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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05. 2019

에너지가 바닥을 보이는 그날엔, 돈가스

신용산역 부근 수제 돈가스 전문점 <북천> 방문기

 


내가 그것과 처음 만난 건 열 살 무렵이었다. 지금이야 흔하디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가공식품이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작은 언니가 내 손을 이끌고 간 곳은 시내 번화가의 세련된 분식집이었다. 100원에 10개짜리 떡볶이를 파는 그런 흔한 학교 앞 분식집이 아니었다. 동네에서 좀 논다 하는 소년, 소녀들이 눈빛을 주고받는 그 시절의 힙플레이스였다. 자리에 앉아 언니는 주머니를 털어 ‘돈가스’와 밀크셰이크를 시켰다. 그리고 나에게 포크와 나이프를 쥐어 주며 말했다.


“이거 돈가스라는 거야. 내가 얼마 전에 와서 먹어 봤는데 엄청 맛있었어.

이 칼로 잘라서 포크로 찍어 먹는 거야.

나중에 나처럼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당황하지 말라고 미리 알려주는 거야”


지극히 한식파인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 가공식품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밥과 생선, 채소가 주였고, 어쩌다 먹는 고기는 무조건 굽거나 볶는 줄만 알았다. 기껏해야 몇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탕수육이 우리 가족이 먹는 외식용 고기 요리의 전부였다. 돈가스라는 신개념(?)의 음식 앞에 동생이 본인처럼 당황하지 않고, 세련되게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길 바라는 작은 언니의 당부가 담긴 메뉴였다.


언니가 시킨 대로 바싹 익힌 돈가스를 나이프로 작게 잘라 포크로 찍어 한 입 넣었다. 고소하고 바삭하게 씹히면서도 새콤달콤한 소스가 어우러져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맛의 신세계를 느꼈다. 접시에 코를 박고 한참을 먹다가 쎄한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작은 언니가 대견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이후 난 수없이 많은 돈가스를 먹었다. 친구가 싸온 도시락 반찬으로, 첫 데이트의 메뉴로, 값싸고 든든한 술안주로, 사회인이 된 후 짧은 점심시간에 메뉴 고민하기 싫어 남들이 가자는 데로 우르르 몰려가 먹던 음식으로... 내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언니의 바람대로 돈가스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나이프로 능숙하게 잘라먹는 세련된(?) 동생이 된 것이다.


그렇고 그런 돈가스들에 질려 갈 때쯤, 용산 작은 골목에서 좀 색다른 돈가스를 만났다. 소위 서울 3대 돈가스라 수식어가 붙은 <북천>은 돈가스 마니아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이름난 곳이다. 용산에 갔으니 뭘 먹을까 고민을 하다, 번뜩 <북천>의 존재가 떠올랐다. 용산 우체국 뒤편, 작은 골목 사이에 위치한 북천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5시 10분. 조금 전 5시에 저녁 영업을 시작했을 텐데 이미 가게 안은 손님들로 꽉 차있었다. 마지막 우리 일행은 하나 남아 있는 입구 쪽 테이블을 차지한 덕분에 기다림 없이 주문할 수 있었다.


<북천>의 대표 메뉴는 특제 브라운소스를 얹은 [브라운 돈가스]와 크림소스를 얹은 [화이트 돈가스]!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고민하듯 둘 중 어떤 걸 먹을까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은 “처음은 베이식한 거지!”라며 브라운 돈가스를 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방한 자태의 돈가스가 내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돈가스 앞에서 난 잠시 당황했다.  



튀김류의 생명은 바삭함이라 생각하는 나는 평소 찍먹파다. 그런데 찍먹파의 눈에 동공 지진이 날만큼 소스가 흥건하게 돈가스를 적시고 있었다. “아... 이런! 소스 따로 달라고 할 걸...”이라는 뒤늦은 후회 끝에 “그래! 처음 방문했다면 이곳의 룰을 따르는 게 순리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돈가스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 시절, 작은 언니가 처음 가르쳐 준대로 포크와 나이프로 돈가스를 조심조심 자르기 시작한다. 힘을 주어 제법 깊숙이 칼을 집어넣었는데도 칼끝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잉? 뭐지?? 돈가스와 씨름을 하듯 겨우 다 자르고 단면을 살피니 튀김옷을 포함해 검지 두 마디 정도의 두께가 보인다. 이 정도의 볼륨감을 가진 돈가스를 만난 건 실로 오랜만이다. 한 입 크기로 자른 돈가스에 소스를 더 듬뿍 묻혀 한 입에 넣었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진한 후추 향. 고기에 밑간을 할 때, 꽤 많은 후추가 들어갔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치아로 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보통의 돼지고기라 그런지 오버 쿡하는 곳들이 종종 있는데 이곳은 달랐다. 씹자마자 고기 안에서 머금고 있던 육즙이 톡 하고 터졌다. 신선한 돼지고기가 가지고 있는 청량함과 탄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거기에 바삭한 튀김옷이 함께 씹히며 고소함을 더했다.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피날레를 장식하는 불꽃놀이처럼 특제 브라운소스의 맛이 입안에서 팍 하고 퍼진다.  


기존의 일식 돈가스 소스에 비하면 우스터소스 맛과 신맛이 빠져 있고, 버터의 진한 풍미와 부드러운 맛이 강한 편이다. 돈가스 자체는 두툼한 일식 돈가스를 닮아 있지만, 소스는 오히려 한국 경양식 돈가스에 가깝다. 시판 재료만 넣고 우르르 끓여낸 얕은 맛이 아니라 다양한 재료를 뭉근하게 오랜 시간을 들여 끓여낸 정성 가득한 깊은 맛이 소스에서 느껴졌다. 돈가스 소스의 정석이라 할 순 없겠지만 그 소스는 분명 개성과 매력이 있는 돈가스를 만들어 주는 일등공신이었다.


두툼한 돈가스를 접시 바닥에 묻은 소스까지 삭삭 긁어먹고 나니 배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곁들여 나온 우동, 밥, 샐러드는 손도 대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배가 미친 듯이 고프지 않거나, 양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욕심부려서 우동이 추가된 세트를 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배가 부를 것이다. 우동은 시판 장국에 뜨거운 물을 붓고 탄력 없는 우동면을 넣은 ‘나 우동입니다’라고 체면치레할 정도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날씨, 상황, 컨디션, 분위기에 따라 당기는 음식이 따로 있다. <북천>의 브라운 돈가스는 기운은 없는데, 일은 꼬이고, 시간도 없는 날이면 떠오를 맛이다. 그 육덕 지고 고소한 맛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잠시나마 기분을 정상 수치로 끌어올려주는 충분한 힘을 가진 음식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바닥을 보이는 그날, 나는 다시 용산의 작은 골목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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