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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13. 2019

빨래를 개는 마음

결국 사는 건 빨래 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집에서 ‘빨래 요정’을 담당하는 난 요즘 제일 바쁘다.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 그만큼 샤워도 자주 하고, 당연히 빨래 거리도 늘어난다. 여름철에는 일주일에 2~3번은 세탁기를 돌린다. 여름을 제외하면 보통 일주일에 1번 정도 세탁기를 돌린다. 대외적으로는 물도 아끼고 전기도 아끼는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를 댄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귀차니즘‘이라는 검은 마음이 숨겨져 있다.


이맘때는 빨래 요정들이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시기다. 쌓이는 빨래 양에 비해 마르는 속도가 더뎠던 지옥 같은 장마철에 비하면 천국이다. 여전히 습도가 높긴 하지만, 그래도 뜨거운 햇빛 때문에 반나절이면 웬만한 빨래들이 뽀송뽀송하게 마른다.


은은한 세제 향이 밴 까슬까슬하게 마른 수건을 탁탁 털어 접어 욕실 수납장에 넣는다. 그때 빨래 요정은 겨울잠 자기 전, 먹을 식량을 부지런히 모아둔 다람쥐 마음이 된다.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꽉 찬 수납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편안하고 뿌듯해지는 건 ‘빨래 요정’들의 힐링 포인트다.


①좋아하는 수건 개기로 워밍업을 하고 나면, ②큼지막한 옷들을 갠다. ③그리곤 남은 작은 빨래(손수건, 속옷, 양말 등)를 갠다. 이것이 내가 빨래를 개는 루틴이다. 사실, 빨래가 그저 해야 하는 지겨운 가사노동 중 하나로만 여기던 시절에는 몰랐다. 손에 잡히는 대로 갰고, 이 지루한 잡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다. 무슨 일이든 경험이 쌓이면 깨달음과 스킬이 생긴다.


언젠가 빨래를 개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난 왜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걸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어린 시절의 나는 과자 종합 선물세트를 선물 받으면 내 취향이 아닌 과자부터 꾸역꾸역 먹었다. 나중에야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먹었다. 어른이 되고도 냉면 먹을 때, 달걀을 맨 마지막에 먹는 게 당연했다.


좋아하는 건 더 좋은 때를 위해 나중으로 아껴두는 게 좋다는 부모님의 가르침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절제와 인내가 미덕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절제와 인내는 인간에게 분명 필요한 마음가짐이지만, 일상에서 그런 사소한 일로도 나를 옥죄일 필요는 없었다.


냉면 먹을 때, 달걀을 먼저 먹어야 위벽이 보호된다고 했다. 내 취향이 아닌 것들로 배를 채우면,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진 진정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뭐든 부족했던 시대를 살았던 저장 강박 부모 세대의 가르침은 더 이상 요즘 세대들에게 먹히지 않는 빛바랜 유물이 된 것이다.


더 좋은 때를 위해 순간의 즐거움과 크고 작은 행복을 미뤘다. 대신 사소한 고민들을 껴안고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진을 빼고 나면 정작 해결해야 할 큰 문제 앞에서 제대로 힘도 못쓰고 넉 다운되기를 여러 번. 빨래를 개던 나의 루틴을 생각했다.


규격이 정해져 손쉽게 갤 수 있는 수건으로 워밍업을 하고 나면 개야 할 빨래의 양은 금세 1/3로 줄어든다. 그리고 큼지막한 빨래를 후다닥 개고 나면 이제 자질구레한 작은 빨래만 남는다. 결승점이 보이면 없던 힘도 나게 마련이다. 반면, 작은 양말의 짝을 찾고, 손바닥만 한 속옷을 접느라 애썼는데도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빨래를 보면 기운이 빠지기 쉽다. 저것들을 언제 다 개냐 싶어, 줄지 않는 빨래를 보는 것만으로 지친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그나마 덜 싫어하는 것)으로 먼저 워밍업을 한다. 문제의 성향을 파악하고, 작은 성공의 기쁨을 몸에 채운다. 성취감으로 중무장하고 거대한 문제 앞에 선다. 맨 몸으로 섰을 때 보다 분명 나는 훨씬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다. 큰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양말이나 속옷처럼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는 건 껌이다. 문제를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게 풀린다. 문제를 단순하게 접근하면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빨래 요정은 빨래를 개며 알게 됐다. 결국 사는 건 빨래 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그래서 빨래를 개는 그 단순한 마음과 루틴을 지켜 가면 나의 인생도 분명 뽀송뽀송한 수건 같은 일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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