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X도자기 01]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시큰둥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전국에 도자기 장인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 열심히 노력해서 청자를 재현했다니 장한 일이구나. 그게 경주라니, 자부심을 느낄 만 하구나 했다. 그러나, 이는 어느 먼 친척이 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주는 정도의 감흥에 가까웠다.
그 말을 휘감아 도는 중량감을 실감한 것은 2024년 봄 단석산 아래 ‘해겸도요’를 방문하면서였다. 도자기 평론을 하시는 이용범 선생(성함이 드래곤+타이거라서 앞으로는 DT 선생으로 부르겠다.)과 몇 분이 함께 방문하는 길에 어쩌다가 끼게 되었다. 경주 시내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다. 신라시대에 김유신이 여기서 검을 수련했다는 전설이 서린 단석산(800m) 아래를 지나 산내지역으로 가는 길에서 도로 아래로 살짝 난 진입로를 따라 내려오면 ‘해겸도요’가 있었다. 장작을 때는 흙가마가 두 줄 있었고, 그 옆에 작업실과 그간 만든 작품들을 모아놓은 전시실 역할을 하는 방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처마가 낮은 그 방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전시실은 ㄷ자 모양으로 선반을 둘렀는데, 온갖 모양의 도자기들이 가득했고, 바닥에 모아놓은 작품도 꽤 많았다. 일단 도자기 문외한의 눈에는 신라토기 중 국보로 유명한 기마인물상이 보였고, 달항아리를 비롯한 약간의 백자 작품들 외에는 거의 청자 계열의 작품들로 보였다. 거기에는 예전 미술책에서나 보았던 청자 매병이며, 주병, 사발, 상형청자 등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집 안에 너무 자연스럽게 늘어선 도자기를 보는 것이 약간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두어 시간 이야기를 들었다. 여전히 내 귀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잘 감이 잡히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눈앞에 이런 규모의 도자기들을 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 도자기들 사이에 앉아 있는 시간이 참으로 편안했다는 점이다. 작품의 수준을 평가할 안목은 내게 없었지만 작품들의 아우라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굳이 배우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해겸도요를 두 번째 방문한 것은 봄 시즌 가마작업의 마지막 불을 넣는 날이었다. 이곳이 다른 도요와 크게 다른 점은 10m쯤 되는 일자형 통가마에 장작으로 21일간 불을 땐다는 점이다. 지금 대부분의 도자기요에서는 전기 가마나 가스 가마를 사용하고, 그것도 하루나 이틀 정도 불을 넣는 것에 비교하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는 작업 방식이다. 3주간 불을 유지해 오다가, 마지막 날에는 불을 최고도로 높인 다음 가마를 봉하고 식을 때까지 다시 3주를 기다린다고 하니 한번 불을 넣으면 6주는 되어야 작품을 꺼낼 수 있다. 작업 방식이 이렇다 보니 현재는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불을 올린다.
마지막 (올림) 불을 넣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오후에 가서 초저녁까지 불구경을 했다. 통가마의 한쪽 끝은 큼직한 장작들을 얽어놓고 불을 넣고 있었는데, 반대편 끝에 있는 굴뚝 역할을 하는 구멍으로는 푸른색을 띠는 투명한 불꽃이 기세 좋게 올라오고 있었다. 이 날은 미리 초대받은 손님들이 와서 불이 올라오는 것을 참관했다. 멀리 어느 대안학교에서는 승합차로 한 무리의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이 행사에 참석했다. 해겸선생과 학생들이 서로 맞절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일 년에 한 번 이렇게 다녀간다고 했다.
이곳에서 나오는 도자기들, 특히 청자의 수준을 가늠할 길이 없었기에 DT선생에게 많이 물어보고, 자료들을 찾아가며 맥락을 더듬어 갔다. 이미 해겸선생의 작업은 2013년에 KBS1 TV 다큐 공감에서 "마지막 불꾼, 청자를 꿈꾸다"란 제목으로 영상화된 적이 있다. 그때부터 이미 그의 작업은 청자 재현에서 두드러지는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경주에서 5대째 도공 집안에서, 50년 넘게 청자 재현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흔히 쓰는 ‘혼신의 노력’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가 당연히 예상되는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상업용 생활도자기 제작으로 가지 않고 도자기 중 가장 힘들다는 청자 재현의 길에 매진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경상북도 최고 장인(도자기 공예)’으로 2017년에 지정되었고, 매스컴의 주목도 받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완성도에 도달한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완전하게 장악하기 위해 꾸준히 실험을 해오고 있었다.
나는 청자를 만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몰랐다. 도자기의 여러 장르 중 한 영역에 속한다는 정도의 인식에서 보자면, 취향에 따라 토기를 만들거나, 청자를 만들거나, 백자를 만들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작업의 난이도나 결과치를 놓고 보면 이것은 그런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한번 가마에 작품 100개를 넣고 굽는다고 보면, 그중에 탁월한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청자는 3-5개 안팎에 불과하다고 한다. 반면에 백자 계열은 80-90%까지 수율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려시대에 최상급 청자는 궁에서나 쓸 수 있는 최고의 사치품에 해당했고, 중국에서는 고려청자를 앞다투어 수입해 갔다. 송나라에서는 태평노인이란 사람이 <수중금(袖中錦)>이란 글에서 당시 천하의 유명한 기물들에 대한 평을 남겼는데, 거기에서 “청자는 고려청자가 천하제일이다”라고 극찬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 치면, 백자는 반도체 중에서 범용 기술을 적용해서 수율이 꽤 잘 나오는 범용 메모리 생산에 해당할 것이고, 청자는 최첨단 나노 기술을 적용해서 초고성능을 다투는 AI용 칩 생산에 해당할 것이다. 고려는 그 최첨단 기술을 갖고 당대 최고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해 냈던 것으로 보인다.
청자는 신라말 고려초 무렵에 중국에서 들어왔고, 이를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잘 발전시켜 '비색청자'를 만들어내면서 천하제일이란 평을 받는 수준에 올라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의 무신정권 시기에 접어들면서는 청자 기술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발전을 이루었는데 대표적으로 화려한 상감청자가 부안 등지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나,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청자 산업은 국가적 지원을 안정적으로 얻어내지 못하자 더 발전을 하지 못하고 정점을 지나 쇠락한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청화백자가 크게 성하면서 백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고, 경기도 여주, 이천 등지에 설립된 관요에서 고급 백자들이 주로 만들어지면서 백자의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성리학적 이상을 따른 선비들이 사치를 경계하기도 하면서 백성들도 백자를 중심으로 그릇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청자는 더 이상 전성기 수준으로 만들어지지 못했고, 오늘날의 다양한 청자 재현 노력도 고려시대의 성취에 비해 아쉬움이 많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품질이 좋은 고려시대의 청자는 매우 희귀하다. 전 세계의 도자박물관에서는 세계 도자사를 보여주려면 최고 수준의 성취도를 보여주는 청자 몇 점은 소장하고 있어야 마땅하지만 그런 작품을 확보하지 못한 곳도 많다는 이야기다.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간송미술관 등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급 청자를 보면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한편으로는 압도하는 미감을 경험할 수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국보임에도 비색이 고르지 않고 일부분은 누런 색으로 편차가 있거나, 도자기 병의 일부가 부풀어 있는 등 그 색과 형태에서 완벽한 상태가 아니다.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청자 자체가 너무나 희소한 탓에 그런 일부분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국보로서 대우를 받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청자를 재현한다’는 말은 무서운 무게감을 갖는다. 재현한 청자는 고려청자의 탁월성에 얼마나 견줄 수 있느냐로 비교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가 최고 경지였으니 그 시대의 기술과 미감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느냐가 우선적인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간다면 그런 기술을 확보한 이후에 우리 시대의 예술성을 담아낸 청자를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과제로 하는 작업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실험과 현재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과연 이런 과제를 언제쯤에나 감당할 수 있을까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해겸도요의 청자가 고려청자를 매우 높은 수준으로 재현해 냈다는 평가를 이런 맥락에서 재음미해야 했다. 과연 그러한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러면 이제 어떤 작업이 필요한가?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이런 질문에 납득할만한 답을 얻는 숙제를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