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둘은 친구가 되었다
“쓸모없는 년. 너 같은 건 이제 필요 없으니 꺼져.”
미르는 이제껏 그가 제게 내뱉는 독설을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마음속 무언가 울컥 솟아오르는 동시에 풀썩하고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미르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처음 보는 거리. 처음 와 보는 이 낯선 곳에 던져진 미르는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그저 걸었다. 어렸을 적 길을 잃으면 그저 앞으로 앞으로 고집스럽게 직진만 했던 것처럼, 하염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미르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갈 곳은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누구에게든 구조 요청을 해야 했으나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데 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주저하던 미르는 결국 핸드폰을 꺼내 가장 먼저 떠오른 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막상 걸었으나 신호음이 가는 동안 내심 받지 않기를 바랐다. ‘딱 5번. 5번 울려도 받지 않으면 바로 끊는 거야.’ 그러나 4번째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진은 미르의 전화를 받고야 말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 진, 나야.”
“응, 미르야. 듣고 있어. 근데… 너 무슨 일 있어?”
“정말 미안한데… 너무 미안한데 혹시 지금 만날 수 있을까?”
몇 번을 가다듬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와 그 속의 작은 진동을 느낀 진은 말했다.
“… 지금 갈게. 어디야?”
통화는 길지 않았으나 미르는 전보다 한결 가볍게 다시 걸음을 떼며 생각했다, ‘드디어 목적지가 생겼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진은 몰랐다. 그날 진이 미르의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미르의 세상은 정말로 무너져 내렸을 것이라는 걸.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되었다.
정신 차려보니 미르는 어느새 진과 함께 한강 둔치에 앉아 있었다.
진이 물었다.
“왜 하필 여기서 보자고 한 거야?”
“그냥 바다가 보고 싶었는데… 대신 강이라도 보면 좀 나을까 싶어서.”
“… 그랬구나”
늦가을의 꽤 쌀쌀한 강바람이 불어 손이 조금 시렸지만 상관없었다. 사실 미르는 아까 낮의 일로 인해 다른 모든 감각은 둔해진 상태였다. 미르는 진과 나란히 앉아 강을 바라보며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오늘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꺼내지 않았다.
이어진 침묵의 시간을 깨고 미르가 먼저 말했다.
“진, 있잖아. 나는 내 인생의 유일한 목격자야. 나는 모든 사람의 내면을 이해했지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래서 더욱 공감도, 위로도 동정도 받을 수 없었지. 그건 항상 내 몫이 아니었으니까.”
진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플 것 같아. 이해받지 못해도 위로는 받을 수 있잖아.”
미르는 피식 웃었다. 자신을 위로해주고 싶어 하는 진의 마음이 얼핏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그게 마냥 싫진 않았다. 역시 별 도움은 안되었지만. 그래도 진을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해주기로 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도 가끔은 이해받고 싶을 때가 있거든. 내겐 이해가 곧 위로야. 이해 없는 위로는 글쎄… 그게 동정이랑 대체 뭐가 달라?”
진은 대답했다.
“그런가…”
미르는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억울하진 않아. 사실 나도 나를 이해 못 하거든. 이런 나를 누가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진은 아무 말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은 미르를 좋아했고, 그들은 친구였지만 진도 감히 미르를 이해한다고는 말 못 했으니까.
“진, 그거 알아? 사실 살면서 내가 나를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은 딱 두 가지뿐이야.”
“그게 뭔데?”
“동정과 혐오."
잠시 숨을 고른 미르가 이어서 말했다.
"근데 동정과 혐오를 번갈아 가면서 지겹도록 하다 보니, 어느새 애틋해지는 거야. 그래서 나는 말이야, 내가 참 애틋해.”
“신기하네. 동정과 혐오가 만나 ‘애틋함’이 되다니.”
“그렇지? 안쓰럽다는 말로도, 불쌍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돼. 그냥 애틋해.”
그러고는 잠시 정적이 있었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고 미르는 문득 그 노을을 베개 삼아 이대로 눕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뱉어 버렸다. 뱉으면 이 변덕스러운 마음도 이내 사라질까 하여.
“나 눕고 싶어.”
진은 미르의 뜬금없는 말에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황당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눕고 싶으면 누워.”
“아냐, 그냥 안 누울래. 지금 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이 지나다니네.”
“뭐 어때,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인데. 계속 얼굴 볼 사람한테만 잘 보이면 되는 거지. 안 그래?”
“글쎄… 난 오히려 그 반대야.”
“왜?”
“그 한 번으로 내 모든 게 평가되는 거잖아. 다음이 없으니 날 해명하고 설명할 기회조차 없이. 나는 그럼 그 사람에게 영원히 그 한순간으로 기억되겠지. 난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워.”
“… 역시 넌 참 특이해.”
“내가?”
“응, 너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그런가…근데 나는 절대 나로 못살아.”
“왜?”
“세상이 날 그렇게 내버려 두질 않더라고. 매 순간 끊임없이 날 저주하고 괴롭히더라고, 다른 사람이 되라고. 나로 살고 나로 행동했더니 사람들이 날 이상하다고 하고 싫어하길래. 그래서 봐, 이렇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적당히 다른 사람이 되었지. 쉽게 말하자면… 그래, 결국 내가 진 거지.”
미르는 진이 자신을 너무 동정하지는 않길 바라며 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동시에 머릿속엔 계속해서 같은 말만이 반복재생된 것처럼 떠돌았다.
‘내가 졌어. 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