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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31. 2023

치과에서 열린 워터밤 파티

프로예민러가 사는 법

여름이 가기 전에 치르는 의식 중 하나가 ’ 치아 스케일링‘이다. 이걸 핑계 삼아 치과에 가고 정기 점검을 한다. 두려움과 귀찮음에 미루고 미루다 큰돈이 깨지고 통증이 덮치기 전에 미리 관리하라는 주변인들의 눈물 어린 조언 덕분이었다. 지난번 치과에 갔을 때 어금니에 충치가 보이기 시작했으니 조만간 레진을 씌우는 치료를 시작해야 할 거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에는 막상 하려니 두렵기도 해서 다음번에 하겠다고 미뤘다. 아니나 다를까 치아 상태를 점검하던 의사는 치료의 적기가 왔다며 오늘은 스케일링만 받고, 다음 진료 예약을 하고 가라고 도장을 쾅 찍었다. 스케일링을 마치고, 수납하려고 하니 데스크 직원은 친절하게 예약 날짜를 언제로 하면 좋을지 물었다. 얼떨결에 일주일 후로 잡았다. 미룰 수 있다면 최대한 미루고 싶은 내 상태를 간파한 직원은 재빨리 말했다.     


예약 변경은 하루 전이라도 미리 전화만 주시면 됩니다.       


심약한 손님을 대하는 노련한 직원의 노하우일까?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오기가 났다. 어차피 할 거 빨리 해치워 버리자는 마음에 보란 듯이(?) 예약한 날짜에 오기로 마음먹었다. 본격적인 치과 치료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4N 년 평생 해본 일이 없었다. 정기적인 검진과 스케일링 혹은 잇몸이 부어 치과에 간 걸 제외하면 치아 치료가 자체가 처음이었다. 치과에 들어서면 머리카락이 쭈뼛 서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기계 소리와 고통에 신음하는 다 큰 어른들의 녹다운된 표정을 볼 때마다 왜 사람들이 치과를 두려워하는지 알 거 같았다. 그리고 내가 치과 치료를 한 번도 안 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때마다 복 받았다, 부모님께 감사해라 등등 칭찬 세례가 쏟아졌다. 그 말을 들으며 사람들이 얼마나 치과 치료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피폐하게 만드는지 짐작할 뿐이었다.      


일주일 후 휘모리장단으로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치과 의자에 앉아 의사를 기다렸다. 옆 칸막이 너머에서 하던 치료를 마치자마자 기계처럼 내가 누운 의자 쪽으로 왔다.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의 공산품이 된 기분이었다.       


마취 주사, 따끔합니다.      


이것 또한 처음이었다. 그간 입에 머금고 있으면 마취가 되는 물약(?)으로만 마취했고, 잇몸에 마취 주사를 맞는 것 역시 첫 경험이었다. 오늘 치료 중 이게 제일 아플 거라며 겁을 주는 건지, 안심을 시키려는지 모를 멘트를 이어갔다. 가장 아플 거라는 말에 승모근을 잔뜩 움츠려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 그대로 따끔할 뿐 그 어떤 통증도 없었다. 마취약이 퍼지는지 잇몸 안쪽에서 시작해 입술, 턱 쪽으로 찌르르한 느낌이 늘어나는 것만 느껴졌다. 곧이어 각종 장비가 들어가고 나오면서 치료가 진행됐다. 크고 작은 소음과 의사와 간호사의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얼얼한 입 주변으로 뭐가 오가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뭘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진료실 천장의 무늬와 개수를 세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얼추 진료가 마무리됐는지 의사가 말했다.     


일어나서 물로 입 헹구세요.     


뻐근한 몸을 일으켜 종이컵에 든 물을 들이켜고 입으로 오물거리는데 이상했다. 아랫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분명 입을 오므리고 물을 머금고 있었는데 물총을 쏘듯 물이 찍 새 나왔다. 느닷없이 치과 한복판에서 워터밤 파티가 벌어졌다. 여름마다 난리라는 워터밤 파티가 어떤 곳인지 궁금했는데 내가 워터밤을 열어 버렸다. 못 가면 만들어 버린 스케일. 내가 이렇게 진취적인(?) 사람이었다니 나에게 또 한 번 놀랐다. 민망하고 부끄러워 떨어진 물을 닦으면서 작게 어깨를 들썩이며 히죽히죽 웃었다. 이런 환자를 수없이 많이 봤는지 치과 한복판에서 벌어진 워터밤 파티에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 일에 몰두했다. 의사는 차트를 작성하고, 간호사는 진료 기구를 정리하기 바빴다. 역시 프로들이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분명 감각이 둔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부분에서는 예민하다. 환절기가 되면 콧물이 흐르고, 두드러기가 난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좋지 않은 옷은 두 번 다시 손이 가지 않고, 단골집 음식은 조리법이나 재료의 변화도 알아차린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깊은 잠도 자기 어렵다. 소음이나 조명 등 작은 변화에도 눈이 번쩍 떠진다. 큰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기가 빨린다. 차갑게 식어가는 눈빛의 온도를 느끼고, 성의 없는 말투 속에서 상대의 관심도가 떨어졌음을 파악한다. 늘 감각이 활성화되어 있으니 언제나 두통을 달고 산다. 스스로 예민을 떤다 느낄 때는 마취되듯 감각이 둔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마취를 해 보니 감각이 둔해진다는 건 동시에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뜻이란 걸 몸으로 깨달았다. 아픔을 느낄 수 없다는 건 분명 마취의 장점이지만 마취하는 순간 내 모든 감각기관은 일시정지 된다. 고통은 두렵지만 내가 나를 컨트롤할 수 없는 건 더 무섭다.      


마취 대신 예민함을 다독이는 쪽을 택했다. ’ 반려 예민‘과 오래 살다 보니 예민 방지법의 달인이 됐다. 불필요한 소음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사용하고, 사람 많은 시끌벅적한 술자리에서 잠시 빠져나와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오면서 흐트러진 정신과 마음을 재정돈한다. 숙면을 도와주는 쾌적한 침구를 챙기고, 계절이 바뀔 때는 알레르기약을 손 닿는 곳곳에 쌓아 둔다. 가시를 바짝 새운 고슴도치 같은 예민한 상태로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다. 그 상태로는 어떤 말이든, 행동이든 분명 상대를 찔러 아프게 할 테니까. 좋은 관계를 위해 나를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드는 것, 그게 내가 예민으로부터 모두를 지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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