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오겹살의 숨은 강자 서귀포 남원 <도우미 식당> 방문기
여행에서 갈 곳을 고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인스타 핫플이니, 인생샷 맛집이니, 안 먹고 오면 평생 후회할 필먹 음식점 같은 이름난 곳은 피하는 편이다. 초보 방문자를 위한 친절한 정보도 넘치고, 편의시설도 잘 되어 있지만 어쩐지 ’느끼하고 질리는 맛’이다. 복붙한 것 같은 똑같은 구도의 사진, 기름기 좔좔 흐르는 멘트를 보고 있으면 가기도 전에 다 다녀온 기분이다. 그래서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숨은‘ 또는 ’현지인‘같은 키워드를 넣고 둘러볼 곳을 정한다.
연초 제주 서귀포에서 일주일간 묵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큰 프로젝트를 끝내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 또는 연말이나 연초처럼 마음이 뒤숭숭할 때 도망치듯 육지를 떠나 향하는 곳이 바로 서귀포다. 해외보다는 덜 부담스럽고, 새로움에 적응하느라 쓰는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단골 여행지다. 십수 년째 다니다 보니 웬만한 곳은 대부분 가봤고, 먹을 만한 것은 다 먹어 봐서 뭘 새로운 게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 이때를 놓치면 내년을 기약해야 하니 감귤 따기라도 해볼까 싶어 뒤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감귤 따기는 끝물이었다.
그러다가 육지에서 온 이주민의 블로그에서 최근에 감귤 따기를 했다는 서귀포 농업기술센터를 알게 됐다. 매년 11월이면 감귤 박람회가 열리는 곳이다. 안에 있는 농업 생태원에는 특화 작물인 감귤을 연구하기 위한 귤 밭이 조성되어 있는데, 일정 시기에 감귤 따기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감귤 박람회 기간이 지났지만 상황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문구를 확인하고 서귀포 농업기술센터의 위치를 지도에 찍었다.
보통의 관광객이라면 딱히 갈 일 없어 보이는 내륙 중산간 쪽. 근처에 갈만한 곳이 있나 뒤졌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 눈에 뜨인 게 있었다. 농업기술센터 부지 한 귀퉁이에 자리한 <도우미 식당>. 근처에는 이렇다 할 건물도 없고 오름과 밭뿐이니 직원들이 이용하는 구내식당인가 싶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검색 신공을 발휘하니 몇 가지 키워드가 나왔다. #생오겹살정식, #노포, #현지인맛집... 모두 내 흥미를 저격하는 단어들이었다.
간헐적 단식을 시작한 후 하루에 점심 한 끼 정도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 아침은 건너뛰고, 저녁은 간단하게 허기만 지울 정도로 먹는 중이었다. 소중한 점심 한 끼를 장식하기에 제주 생오겹살 정식은 완벽한 메뉴였다. 다음 날 오전 10시 30분쯤 서귀포농업기술센터로 향했다. 먼저 센터 내의 감귤 박물관을 구경하고, 직원분의 친절한 안내로 감귤을 따고, 녹차밭에서 사진을 찍고, 감귤 품종 전시실을 구경했다. 1시간 정도 둘러보니 <도우미 식당>의 유일한 메뉴, 생오겹살 정식을 맛있게 먹을 만큼 딱 배가 고팠다.
주말 영업은 하지 않고 영업시간은 오직 평일 오전 11시 20분부터 오후 2시. 준비된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는 간결한 운영 방침을 미리 숙지하고 있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우리가 세 번째 손님이었다. 앞에 온 손님들도, 뒤에 오신 분들도 모두 방금 밭이나 농산물 선별장 또는 공사장 등에서 오전 작업을 마치고 온 현지인들이었다. 흙먼지를 털면서 들어오시는 분들 사이 우리는 누가 봐도 어수룩한 관광객이었다. 절반은 못 알아들을 제주 사투리가 오가는 허름한 식당에 육지 것 셋은 어색 어색 열매를 잔뜩 머금은 채 빨리 고기가 나오길 목 빠지라 기다렸다.
김밥헤븐식의 잡다한 메뉴가 있는 곳보다 단일 메뉴를 내거는 식당의 기개를 사랑한다. 메뉴가 생 오겹살 정식 단 하나뿐인 <도우미 식당>은 일단 믿음이 가는 곳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자리에 앉자마자 인원수만 묻는 사장님의 무뚝뚝한 말투에서 뚝심이 느껴졌다. 곧이어 사장님은 테이블에 뻘겋게 달아오른 연탄불을 넣으러 왔고, 주방 쪽에 반찬과 국을 담은 쟁반은 손님이 셀프로 챙겨 와야 한다는 당부를 하고 떠났다. 1인분에 14000원짜리 생오겹살을 팔기 위해 여러 직원을 두기에는 부담이 될 테니 손님들이 셀프 서빙이 필요했다. 지령을 실행하기 위해 주방 쪽으로 가니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진동했다. 주방 할머니는 푹 끓인 시커먼 배추 된장국을 마지막으로 담고 내게 가져가라는 눈신호를 보냈다.
넘치게 퍼준 고봉밥에 싱싱한 상추, 쌈장, 마늘, 파무침, 김치, 찰랑이는 배추 된장국과 함께 빨간 어묵볶음이 보였다. 오겹살에 어묵볶음이라니... 반찬 머릿수 채우려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오겹살이 다 익은 후에 알았다. 이 어묵볶음이 <도우미 식당>의 킥이라는 걸. 활활 타오르는 연탄불 위에서 생오겹살이 희생한 끝에 노릇하게 구워졌다. 일단 아무것도 찍지 않고 순수한 오겹살을 입에 넣었다. 오잉? 입안에 탱탱볼이 튀어 다니는 듯한 미친 탄력이다. 그다음에는 굵은소금을 찍어 한 번 더 시도. 오메? 버터 코팅이라도 한 것처럼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자 이제 마지막, 마늘과 청양고추를 넣고 바글바글 끓인 멜젓에 푹 찍어서 입에 넣었다. 배 타고, 비행기 타고 육지까지 오느라 진 빠진 제주산 돼지를 먹을 때와 차원이 달랐다. 신선하고, 고소하고, 탱글탱글했다. 그리고 연탄불 상태를 봐주러 온 사장님이 어묵볶음을 불판에 올려 구워 먹어 보라고 권했다.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한마디에 냉큼 실행했다. 연탄불에 살짝 그을린 어묵 구이는 예상 가능한 맛이지만 나름 특색 있고 고기에 질린 입안을 가끔 환기해 줬다.
제주산 생 오겹살 정식 3인분에 맥주 하나. 40여 분 만에 잔반 없이 싹싹 비우고 가게를 나올 때쯤엔 만석이었다. 그때도 관광객은 우리뿐이었다. 사전 정보가 없이 이곳을 우연히 지나가다 봤다면 ’이렇게 외지고 다 쓰러져 가는 식당에 대체 누가 올까?‘라고 생각했을 거다. 제주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육지 것의 걱정이 무색하게 그 식당은 무수한 세월을 견디고도 쌩쌩하게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꾸만 반짝거리는 ’새것’에 눈이 간다. 하지만 오래 붙잡아 놓지 못한다. 허술한 본질을 메우느라 꾸미고 애쓰다 보면 그 반짝임을 꾸준히 유지하기 힘들다. <도우미 식당>은 제주 돌담을 닮았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 있는 닳고 닳은 제주 돌담처럼 허름해 보이지만 단단한 내공이 있었다. 자잘한 잔기술 대신 묵직한 저력을 가진 강자였다. 친절함, 세련됨, 편리함 따위와는 거리가 멀지만 꾸미지 않은 좋은 원재료가 바로 <도우미 식당>의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