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아이

스타벅스에서

by 정오의 햇빛

스타벅스에서 어린아이가 노래를 부른다.
크게.
꽤 길게.

공공장소에서 아이에게 어디까지 자유를 허락해야 할까.


노키즈존이 괜히 생긴 건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조용히 일하러 왔을 테고,
누군가는 혼자 있고 싶어서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도서관은 아니다.
이미 여러 테이블에서 웃음과 대화가 오간다.
우렁찬 통화 소리도 들린다.


그렇다면 기준은 무엇일까.

카공족도 있다.
수다를 떠는 사람도 있다.
잠깐 눈을 붙이는 사람도 있다.


카페는 애초에 하나의 용도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온 이상
이곳이 잠시 작은 키즈카페처럼 변하는 순간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노래 부르는 아이가 거슬린다면 목소리 큰 어른은 괜찮은가.
통화를 길게 하는 사람은 이해되는가.
나는 무엇에 더 예민한 걸까. 소리의 크기일까.
아니면 그 소리의 주인이 ‘아이’라는 사실일까.

나는 잠시 생각한다.

정말 아이가 문제일까.

어쩌면 나는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그대로 내는 그 태도가
조금 부러운 건 아닐까.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해졌을까.

공공의 질서를 배운 대신 자연스러운 유년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그 아이가 누리고 있는 시간을 나는 가져본 적이 있었을까.

불편함은 소리 때문이 아니라 기억 때문은 아닐까.


아래는 초고


도입

스타벅스에서 노래 부르는 어린이.

문제제기

공공장소에서 어린이에게 어디까지 자유를 허락해야 하는가?


확장

노키즈존이 괜히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손님들도 각기 우렁우렁 대화를 하고 있으니 정숙을 요하는 곳은

아니다.


비유

카공족도 있다.

카페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곳이니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온 이상

키즈카페의 용도도 있다고 봐야 겠다.


전환

노래부르는 어린이가 거슬린다면 목소리 큰 어른도 거슬릴 것이고

크게 통화하는 사람도 눈꼴시다.


결론

노래 부르는 아이가 문제가 아니다.

그 어린이의 자연스럽고 눈치 보지 않고 허용되는 모습이 부럽고

배아픈 것같다.

나에게 없는 유년을 누리고 있는 사람에 대한 맹렬한 질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