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라이킷 댓글 6 공유 25 브런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나의 사랑하는 생활
By 모레알 . Jun 16. 2017

그건 아마 옛정일거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친구들이 약속 장소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늘 그렇듯 날씨 이야기를 시작으로 못 본 사이의 일들을 이야기하느라 커피 주문도 잠시 잊는다. 그때 친구 하나가 갑자기 무언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 애 아빠는 왜 맨날 똑같은 비누만 사 오나 모르겠어. 내가 그것 좀 그만 사라고 집에 많다고 그랬는데도, 엊저녁 집에 오던 길에 그 비누 세일한다고 또 사 온 것 있지. 정말 비누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 왜 맨날 그것만 사 오는지 모르겠어."

남편이 평소에 비누도 사가지고 오고 또 세일한다고 일부러 챙겨서 사 온다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한다면 아침부터 웬 남편 자랑이냐고 흉을 봤을 것 같다. 하지만, 워낙 오랜 친구 가족이고 그 남편을 잘 알다 보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아니 무슨 비누길래 남편이 사다 줘도 불만이야?"
"왜, 그거 있잖아. 그 뭐더라... 그거 하얀색 비누 있잖아. 금방 닳고 쉽게 물러지는 거. 난 그거 싫어서 사 오지 말라는데도 가면 또 그걸 골라온다니까. 그 많은 것 중에 그것만 사는 것도 신기해. 대체 왜 그럴까?"

친구의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불만이고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난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슬며시 내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아이보리 비누?"
"응~~~ 맞아, 그거 옛날 비누잖아. 지금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 아이보리 비누를 옛날 것이라고 표현하는 친구는 남편과 나이 차이가 좀 있다. 남편분은 나보다 연배가 있으신대, 난 두 살 어린 친구보다 오히려 남편분과 더 같은 세대로서의 동질감과 공감을 느낀다. 그 시절은 불과 몇 년 차이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때라, 단지 정치나 사회 문제를 대하는 견해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 대한 정서도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아이보리 비누? 나도 좋아해. 그 비누를 좋아하고 그 비누만 산다는 것은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이 있어서 일 것 같은데... 그 시절 아이보리 비누는 초이스 봉지 커피랑 함께 미제 물건 베스트셀러 아이템 중에 하나였거든..."

지금은 '미제'라는 표현조차 잘 쓰지 않지만, 그때는 미제 물건, 미제 보따리 아줌마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즈음에야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었으니 그전에는 해외를 나가는 것도 힘들었고, 그렇다 보니 바다 건너온 미제 물건도 쉽게 접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미제 보따리 아줌마를 통해서, 또는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나 만나보던 미제 아이보리 비누. 하얗다고 표현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인 순백의 우유 빛깔이 주는 고급스러움과 향은 그 자체로 브랜드 이미지를 올려놓았던 것 같다. 그때는 아마도 아이보리(IVORY)가 비누 이름이라고만 생각했지 흰 상아색을 말한다고 까지는 깊게 생각 못했을 것 같다.



그 후 '순수하고 가벼워 물에 둥둥 뜨는 비누'라는 브랜드 전략으로 한국 시장에 출시된 아이보리 비누. 난 그 광고 문구가 얼마나 신기했던지, 무거운 배가 바다에 뜨는 것보다 비누가 물에 뜬다는 사실에 더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땐 그렇게 고급스럽던 아이보리 비누의 향이 더 이상 내 기억 속의 향이 아니었다. 세월 따라 제품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도 다른 많은 좋은 제품들 속에 그 옛 기억의 향기가 파묻혀 버린 게 아닌가 싶다. 그 시절에는 향이 있는 비누도 별로 없었으니 유달리 더 좋게 느껴졌던 것일 게다. '옛날엔 맛있는 음식이 무척 많았던 것 같은데, 이젠 왜 그런 맛이 안 날까?'라며 궁금해하는 것도, 사실 입맛이 변했다기보다는 먹거리의 홍수 속에서 부족함이 주는 아쉬움과 소중함이 점점 사라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지만, 아마 친구 남편도 나처럼 제일 처음 써 본 미제 비누의 순백의 향기가 오랫동안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을 아닐런지. 그놈의 첫정이 무서워서, 아니면 옛정이 생각나서, 매번 이번엔 안 사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또 눈길이 가고 손길이 가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뭐 단순하게 그냥 아는 비누라서, 써 본 비누라서, 줄곧 고집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후자인 경우가 더 가까운 이유일 것 같기도 하다. 괜히 내가 그런 추억을 갖고 있다고, 나와 같은 시절을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감정의 일반화를 하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비누 냄새가 맞을까, 아니면 비누 향기가 맞을까?
가끔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냄새와 향기를 구분해서 쓰지 못하는 사람들을 입방아에 올려놓던데...
무언가 아련하고 지나가 버린 추억 속의 단어들,
비누 냄새, 아기 냄새, 엄마 냄새...
아이보리 비누는 추억의 비누라서 그런지 왠지 비누 향기보다는 비누 냄새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아이보리 비누 냄새는 맡는 순간 어린 시절로 훌쩍 돌아가게 만드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후각의 추억'이라고나 해야 할까? 

냄새가 너무 좋아 손을 씻고 씻기도 하고, 정말 물에 뜨는지 실험하느라 비누가 물에 퉁퉁 불어 엄마한테 혼났던 기억들까지...

모든 촌스러웠던 추억의 시간들이 친구의 불평 덕분에 한달음에 내게 달려왔다.


친구야,

그건 아마...... 옛정이기 때문일거야.....



keyword
magazine 나의 사랑하는 생활
캐나다와 한국을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살면서 느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꺼내 보려 합니다.
댓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