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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디어 Aug 22. 2024

1952 그대에게

그토록 미웠고, 좋아했고, 원망스러웠고  그럼에도 많이 사랑했던.

1952 그대에게 

(그토록 미웠고, 좋아했고, 원망스러웠고 그럼에도 많이 사랑했던 이에게)


울었어. 

아니 울었다는 말보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 미움과 원망, 안타까움과 미안함,  참을 수 없는 슬픔, 아 뭐라 말하기도 어려운 그 감정들이 쉴새없이 쏟아져내린다 표현하는게 맞을거야.  닦을 수도 훔칠수도 그렇다고 숨길 수도 없었어. 그저 입술만 깨물어 넘치는 감정을 막아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더라구. 


"사랑했어." "잘가" 나는 지금 머리를 스쳐가는 그 한마디를 삼켰어. 사춘기 소녀가 된 후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이 낯선 한마디가 지금 이 상황 앞에선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류의  달달한 말은 원망과 미움으로 녹아내린 그동안의 내 감정을 표현하기엔 너무 부드럽지. 사실 아빠를 향한 여러 감정들을 들여다보기조차 힘들어서 대충 아무렇게나 포장지로 숨겨놓았어. 어쩌면 그 감정들은 애증이라는 열기에 녹아버려 대충 뭉쳐놓은 울퉁불퉁한 초콜렛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어.


IMF 는 사춘기 학생시절이었던 우리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지.

뉴스에서 큰 일처럼 앞다투어 보도하는 모습에 뭔가 큰일이 난 거라고만 생각했었지만 우리 집으로 그 불뚱이 튀게 될 지 몰랐었어. 4식구가 살기에도 꽤 컸던 집이 방 하나와 화장실이 딸린 월세 원룸으로 바뀌고, 차가 없어지고, 대문에 들어서 마주한 빨간 딱지가 붙어 있던 내 소중한 물건들을 보니 실감이 났어.  평화롭게 유유자적했던 내 세상에도 빨간 생채기가 생겨나며 상처들이 고이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였어.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 한 번도 본 적없는 (아빠의 지인이라던) 무서운 낯선 이들의 방문, 하루가 멀다하고 집으로 쏟아지던 법원의 각종 서류들. 그 전에도 바빠서 집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아빠는 그 뒤, 자취를 감추었고. 남겨진 가족에게는 한번도 겪어 본적 없던 새로운 지옥이 열렸지.


남겨진 엄마, 나, 동생은  '난 아무렇지 않음' 가면을 써야 했고 일상을 계속 이어나가야 했어.

이무일 없다는 듯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친구들과 웃고 지내는 낮시간 동안이 오히려 행복했어. 해가 져서 집에 돌아오면  난 내가 12시를 넘긴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고, 그 동화를 읽어두길 잘했다고 생각했어. 곧 영원한 행복이 있을 거라는 결말이 내게도 있을지도 모른다 희망을 갖게 해줬으니까.


결혼 후  가정주부로만 살아왔던 엄마는 오전에는 망치와 장도리를 들고 건설현장에서 쓰일 나무자재에 박힌 못들을 뽑았고, 오후에는 오전 내내 무거운 자재들과 싸우느라 떨리는 손으로 공단에 가서 라면 스프에 들어갈 건더기들을 나누는 작업을 했어. 사춘기의 나는 엄마의 변화가 가장 마음이 아팠어. 이 상황을 만든 누군가를 원망하면 좀 덜 힘들 것 같아서 아빠만의 잘못이 아님을 알면서도 화살을 아빠에게 돌렸어.


엄마는 그 일을 하면서 현실감이 없었대. 아니 현실감을 느낄 시간도, 감각도 없어서 그저 로봇처럼 일만 했대. 빚쟁이에게 시달리느니 차라리 그런 곳에서 혼자 정신 없는게 훨씬 속이 편하다고 하더라고. 물론 그 때문에 관절통증을 물론 각종 병을 보너스로 얻게 되었어. 


외가의 도움으로 어찌저찌 타지의 대학에 진학한 우리 남매는 공부보다 아르바이트에 더 매진해야 했어. 

월세와 생활비, 학비를 우리의 힘만으로 감당하기가 어려웠거든. 차라리 공부를 더 많이 해서 장학금을 타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때의 나는 하루하루의 버스비, 밥 값, 월세, 각종 세금 등이 우리 남매의 목을 조르는 것 처럼 느껴져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 조차 사치로 느껴졌어. 늘 돈 때문에 더 좋은 기회를 놓쳐야 했고, 번번히 좌절을 겪는게 당연해졌지. 그 때 알았어. 온통 꽃밭이었던 내 삶이 뒤집어진 순간 이후 모든 것은 나의 의지와 젊음, 열정만으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돈이 없어 실습 재료를 살 수 없었을 때,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가야 했을 때, 어학연수가 좌절 되었을 때, 번번히 모든 것을 접어야만 했을 때 도와달라 손내밀 곳이 없다는 것이 절망적이었고, 날 좀 도와달라는 말한마디 내뱉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던 비참했던 그 때 결심했어. 우릴 외면한 무책임한 아빠는 이제 아빠가 아니라고. 언젠가 아빠가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때 나도 외면할거야 라고.


 모든게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바보같은 엄마는 말야. 시간이 지나 암과 질환등을 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아빠를 받아주더라고. 그리고 다시 가족이 된 우리는 아빠를 휘감던 암 수술과 치료를 몇 차례 함께 했고, 우리 남매는 또 아빠의 수술비를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모으고, 그렇게 번 돈은 아빠의 회복을 위한 병원비와 통원비로 흩어졌어. 허무해졌어. 모든게 허무해졌지. 덕분에 세상에 좀 더 염세적이 될 수 있었어. 

살아 뭐하나 라는 생각도 들고. 어쩄든 나의 인생은 누군가가 심어놓은 꽃밭은 아닌 것 같으니 최소한 밭에 박힌 큰 자갈들을 피해 가자.  물론 아빠는 내 인생 길에  크고 작은 자갈들을 여기저기에 꽂아 넣은 존재였고 말야. 


"니 어깨 뒤어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너네 아빠 살려 놓는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그러니까 그 전에 잘하라고 하신다"  어느 날 답답한 속을 풀기 위해 찾아간 점집에서 그렇게 얘기하대. 큰 병원에서 여러번 고비를 넘긴 아빠를 할머니가 데려간다니. 한편으론 시원하기도 했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매일을 술과 담배에 절어 살던 아빠의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할머니께 맡기는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하면서 말야. 



그런데 갑자기 이리 평화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있는건 아니잖아. 

나 아직 할 말도 다 못했는데 말야. 너무나 밉다는 말, 싫다는 말 뒤에 숨겨진 말들이 아직도 많았는데 말야. 

아빠가 집에 안들어오고, 내가 아빠를 외면하던 그 긴 시간 동안 못했던 그 말을 아직 내 뱉지도 못했는데.

아빠를 보내야 하는 그 순간마다 계속 감정이 흘러내렸어. 너무 미워해서 인지, 너무 미안해서 인지, 너무 사랑해서인지 구별이 안갔어. 그냥 쉴새 없이 뭔가가 쏟아져 나왔어.



아빠. 나 이제 이해해. 아니 이해 못해. 아냐 이해할게. 용서할게. 아니.. 나 용서해줘. 나 이해해줘.

그 시절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아빠에게 너무나 바라는 것이 많았던 딸과 가족의 무게. 지켜내지 못했던 것과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못내 부끄럽고, 처자식 앞에서 굴욕적인 꼴들을 당하는게 힘겨워 결국 가족 밖으로 뛰쳐나가야만 했을 외로웠을 시간의 공백. 그 시간에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뭘 하고 있었을까?


늘 멋진 자동차를 타던 아빠가 버스를 더 익숙하게 타고 오가며 아쉬운 소리 해가며 딸과 형제들에게 용돈을 청해야 하던 그 모습. 구걸이라고 모질게 말해 미안해.  아빠에게 더 많이 받지 못함을 원망하느라 더 많이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빠의 마음..감정을 읽어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한게 너무 미안해.

그리고 앞으로도 이 감정들이 더 희미해 질 것 같아서 그것도 미안해. 


나의 첫사랑이자, 아무 조건없이 나를 정말 아꼈던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남자 아빠에게..

아빠도 괜찮다면 주고 싶어.

울퉁불퉁 못생긴 내 초콜렛  속 달달한 말한 마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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