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기형적 삶
과거는 미래를 담고 있다. 기억 속에 묻힌 장면들이 살다 보면 문득 강렬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분명 나의 일부가 되어 지금의 나를 만든 수많은 조각들 중 하나일 텐데도 낯선 장면들이.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미르는 집에 오는 누군가의 발자국소리를 늘 끔찍해했다. 그건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만큼이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소리처럼 느껴졌는데, 홀로 집에 있는 시간이 너무도 소중했기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자신의 공간을 짓밟고 깨부수는 침입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평화를 깨고 자신의 공간에 들어오는 걸로도 모자라 끊임없이 내 자유와 행복을 갉아먹는 괴물 같기도 했다. 미르는 이미 수십년간 참고 지내온 질릴 대로 질린 이 상황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역시나 늘 그래왔듯 나쁜 마음들을 목구멍 너머로 꾹 삼켜버렸다.
미르는 사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강박증, 우울증, 성조숙증, 불안장애 등을 앓으며 심할 때는 자학과 자해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강박증이 심해 자신의 방에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뭉툭한 연필이나 밀린 숙제, 구겨진 옷 같이 완벽하지 못한 것들을 보면 금방이라도 발작할 것처럼 불안해했다.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타고난 성격장애, 여기에 극도로 말 수 없고 소심하기까지 해 일상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왜 자신에게 하필 이런 장애가 타고났을까. 예민하고 불안장애가 있는 엄마의 성격을 물려받은 걸까. 미르의 가장 큰 외모 콤플렉스, 심지어 성격 콤플렉스까지 모두 제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미르는 엄마가 싫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모든 것들은 그녀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미르는 커갈수록 점점 그녀를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었다.
'만약 적당한 시기에 정신 치료를 받았으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미르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어쩔 수 없었다고, 불쌍하고 안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래도 적어도 가족이라면, 알아차렸어야 했다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보호해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람 한 가락에도 정처 없이 흔들리는 마음속 유리를 품으며 미르는 홀로 싸웠다. 홀로 버텼다. 홀로 자랐다. 싸우고 버티고 견디는 그 긴 긴 시간 동안, 한없이 서럽고 시린 그 시간 동안, 미르의 곁에 사람이라곤 없었다. 그러니 미르는 자신이 그들에게 갚아야 할 빚 같은 건 더이상 없다고 생각했다. 그 외롭고 긴 싸움동안 그들이 제게 내민 손길 따위는 없었으니.
바람 한 점에도 깨지고 마는 나약한 몸뚱이를 끌고 남들보다 수없이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결국 죽지 않고 버텨 여기까지 온 자신이 남들보다 강한 사람인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인 건지 미르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유리로 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미르는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른 채, 울지도 웃지도 않는 애매한 얼굴을 했다. 뒤틀린 얼굴이었다.
처음부터 뒤틀려져 있는 인생이었다. 태초부터 기형적 삶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미르는 자신이 참 불쌍해 울었다. 뒤틀린 기형아였다는 사실보다, 그때 그 시절에 그걸 알아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보다, 지금도 여전히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어 오늘도 홀로 울고 있다는 사실이 불쌍해 울었다. 벅찬 상황 하나 없이도 이미 미르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버티고 있었다.
다음생에는 부디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 볕 드는 삶을 살기를, 평안에 이르기를. 미르는 간절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