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디어 Sep 01. 2024

조심해, 나 월명동 스라소니 혈통이야.

(부잣집 딸은 어떻게 동네 싸움꾼이 되었나)

조심해나 월명동 스라소니 혈통이야.

(부잣집 딸은 어떻게 동네 싸움꾼이 되었나)     



 “지금 벌써 몇 번 째야? 왜 자고 일어난 자리를 정리하지 않는 거야?”

처음엔 좋은 말로 타이르기도 했지만, 어물쩍 넘어가는 딸이 꼴 보기 싫어 나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날 저녁 훔쳐본 아이의 일기장 속 나는 사납고 소리 잘 지르는 계모로 묘사되어 있었다. 딸의 표현에 따르면 다른 엄마들처럼 친절하지 않고, 욕도 굉장히 자주, 그것도 아주 잘해서 나의 사회생활이 걱정된단다. 

진짜 내가 효녀를 낳았구나 싶었다. 소심한 본인과 달리 엄마는 아빠와 가족들에게 당당하게 큰소리를 지르는데 이 점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는 호기심 꽉 찬 내용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난 사회적 친절함을 가장하며 타인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인자하지만, 정작 가까운 식구들에겐 마음과 달리 따뜻한 지지와 격려보다 걱정과 단점에 대한 지적을 주로 건넸던 것 같다. 

순한 부모님, 조용하고 순둥 했던 남동생과 달리 나는 이 집안의 소문난 싸납빼기(성질이 사나운 이라는 뜻의 전북 방언). 

나의 이 거침없음은 어디에서 왔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다 머릿속에 누군가 톡 떠올랐다.   



       

‘기쁠 희(喜)’를 이름에 쓰지만 내가 보기에 기쁠 일 별로 없어 보였던 인생. 

누구의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지만 내 할머니 ‘박희’ 여사의 인생에 대해 나는 종종 저렇게 느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할머니 이야기를 할 때 박희 여사의 남다름을 느꼈다. 

대부분의 친구가 묘사하는 할머니는 내 할머니처럼 여장군 같은 포스가 아니었다. 친구의 할머니들은 한결같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손주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따스한 분들이었다.       



        

박희 여사는 동네에 소문난 싸움꾼. 할머니 댁은 언제나 리드미컬한 큰소리가 나는 것이 당연했다.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의 화난 목소리가 회초리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회초리가 바람을 가르는 듯 날카롭고, 거친 목소리가 내 고막을 뒤흔들면 정신이 없을 정도. 

할머니는 가족들과 하하 호호 잘 있다가 느닷없이 며느리들에게 시비를 걸기도 하고, 수 틀리면 할아버지에게 큰소리를 내지르기도 했으며 종종 이웃들과 아주 사소한 문제로 크게 다투기도 했다. 

전투력이 최고조인 할머니에게 나는 “월명동 스라소니”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명절 음식을 며느리들이 가져가는 것도 탐탁지 않아 할 정도로 본인의 것에 손대는 걸 아주 싫어했다. 

한 번은 명절에 할머니 댁에 선물로 들어온 스팸이 탐나 다섯 캔 정도를 가방에 챙겨간 적이 있었다. 

그날 할머니는 늦은 저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 아들들 집마다 전화해 스팸 도둑을 기어이 찾아냈다. 다음 날 나는 대역죄인의 마음으로 최대한 불쌍한 척하며 스팸 다섯 캔을 그대로 다시 가져다 놓았다. 

예상대로 나는 용서 대신 꾸짖음을, 스팸 대신 욕을 배 터지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나는 스팸을 잘 먹지 않는다.               




할머니 장례식에서 할머니와의 이런저런 추억을 반추하며 ‘어렸을 땐 부잣집 딸이었다던 할머니가 저렇게 거친 성품을 갖게 된 걸까?’ 생각한 적이 있다. 왜 남들에게 미움을 살 수 있는 행동들을 남들 눈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이 하게 된 걸까?    



  

처음으로 할머니의 인생을 쭉 유추해 봤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할머니는 일본인 선생님에게 채찍을 맞으며 일본어를 배웠다고 했다. 배움의 시작이 매질과 함께라 학교 가는 것이 싫었지만 옆 책상에 앉은 일본 아이를 이기고 싶어서 이 악물고 공부했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눈앞에서 순사에게 끌려가는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의 옷자락을 잡고 울다가 순사에게 맞은 경험으로 인해 충격도 크게 받았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광복의 기쁨도 경험했고, 6.25도 온몸으로 겪었다.     




불안정한 시대에 태어난 탓에 할머니 할아버지는 피난민의 고달픈 삶을 살았다. 

양반집 출신이라 험한 일은 못하겠다는 남편과 줄줄이 딸린 5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할머니는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새벽에 일어나 가족들의 끼니와 도시락을 싸고, 낮에는 막내를 업고 나가 시장통에서 안 팔아 본 것이 없었다. 저녁에는 미군들과 양공주들에게 화장품과 옷가지, 액세서리 등을 팔며 원더우먼처럼 여러 일을 해내야 했다.    



 

둘째 삼촌의 증언에 따르면 할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공부를 꽤 잘했던 큰 고모와 둘째 삼촌을 서울로 보내 방을 얻어주고, 공부를 시켰다. 

집안을 일으킬 확률이 높았던 자식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열어주고자 본인을 조금 더 희생하는 길을 택했다. 생업이 바쁜 와중에도 15일에 한 번씩 동대문 시장이나 평화시장에 가서 옷이나 물건을 떼러 꾸준히 다녔다. 그 와중에 자식들이 공부하고 있는 자취방에 가서 반찬도 해놓고, 할아버지 대신 직접 나서서 자식들의 불편사항을 앞장서서 해결하는 야무진 성격의 박희여사.

 사실 그 시대가 원하는 조신하고 조용한 여성상보다는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가 작은 전투를 치러내는 용감한 용병에 더 가까웠다.     



 

외모에서 풍겼던 강인함 만큼 성격도 남달랐던 할머니. 가장이 된 여자로서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드세 보이는 길을 택했을 거라 짐작했다. 

그래야 누구도 나를 만만히 여기지 않았을 거고, 가족 역시 쉽게 건드리지 못했을 테니까.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오다 보니 괜히 미워했던 할머니의 인생이 안쓰러워졌다. 

돌아가실 때까지 수고했다 혹은 사랑한다 말 한마디 못 해 드린 것이 못내 마음 아팠다.   



       

거울을 봤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와 나 많은 것이 비슷한 것 같다. 

아파 보이기 싫어 꼭 쨍한 컬러의 립스틱을 바르는 모양새까지 할머니를 닮았다. 아빠를 많이 닮았다던 나의 건장한 뼈대와 굵직굵직한 외형, 비 오는 날이면 유난히 더 곱실거리는 이 반곱슬머리도 할머니에게서 왔다. 

웃을 때 콧등에 호랑이 주름지는 모습과 큰 목소리로 기침하는 것도, 화날 땐 큰 소리로 욕하며 씩씩대는 것조차 할머니에게서 왔을 거다.   



   

기회가 되면 딸의 일기에 답해줘야겠다. 


“엄마는 말이야. 엄마의 할머니를 꽤나 많이 닮은 것 같아. 그러니 조심해. 또 이부자리 정리하지 않으면 이제 더 큰 소리로 화낼 거야.”     

     

이제는 가끔 그립다. 내 할머니 박희 여사.           

작가의 이전글 수국 진 자리에 파고드는 너와 나의 연결고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