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 보며 자아성찰 1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건 사람에 대한 기대가 아직 있다는 말일 텐데
남에게 뭔가를 거저 바라거나 기대는 성격 자체가 아니기에
'외로움'은 나를 수식하는 말로 적합하지 못하다.
혹은, 그렇게 '나약'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미혼인 입장에서 기혼의 세계를 감히 알 순 없지만
서로가 '동반자'임을 법과 양심이 증거해준다 해도
다들 저렇게나 론리니스를 부르짖는 걸 보면
개체 간 본질적 거리는 굳이 철학과 신앙 따위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과학이고 진리인 게 분명하다.
아참, 다시 태어나도 이 사람과 결혼할 거라는 친구를 내 인생에서 딱 한 명 보기는 했으니
운명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 같다.
조카를 유모차에 태워 일몰쯤 공원에 갔다.
아파트촌이지만 고요함 버프 효과로 해 지는 풍경은 꽤 목가적이었다.
해를 찍던 나는 조카에게 셀카모드를 넘겼고
세상에 태어난 지 한 해 지난 남아는 자기를 꽤나 즐겁게 마주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화면 속 주인공은 아직 말문 자체가 안 트인 생명체였다.
인간의 언어는 그곳에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그런데 아무도 없이 나 혼자 내 얼굴만 봐도 재밌는걸.
누가 계속 뭘 하네? 바로 나야.
누가 되게 신나 보이네? 바로 나야.
세상 꽉 차게 지금 충분히 행복해.
물론 내 옆엔 나를 사랑해 주는 보호자가 항상 있지.
봐, 지금은 엄마 대신 이모가 있어.
그래서 마음 놓고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어.
나중에 커서는 내 옆에 당장 누가 서 있지 않아도 이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왜냐면, 지금 이렇게 몽땅 받은 사랑이 나를 항상 우뚝 세워줄 거니까.
그것인가 보다, 홀로 서 있어도 오늘도 씩씩할 수 있는 근거.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는 자기 자신이 맞다고 본다.
내게 맞는 옷을 입을 때 나는 기쁘고
내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을 때 나는 슬프다.
나에게 가장 기쁨을 주는 존재도,
나에게 가장 슬픔을 주는 존재도
바로 나다.
타인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며
말이 통하는 우린 서로 어깨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내가 내 마음을 모르고, 알면서도 무시하는 것으로부터 자아의 문제가 시작되는 게 아닐까.
아가 때 우리는 이렇게도 사랑스럽게 자신을 바라보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