 전에 했던 내용이네.


그건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지. 누가 스타들의 냉장고를 아예 통째로 뜯어다 스튜디오에 갖다 놓을 생각을 했겠나? 그것 자체가 엄청난 예능이다. 게다가 최고의 셰프들이 15분이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냉장고 안 재료를 5성급 호텔 요리로 만드는 과정 하며 두 팀으로 나누어 경쟁까지 시키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구성이었다. 매회 빠져서 봤다. 내 질투심을 유발하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그 이후로는 정준하의 <식신로드>가 먹방을 평정했다. 식신로드가 끝나고는 백종원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나와 요리 예능을 아직까지 평정하고 있다. 그분의 장점은 요리를 잘하는 것뿐 아니라 그분 자체가 대식가라는 것이다. 2015년 즈음해서는 요리 예능과 더불어 먹방이라는 개념의 프로그램이 많이 나왔다. 먹방의 인기는 유튜브의 바다에서 더욱 폭발했다.


이 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머리를 다시 비우기 위해서다. 글을 쓰면서 옛날 얘기를 많이 하다 보니 두 가지 생각이 든다. 나는 열심히도 살았구나. 그리고 25년이 지난 이 즈음 꼰대 라떼가 아니라 아이스 바닐라 라떼가 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되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심했다.


머리는 비우되 배는 채우자. 일단은 <맛있는 녀석들>에 나오는 음식들을 찾아 먹으러 다닐 것이다. 그러다 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 날 것이다. 그 옛날 외할머니의 음식을 먹으며 자란 나는 종합비타민처럼 정서가 풍부하다. 맛있는 음식은 사람의 배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살찌워주니까. 영혼만 살찌워주면 좋겠다. 다른 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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