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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28. 2020

사라진 콘택트렌즈를 찾아서

실체 없는 공포 앞에 섣불리 쫄지 말 것



월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난 안과 병원에 앉아 있었다.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기를 한참.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진료실에 들어선 나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중년의 의사 선생님께 말했다.


분명 콘택트렌즈가 있었는데...
사라졌어요


악몽 같은 그 사건은 토요일 오후에 시작됐다. 잠시 외출을 위해 집을 나선 차였다. 이제 막 지하철을 타려는 찰나, 왼쪽 눈이 간지러워 슬쩍 눈꺼풀을 문질렀다. 그 순간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뭔가 이상했다. 하루 아침에 시력을 잃는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잠시 생각했다.


혹시나 하고 조심스럽게 왼쪽 눈을 감아 오른쪽 눈의 상태를 살폈다. 선명했다. 오른쪽 눈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이건 왼쪽 눈의 렌즈가 사라졌다는 신호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안경을 벗고 콘택트렌즈를 끼기 시작한 지 NN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지하철이 정차해 문이 열리기 전, 그 짧은 순간! 앉았던 자리부터 옷의 이곳저곳, 신발 위까지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분명 눈에서 빠져나왔을 렌즈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렌즈가 도망갈 곳은 하나다. 바로 눈꺼풀 안. 찜찜한 마음을 안고 재빨리 지하철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흐릿한 왼쪽 눈을 감고 선명한 오른쪽 눈에 의지해 스마트 폰으로 검색을 했다.


#눈 뒤로 넘어간 렌즈 #소프트 렌즈 눈 뒤로 돌아갔을 때 대처법 등등 관련 기사들을 찾아봤다. 뒤로 넘어간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위아래 눈꺼풀 아래에 껴 있는 상태일 거라고 기사 속 안과 전문의는 말했다. 눈꼬리 쪽 눈꺼풀을 살짝 비벼 렌즈를 이동시켜 빼내는 방법도 있고, 인공 눈물을 넣거나 진짜 눈물을 흘려 자연스럽게 빠지기도 한다고 했다. 이동하는 내내, 지하철 안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거울을 보고 눈꺼풀 안쪽에 박혔을 렌즈를 빼내려 시도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노력했지만 결국 렌즈를 찾진 못했다.


그렇게 짝눈인 채로 반나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가서 한참 눈꺼풀을 뒤집고 씨름을 했는데도 렌즈 끄트머리조차 보지 못했다. 잠을 자다가 잠결에 스르륵 빠진다는 경험자들의 후기가 생각났다. 나도 그 우연의 힘에 기대 보기로 하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물감은 여전한 왼쪽 눈을 감고 도닥이며 빌었다.


제발 내일 아침 일어나면
거짓말처럼 눈 안의 렌즈가 빠지게 해 주세요!
몸이 유일한 재산인 사람입니다.
부디 눈 건강만큼은 빼앗아가지 말아 주세요!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눈과 베개 주위와 살폈지만 렌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왼쪽 눈에는 뭔가 들어간 듯 불편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방법은 없다. 병원에 가야 한다. 초조하게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안과로 향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께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니 대수롭지 않은 듯 내 눈꺼풀을 뒤집어 살폈다.


"걱정과 달리 렌즈는 눈꺼풀 안쪽에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의사 선생님의 건조한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도하는 마음 한 편에서 의심이 피어올랐다.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난 이틀간 나를 괴롭힌
왼쪽 눈에 있던 이물감의 정체는 뭐지?


의사 선생님 말로는 기분 탓일 거라고 했다. 안과 전문의가 확인 사살을 해주기 전까지, 접힌 렌즈가 내 눈 안에 당연히 있다고 철썩 같이 믿었다. 그 렌즈가 빠지지 않고 각막에 상처를 내거나 더 나아가 시력 악화에 영향을 줘 결국 눈이 멀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난 이틀간 나는 실체도 없는 상상 속 렌즈 때문에 시각을 잃는 아찔한 상상을 하며 지옥 같은 주말을 보냈다.




생각해 보면 나를 불안에 떨게 한 건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다. 단지 렌즈가 사라진 단순한 사건일 뿐인데, 어설프게 주워 모은 남들의 경험과 상상을 덧입혀 거대한 공포를 만들어 냈다. 직접 확인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혼자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쫄아 붙었다. 내 특기가 또 발동된 것이다.


내 인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쫄아들 예정이거나 쫄고 있는 중이거나. 분명 둘 중 하나다. 완벽한 쫄보의 인생이다. 마감 기한에 쫄리고, 권력자 앞에 쫄고, 새로운 도전 앞에 쫄아 붙는다. 어김없이 날아온 카드값 명세서 숫자에 쫄리고, 날 선 평가에 쫄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쫄아 붙는다.


적지 않은 해를 살아 보니 이번 ‘렌즈 사건‘처럼 잔뜩 쫄아 붙었지만 막상 직접 확인하거나 경험해 보면 별 거 아닌 게 대부분이었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어김없이 쫄보 스위치가 올라가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좋은 타이밍은 빛의 속도로 사라져 갔다. 좋은 인연, 더 안정적인 조건의 일자리, 보다 만족스러운 기회 등등 그렇게 떠나보낸 게 한 두 개가 아니다. 일찌감치 떠나간 타이밍의 뒤통수를 보며 허망하게 서있는 있는 일은 이제 안 하기로 했다. 쫄보 모드가 발동한다 싶으면 ’ 렌즈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더 이상 실체 없는 공포가 내 손발을 묶도록 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쫄보의 삶에 대해 충분히 경험했으니 이제는 대범하고, 과감한 삶의 맛도 봐야 내 인생이 공평하지 않을까?







+ 맞춤법상으로는 분명 쫄다(X), 졸다(O)가 맞지만 글맛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두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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