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 7전 8기 도전기
[2216번 차량, 신호 위반 실격입니다.]
나는 기어를 P로 바꾸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내 차로 달려오는 감독관에게 운전석을 내어주고, 조금 전까지 운전석에 앉았던 그 차의 뒷 좌석으로 옮겨탄다. 탈락도 두 번 해 보니 과정이 순조롭게 느껴져 실소가 나온다. 노란색 엑센트에 실려 다시 출발선으로 향하는 마음이 복잡하다.
이전 시험에서 탈락의 원인이 된 T자 주차에 매몰된 것이 문제였다. 연습 할 적에는 잘만 적용되던 주차 공식이 막상 시험장 에서는 긴장감 때문에 완전히 꼬여버려 주차 선을 몇 번이고 밟아버린 것이다. 첫 기능시험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돌아온 날, 가족들은 기능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어디있냐며 나를 신나게 놀려댔다. 하,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어. 이런 때에 불합격 같은것도 한 번 해보는거지. 라고 너스레를 떨어봤지만 나도 자존심이 상했다. 떨어져도 주행 시험에서 떨어질 줄 알았건만, 기능 시험 낙방은 예상 밖이었다. 재수는 괜찮아, 삼수가 조오금 그런거지. 이번에는 기필코 붙는다! 나는 각오를 다지며 유튜브에 올라온 모든 T자 주차 영상을 섭렵하고, 남몰래 실내 운전 연습장을 찾아 연습에 매진했다. 했는데... 막상 시험장에서 T자 주차 직전 신호를 받는 사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핸들을 꼭 쥐고 들어갈 건너편 주차 자리를 보며 직진하느라 신호등을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 이미 내 차는 사거리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아차, 빨간불을 보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는 이미 앞 바퀴가 정지선을 완전히 통과한 뒤였다. 감점이 되는 다른 기준과는 다르게 신호 위반은 바로 실격이었다. 나는 신호 위반 실격이라는 방송을 시험장 전체에 송출하며 차에서 내렸다.
응시표를 다시 돌려받아 시험장을 나섰다. 날씨 좋은 초여름 평일 오전이었다. 한산한 아파트 단지의 정류장에는 나와 불합격 도장이 찍힌 응시표 둘 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능 시험만 두 번 탈락했다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나는 왜 신호등을 못 봤지?’로 시작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명박 때는 직진만 해도 됐다는데, 나는 왜 그때 면허를 안 땄지?’, ‘남들은 한 번에 붙는 기능 시험을 두 번이나 떨어져?’, ‘운전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데 그게 바로 나인가?’로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응시한 세 번째 기능시험도 역시 탈락이었다. 사거리는 통과했으나, 이번에도 T자 주차가 문제였다. 응시표에 내리 찍힌 세 개의 불합격 도장을 확인하니 다시 시험을 볼 의지가 완전히 꺾였다. 기능시험은 한 번 떨어지면 3일 이후에나 다시 응시할 수 있었다. 가까운 주말 시간대의 시험은 정원이 마감되었고, 일정을 맞출 수 있는 시간에 시험을 예약하려니 운전 감이 흐려질 것 같아 시험을 보는 의미가 있을지 걱정되었다. 지금까지는 반차를 내 가며 평일에 시험을 보고, 기능교육을 추가로 받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런 열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세 번이나 떨어졌다면, 네 번째도 결과는 비슷하지 않을까. 운전은 상처만 남긴 채 구석으로 치워졌다.
운전면허는 따지 못했으나, 나의 기능시험 낙방 썰은 술자리 에피소드로 쏠쏠하게 등장했다. 이 에피소드는 공감대가 높은 주제면서 나를 스스로 내려놓음으로서 아무도 다치는 사람이 없이 웃을 수 있는, 술자리 분위기 띄우기의 여러 덕목을 갖춘 에피소드였다. 이 이야기는 보통 분위기를 띄우는 제 역할을 한 뒤 휘발되어 사라졌으나,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피드백을 주기도 했는데, 내 장단을 맞춰주며 자신의 운전면허 낙방 썰을 풀어놓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러했다.
#1. 친구 1은 오너 드라이브가 된지 3년이 넘은 운전자였다. 친구 1은 내 이야기를 듣고 꺌 웃더니, 본인은 도로주행 첫 시험 때 안전벨트를 매고 시험장을 나서자 마자 중앙선을 넘고 역주행을 시전하여 10초 만에 실격되었음을 고백했다. 그 이후로 한 동안 동기들 사이에서 최실격으로 불렸다고.
#2. 친구 2는 기능시험 1회, 도로주행 2회 낙방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친구 2는 첫 기능시험에서 20초 동안 아예 출발을 하지 못해 앉은 자리에서 탈락하였으며, 도로 주행 시험 두 번 중 한 번은 중앙선 침범(그렇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중앙선을 넘어 실격된다!), 한 번은 빨간불에 직진을 시전하여 신호위반으로 실격되었다고 했다.
#3. 친구 3은 S대를 나온 명문대생으로, 웬만한 시험 불합격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나 기능시험은 무려 7번을 떨어졌다고 했다. 그 횟수도 놀랍지만 친구 3이 시험을 낙방한 때는 직진만 할 수 있으면 다 붙는다는 이명박 시절 이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포인트.
많은 사람들이 운전면허에 떨어지고, 운전을 어려워 한다는 것. 한 편으로는 시험에 몇 번을 낙방한 과거가 있다 해도, 운전에 익숙해지면 도로 위에서 전재준처럼 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난 그 때 알았다. 뭐야, 다들 처음부터 운전면허 가지고 태어난 것 처럼 굴더니. 당신들도 다 힘들었네?
다시 면허를 따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은 2년 반이 지난 20대의 끝자락 즈음 이었다. 20대가 끝나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압박감에 시달리던 때, 쓴 맛을 보고 던져둔 운전은 좋은 도전거리였다.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 어느정도 자연치유의 경과를 밟았으며, 여러 술자리에서 들은 다양한 시험 낙방 썰은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자신감을 준 터였다. 마침 이직을 하면서 한 달의 여유도 생겼겠다, 나는 큰 맘을 먹고 운전면허학원에 재 등록했다. 거의 트라우마가 되어버려 걱정했던 기능시험은 다행히 100점으로 합격했고(정말 기뻤다), 이어진 도로주행 시험에서는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차선 변경을 하다가 속도위반으로 한 번 탈락의 고배를 마셨지만 두 번째 시험에서는 안정적인 주행으로 최종 합격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기뻐서 돌아버렸다).
면허증이 발급되자마자 나는 바로 운전연수를 신청했다. 어렵게 딴 면허인 만큼 확실히 운전을 체화해두고 싶어서였다. 나는 사설 운전연수업체를 통해 나이가 지긋한 여자 선생님을 배정받았고, 선생님의 SM5를 끌고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선생님은 조수석 손잡이 아래에서 종종 미니 화이트보드를 꺼내어 시험장에서는 배울 수 없는 실전 운전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 때 배웠던 고급 차선 변경 타이밍,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끼어들기 스킬은 아직도 잘 써먹고 있다.
10시간의 운전 연수를 마친 이후에는 가족 차를 끌고 다니며 행동 반경을 넓혔다. 나는 조수석에 엄마를 싣고 자유로를 타고 임진각을, 공항고속도로를 타고 영종도를, 올림픽대로를 타고 양평 두물머리를,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송도 코스트코를 갔다가 돌아왔다. 면허증에 잉크도 안마른 초보 운전자는 차선을 못 바꾸고 빌빌대거나, 합류 차선에서 끼지 못하고 어버버 하며 도로에 수 많은 죄송함을 뿌리고 다녔고, 선배 운전자들의 기꺼운 양보와 따끔한 질책(!)을 받으며 점차 도로에 적응해나갔다. 조수석에서 내 핸들 컨트롤 하나 하나에 훈수를 두던 엄마가 어느 날 드라이브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스르륵 잠이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30년 경력의 운전자를 조수석에서 재울 수 있는 정도면 어디가서 운전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이제 나도 운전 패치가 장착 된 것이다!
운전 패치의 놀라운 점은 버스나 기차역 중심으로 읽혔던 지도가 도로를 중심으로 인식된다는 것이었다.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좁은 땅덩어리에 도로가 온 몸의 혈관처럼 굵직하고 자잘하게 모든 곳을 커버하며 뻗쳐있는 것이 놀라웠다. 아빠가 물려준 구형 그랜저와 운전면허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도로가 닿는 곳이면 모두 갈 수 있다고 인식하는 순간 심드렁하던 우리나라가 전례없이 온통 놀러갈 곳 천지가 되었다. 코로나로 집 안에 봉인되어 있던 나는 면허와 함께 깨어나 전국구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바람을 쐬고 싶으면 한적한 파주나 일산, 남양주 카페에 가서 산이나 물을 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차박을 하러 충주에 내려가고, 친구들을 태우고 강화도에 2박 3일 여름 휴가를 다녀왔다. 꽃이 피면 꽃을 보러, 단풍이 들면 단풍을 보러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운전 자체가 주는 쾌감도 엄청났다. 내가 언제든지 나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다는 데서 오는 효능감은 다른 사람이 태워주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움직이는 것에 비할 수 없었다. 전에도 가 봤던 장소, 해 봤던 것들도 직접 운전을 해서 갔을 때에는 묘한 성취감이 MSG 처럼 뿌려졌다. 면허를 딴 지 막 일 년을 채웠을 때, 제주도에서 일몰을 따라 해안 드라이브를 한 적이 있다. 지는 해를 쫓아 차를 몰다가, 일몰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해안가 어디쯔음에 차를 세우고 김광석 노래를 들으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제주도에서 수 많은 일몰을 봤지만 그 때만큼 새로웠던 적이 없다.
운전 3년 차에 접어드니, 운전은 내게 새로운 것에서 익숙함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중이다. 도로 위에서는 조금 뻔뻔해졌고, 가끔은 전재준 자아가 튀어나온다. 이제는 어디 가서 운전 얘기가 나오면 마치 한 번에 시험을 붙어버린 것 처럼, 본 투 비 운전자인 것 처럼 점잔을 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더이상 기능시험 낙방 썰을 술자리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기능시험 탈락 전적은 여전히 웃겼지만, 술에 취하고 운전 뽕에 취한 내가 에피소드의 마무리를 장롱면허를 색출해내고, 운전을 강권하는 것으로 끝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운전이 내게 주었던 자유와 강력함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은 항상 드릉드릉하다. 나는 모두의 마음 속에는 전재준의 자아가 내장되어 있다고 믿는다. 아직 운전을 시작하지 못한 당신, 운전 한 번 시작하면 적성에 따악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