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살림살이를 옮겨야 한다. 팔 건 팔고 집으로 가져갈 건 가져가야 하는데 막상 옮기려고 보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퇴사를 하는 사람들은 박스 안에 자신의 사무용품을 챙겨 달랑 그것만 들고 나오는데, 이런 게 다 부럽다니, 나는 방 하나 전체를 옮겨야 하는 수준이다. 옮길 물건을 분류해 보자. 가장 작은 분류는 미술도구와 사무용품이다. 그러나 사무용품은 한 달간 더 써야 하니 미술도구를 정리했다. 벽에 걸려있는 그림 액자를 떼고 수채화 도구, 오일파스텔, 마커, 유화 도구, 색연필, 스케치북, 이젤 등을 정리했다. 나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도구들을 점점 사들였다. 제일 먼저 학원 내부 공간을 그렸고 그 그림으로 명함을 만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 엄마, 반려견을 그리고 꽃, 풍경을 그렸다. 처음으로 집이 아닌 작업실 같은 공간에서 그림을 오랫동안 그린 것이다. 시간이 날 때 오롯이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학원을 그만두면서 단 하나 아쉬운 점은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 없어진 것이다. 집에서 다시 그릴 수 있을까. 그림을 모두 떼니 정말 벽이 썰렁하긴 하다. 눈썰미 있는 아이들은 학원이 뭔가 허전하다는 말도 한다. 그림 한 장이 주는 힘은 큰 것 같다.
집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구가 필요하다. 이케아에서 검은색 캐비닛을 사서 정리를 했다. 다행히 모두 들어간다. 미끄러지는 크림 같은 느낌을 주는 오일파스텔은 풍경 그림에 딱이다. 컬러링은 단순 노동처럼 기분을 산뜻하게 만든다. 요즘 트렌드 마카는 냄새가 좀 나지만 밑그림 없이 쓱싹쓱싹 그리기 딱 좋다. 커다란 면적을 가득 색칠하면 스트레스가 날아갈 정도이다. 수채화는 물 조절이 재미있다. 어떤 그림이 나올지 알 수 없는 것이 물처럼 자유롭다. 그래서 어렵기도 하다. 그럴 때 수성 색연필로 디테일한 작업을 하고 물 한 방울 떨어뜨리면 된다. 가장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그림은 유화이다. 가장 전문적인 작업이다. 오일이라 붓을 씻는 방법, 보관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유화는 덧칠이 가능하다. 두껍게 칠하는 매력이 있다. 아무도 모르는 밑 색깔이 깔려 있어서 미묘한 색채 마술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스케치북이 생각보다 많다. 그동안 그림에 욕심을 부렸으나 시간이 나지 않았다. 캐비닛 안에 갇힌 도구들이 되지 말아야 하는데, 집에서도 틈틈이 그려야지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