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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28. 2021

라면의 쓸모

가성비 만점의 길티 플레저


건강 문제로 한동안 밀가루 음식을 끊은 적이 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창창한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없었다. 한시적 밀가루와의 이별, 그게 유일한 살길이었다. 빵, 과자, 국수, 피자, 햄버거, 튀김, 어묵, 치킨 등등 밀가루가 섞인 사랑스러운 모든 것들과 헤어졌다. 최악의 상황에 몰린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살 구석을 찾는다. 밀가루면 대신 팽이버섯이나 두부면으로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과자 대신 황태포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바삭한 식감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곤약면으로 비빔국수를 만들고, 곤약떡으로 떡볶이를 해 먹었다. 치킨은 튀김옷 없이 오븐에 구운 치킨을 택했다. 밀가루 대체 음식을 찾아내는 요령과 함께 체중도 차곡차곡 늘었다. 극한 상황에 몰린 인간의 꼼수력이 폭발한 덕분이다.     


내 식단에서 밀가루를 지우며 대부분 대체재를 찾았지만, 대체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라면. 특유의 쫄깃한 면과 감칠맛이 폭발하는 국물을 대신할 식재료는 없었다. 삼시 세끼 라면만 먹으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먹성이 폭발하던 시절, 혈육들과 젓가락 싸움을 하며 약육강식의 생존법을 깨닫게 해준 퉁퉁 불은 라면. 매주 토요일, 친구 집에 몰려가 냄비 가득 끓여 먹기를 반복하다 결국 교복 단추를 터지게 했던 살크업(살+벌크업) 라면. 입술이 보라색으로 변할 만큼 신나게 물놀이를 한 후 허겁지겁 먹던 컵라면. MT나 여행 때, 전날 먹고 남은 재료를 다 넣지만 물 조절을 잘못해 싱겁기만 했던 한강 라면. 장기간 해외에서 머물 때 향수병 치료제가 된 매운 라면 등등 웃고, 울고, 괴롭고, 힘들었던 내 인생의 날들에는 언제나 라면이 있었다.      


처음부터 끝이 있는 시한부 이별이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라면이 당길 때마다 마감 날짜를 세며 메모장에 먹고 싶은 라면 이름, 해 보고 싶은 라면 조리법을 적어뒀다. 짜장라면에는 갓김치, 흰 국물 라면에는 깍두기, 비빔라면에는 열무김치 등등 함께 곁들일 최고의 시너지를 낼 짝꿍까지 조합하는 전에는 없던 치밀한 계획까지 세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극한의 상황’은 사람을 이렇게 치밀하고 쪼잔하고 궁상맞게 만든다.     


드디어 밀가루와 재회하게 된 날, 내가 택한 첫 번째 밀가루 음식은 역시나 라면이었다. 라면이 완성되는 채 5분도 안 될 그 시간이 천년처럼 지루하게 느껴졌다. 주방 가득 라면 냄새가 퍼지고, 심장은 EDM 비트로 뛰기 시작했다. 최상의 맛을 위해 봉지 뒷면의 라면 조리법을 한 자 한 자 세심하게 읽었다. 평생 라면을 연구해 온 전문가들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그간 라면 끓이는 감을 잃었을 테니 타이머까지 맞춰가며 심혈을 기울였다. 드디어 라면은 완성됐고, 그토록 기다리던 라면과 다시 만났다. 하얗게 올라오는 김을 헤치고,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 올렸다. 입으로 후 불어 한 김 식힌 후 후루룩 면을 빨아들였다. 입안 가득 라면의 파도가 몰아쳤다. 치아로는 쫄깃한 면발의 탄력이 느껴졌고, 혀로는 짜릿한 조미료 맛이 퍼졌다. 아. 이거지. 그래. 이거였어.     


딱 그 느낌이었다. 온종일 무더위에 시달리며 땀을 쏟다가 탈진 직전, 들이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 혈관을 타고 흐르는 카페인이 생생하게 느껴지듯 라면이 온몸으로 내뿜는 맛이 몸 곳곳에 퍼졌다. 희열은 딱 거기까지였다. 짜고 맵고 자극적인 속세의 맛과 멀리한 탓일까? 몇 젓가락 먹지 않았는데도 금세 물렸다. 기름이 둥둥 뜬 느끼한 국물에 담긴 라면 면발은 예전만큼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일반 식단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밀가루를 멀리한 탓인지 전보다 확실히 밀가루 음식을 먹는 횟수가 줄었다. 라면에 손이 가는 일도 적었다. 다들 그런 것처럼 나이를 먹으며 소화력이 떨어진 탓이다. 예전에 어른들이 오래 살기 위해 건강한 음식을 먹는 줄 알았다. 근데 나도 어른의 나이가 되고 보니 알게 됐다. 그저 몸이 허락하는 음식이 소위 말하는 건강한 음식일 뿐인 거였다.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가는 장기는 예전처럼 아무 음식이나 통과시켜 주지 않는다.      


밀가루로 만든 면을 튀겨 인공조미료 국물에 말아먹는 라면은 그야말로 자극적인 음식의 결정체다.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종종 라면이 당기는 날이 있다. 비 오는 날이나, 일상을 떠나 멀리 여행을 가거나, 서서히 술이 깨 배가 고플 때다. 특히 한밤에 먹는 라면은 꽃등심보다 맛있다. 평소에는 되도록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지만, 라면이 당길 때만큼은 이성의 끈을 과감히 놓는다. 라면은 내게 일종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즐기는 행동 또는 떳떳하지 못한 쾌락)’다. 한 그릇의 라면 안에는 ‘반항의 달콤함’이 가득하다. 먹고 나면 몸에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괜한 죄책감이 들지만, 가성비 만점의 보상처럼 느껴진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아는 맛이라서일까?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끊을 수 없는 막장 드라마처럼, 한 번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하면 라면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라면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라면을 끓일 때 느껴지는 감각들이 눈, 코, 입, 귀, 살갗에서 재생된다.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 면이 입수할 때 튀는 뜨거운 물방울의 온도, 분말 수프가 물에 퍼질 때 만들어 내는 색감, 면을 풀어헤칠 때 젓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탄력, 라면이 익어 갈 때 공기 중에 퍼지는 짭조름한 냄새 등등 머릿속에서는 이미 라면 한 그릇이 뚝딱 완성된다. 짜고 열량 높고 식품첨가물이 많이 들어간, 건강에 해로운 음식이라는 오명에 대해서는 잠시 눈을 감고, 일단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린다.  

    

물이 끓을 때까지 ‘내가 지금 라면을 먹어야만 하는 합리적 이유’를 끌어모은다. 평소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위해 착실히 이것저것 잘 챙겨 왔으니 이렇게 어쩌다 한 번쯤, 당길 때 라면을 허락한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니 이렇게 가끔 그 욕망을 풀어 줘야 엉뚱한 곳에서 폭주하지 않는다. 이미 난 라면을 먹겠단 생각에 몸과 마음이 지배당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다. 수프도 반만 넣고, 국물도 거의 안 먹으니까 보통 라면보다는 그나마 덜 나쁠 거다. 라면 하나를 끓이면서도 갖가지 이유를 끄집어내는 나도 참 피곤한 인간이다. 하지만 이유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희한하게 라면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마치 부모들이 반대할수록 애정이 더 깊어졌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반대가 거셀수록 라면을 향한 애정은 짙어진다.     


라면 하나로 몸과 마음을 단단히 옥죄던 빗장이 스르륵 풀어진다. 늘 나를 조였던 ‘해로운 음식 = 라면’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난 자유의 해방감을 온몸으로 만끽한다. 천 원짜리 지폐 1장 내외로 얻을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이다. 어쩌다 가끔 만나는 ‘라면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라면이 없는 대부분의 날들을 건강하고, 성실하게 채워야 한다. 라면이 행복을 준다고 해서 매일 라면을 먹는다면 라면은 행복이 되지 않는다. 식상하고 지겨운 피로감 가득한 음식일 뿐이다. 매번 라면을 꾹 참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더 맛있게 라면을 먹기 위해 난 오늘도 건강한 음식들을 챙겨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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