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을 묻지 않는 친구
재택 근로자로 살다 보면 참 쉽게 무뎌진다. 시간에, 계절에, 나이에. 평일과 주말의 구분도 쉽지 않고, 정해진 업무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 어지간해서는 생활 루틴이 집 안, 정확히는 방 안을 벗어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온라인 게임 마니아로 유명한 가수 이소라 씨가 한 달 넘게 집에서 게임을 하다가, 그새 계절이 바뀐 것을 모르고 한 여름에 코트 차림으로 외출했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집에서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의 삶에서는 그런 장면들이 부지기수로 존재한다.
물론 일이 바쁠 땐 그런 단조로움이 장점으로 기능하는 것이 사실이다. 지나치게 뜨겁거나 뼈 시리게 차갑거나 둘 중 하나인 삶을 지겹도록 겪어본 입장에서 그 ‘단조로움’이, 크게 감정의 고락없이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덕목이라고 여겼던 적도 있다. 하지만 상황이 안좋을 땐 그 단순함이 늪이 되어 사람을 삼키더라. 일일이 다 열거할 필요는 없겠지만 소속감의 여부나 연봉 테이블 같은 것 말고도 제법 다양한 것들이 프리랜서 노동자의 자존감에 파장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 스스로 접시에 코 박다 정신 차리는 짓을 몇 번 하다보면 자연스레 ‘균형’의 중요성에 대해 배우게 된다. 다음 일이 들어오지 않아도, 누군가 나를 백수 취급해도, 옛 동료 소식에 초라해져도 일상을 지킬 수 있는, ‘루틴’의 중요성. 개인적으로는 그걸 인지하는 순간이 비로소 프리랜서로서 ‘진짜’ 커리어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내게는 라디오와 처음 사랑에 빠진 지난 여름 휴가가 바로 ‘그 때’였다. 당시 묵던 숙소의 주인 부부께서 버려진 확성기와 소형 오디오 스피커를 붙여서 손수 만들었다던 DIY 라디오.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떠났던 그 짧은 여행에서 나는 좋은 음식이나 훌륭한 풍경보다 매일 아침, 저녁 숙소 침실에서 듣던 라디오 방송에서 더 많은 위안을 받았다.
혹시, 당신은 소리가 가진 온기를 피부로 느껴본 적이 있는지. 나팔 모양의 확성기를 타고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퍼지는 라디오 소리에는 단단한 심지가 있다. 공기를 매개 삼아 사방으로 울려 퍼지면서도, 그 무게 중심을 잃지 않는 소리의 따스함이 마치 나를 끌어 안아주는 것 같았다. 그 새로운 차원의 위로 경험을 계기로, 서울에 돌아온 직후부터 내 일상에는 매순간 라디오가 함께했다. 정확히는 숙소에서 처음 알게 된 KBS의 음악 방송 채널 ‘클래식FM’이.
비가 올 때도 눈이 올 때도, 사람이 좋을 때도 싫을 때도 라디오를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 하루가 몇 시에 시작되든 라디오의 볼륨 버튼을 올리면 오늘이 어디쯤 왔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영영 안될 것만 같은 일도 편성표를 따라 바뀌는 방송 루틴을 페이스 메이커 삼아 쳐내다 보면 끝에 도달해 있었다. 오전과 오후만 나뉘어 있던 하루가 조금씩 다양한 결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어떨 땐 무기력하게 지나온 시간들이 아까워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을 닦아준 것 또한 라디오였다.
고작 그 작은 아날로그 기기 하나를 방에 들인 것 만으로 일상이 그토록 달라질 수 있다니, 과장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라디오가 습관이 되기 전까지는 나도 그랬다. 내게 무언가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로 시작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냥 좋아서, 없으면 괜히 허전해서 하루, 이틀 반복하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일상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변화는 세 가지의 작은 ‘발견’을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혹시 해 뜰 무렵의 이른 아침과 느즈막한 아침, 정오 근처 아침의 바이브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지. 라디오를 듣다 보면 방송 작가와 기획PD라는 직업이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들은 매일 최소 몇 만 명의 사람이 같은 리듬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시간대별 템포를 조절하는 ‘지휘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피곤하고 바쁜 출근 시간대엔 빠르고 명랑한 알레그로(Allegro), 기승전결 확실하고 힘찬 교향곡으로 역동적인 느낌. 한 숨 돌리고 본격적인 업무 바이브에 돌입하는 9시엔 폭넓고 여유로운 라르고(Largo), 차분하지만 감각적인 음악들로 처지지 않게. 정오 직전의 늦은 오전엔 자유로운 루바토(Rubato), 농담이 오가는 라이브 연주로 배고픔과 달아나는 집중력 달래보기. 정말 일하기 싫은 날도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책상 앞에 앉아 그냥 리듬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찌저찌 해내게 된다.
무엇보다 음악 중심의 라디오 방송은 음원 저작권 문제 때문에 ‘다시 듣기’를 할 수 없다. 오늘 놓친 방송은 아무리 기다려도 ‘복습’할 수 없다는 것. 일찍 일어난 날과 늦잠 잔 날 정도의 구분으로 살던 내게 이 사실은 오랫동안 무뎌져 있었던 ‘시간의 유한함’을 다시 일깨워줬다. 한 번 흘려보낸 시간은 절대 되찾을 수 없다는 아주 빤한, 그래서 섬뜩한 사실을.
철저하게 대중 청취자를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 방송은 노동요 삼기 적합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모든 선곡표가 나의 취향에 딱 들어맞을 순 없겠지만, 매일 전문 PD가 정말 좋은 음악, 대중적인 음악을 엄선해 틀어주기 때문에 거슬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특히 클래식 채널은 진행자의 멘트 분량도 많지 않은 편이고, 수백 년 넘게 대중성이 검증된 고전 음악 장르에 특화했기 때문에 언제나 일관된 퀄리티의 음악을 즐길 수 있다.
귀동냥이 무섭다고, 그렇게 매일 검증되고 괜찮은 음악을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새로운 취향이 생긴다. 특정 요일, 특정 시간대, 특정 프로그램의 선곡이 유독 좋다면 나와 ‘취향 케미’가 뛰어난 방송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듣기’는 못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선곡표를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매일 방송이 끝나면 방송국 홈페이지에 접속해 좋았던 음악의 제목과 작곡가명을 확인하고, 따로 찾아 들어본다. 한 곡, 두 곡 쌓이는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볼 때 느끼는 뿌듯함은 덤.
실시간 문자 사연을 읽는 방송을 들을 때면 매번, 지금 이 순간 함께 이 방송을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내게는 어제와 똑같아 보이는 하루인데, 같은 시각 어딘가에서는 다양한 모양의 희로애락이 교차한다. 어렵게 낳은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다섯 살 생일을 맞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가족을 떠나보내거나, 오랜 시간 힘들게 준비한 시험에 합격하는 또 다른 ‘오늘’들.
하루 24시간 중 고작 1시간만 들여다봐도 이토록 삶은 상황 따라, 환경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데. 내가 뭐라고 인생을 단정지을 수 있을까. 다들 말은 안해도 저마다의 숙제를 등에 업고 묵묵히 살고 있구나. 그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나의 우울과 걱정, 불안 역시 굉장히 평범한, 남들과 다르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 ‘평범함’이 주는 위로가 얼마나 크던지!
만약 당신이 반려동물을 기르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주는 ‘조건 없는 사랑’이 얼마나 희귀한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주인이 잘났건 못났건, 날씨가 좋건 나쁘건, 심지어 자기 몸이 다쳐 아픈 순간에도 주인 얼굴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얼굴로 웃어주는 친구들.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그 무조건적인 신뢰와 우정이 주는 위로는 얼마나 힘이 세던가.
라디오 생활이 주는 가장 큰 만족감도 바로 그런 ‘항상성’에서 온다. 태풍에 가로수가 꺾이고 전봇대가 날아가도, 폭설로 도로가 눈에 잠겨도 라디오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정해진 방송을 시작한다. 나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어디 사는 지도 모르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분초를 다투며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서 힘이 생긴다. 많은 위로의 말보다, 그냥 이 보이지 않는 성실함 하나로 충분하다는 느낌. 내일도, 모레도 세상이 딱 이 만큼의 믿음만 내게 준다면 몇 번을 넘어져도 얼마든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그래서 나는 당신도 한 번쯤 라디오를 들어보면 좋겠다. 쫓기듯 헐떡이며 사는 것이 지겨울 때, 나만 제자리인 것 같고 매일 똑같은 하루가 암울하게 느껴질 때면 방문을 닫고 볼륨을 높여보자. 어떤 순간에도 당신에게 자격을 묻지 않는 친구가 이야기해줄 것이다. 괜찮다고. 이게 끝이 아니라고. 아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KBS 클래식FM 라디오의 대표 방송들을 소개한다. 당장 어떤 채널을, 무슨 방송을 들을지 고민되는 분께 도움이 되기를.
· 매일 아침 7시~9시
· 이재후 아나운서 진행
스포츠 캐스터로도 유명한 이재후 아나운서 특유의 정중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매력적인 방송이다. 하루가 시작되는 출근길 시간대 방송이라 그런지 참 다양한 상황과 장소에 있는 사람들의 실시간 문자 사연이 들어온다. 음악 역시 대중적이고 스케일 큰 '히트곡' 위주로 틀어줘서 부담없이 들을 수 있다는 게 장점. 9시가 되어갈 즈음, 마지막 신청곡을 틀어주며 DJ가 건네는 인삿말은 매번 뭉클하다. "당신을 응원합니다, 오늘도"
· 매일 밤 10시~자정
· 이상협 아나운서 진행
바리톤의 음성과 심야 시간에 어울리는 감각적인 선곡이 매력적인 방송. 이상협 아나운서는 97년도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한 음악인 출신이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권의 에세이와 시집을 펴낸 현직 시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행자의 캐릭터에 걸맞게 <밤과 음악>에서는 매일 한국의 시인과 소설가를 소개하는 코너들이 진행된다. 혹시 시집을 읽어본 지 오래된 사람이라면, 매주 금요일 이상협 아나운서가 직접 좋은 시를 골라 읽어주는 ‘시인의 의자’ 코너를 주목해보자. (아주 조금 과장해서) 나는 이 코너를 통해 수년 간 죽어 있던 내 안의 문학 세포를 다시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