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깊은 질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하나 Nov 05. 2023

최백호|비로소 만개(滿開)하리라

My Hero

80년대에 태어난 저는 대학시절 축제 때면 학우들의 어깨를 둘러 안고 ‘영일만 친구’를 목 터지게 불렀습니다. 가끔씩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가 ‘낭만에 대하여’를 흥얼거리시는 걸 들었지요. 실제로 노래하는 모습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으면서도 그냥 그렇게 선생님은 제 마음에 ‘청춘’이자 ‘낭만’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노래 한 곡의 생명이 한 달을 가지 못하고,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가, 편지 대신 스마트폰이 익숙해진 요즘, 저는 “왜 이렇게 낭만이 없어?”라는 말을 밥 먹듯 내뱉으며, 이상하게 가을을 탔습니다. 잠깐의 반짝임만을 좇는 대신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더해지면서 점점 더 그 빛을 발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지요. 선생님이 태어난 해인 1950년엔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반세기가 지나고도 12년이 더 흐른 지금, 12년 만에 발표한 당신의 앨범이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면 그 잃어버린 낭만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ER 천윤기



감성을 잃지 않으리


‘성인가요’의 카테고리로 구분되는 선생님의 앨범이었습니다. 첫 번째 트랙이 시작되는 순간, 머리를 한 방 세게 맞은 느낌이었지요. 박주원의 기타 반주와 당신의 목소리만으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심장이 뛰었습니다. 그 열정이 이제 막 음악을 시작한 청년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통 재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뽕끼’ 넘치는 트로트도 아니었습니다. 그 목소리와 창법, 느낌과 아우라는 그냥, 당신만의 것이었습니다. 76년 본인의 데뷔 앨범에 실린 ‘뛰어’라는 곡의 리메이크였다지요. 앨범 11곡을 한숨에 내리 들었습니다. 젊은 후배 뮤지션(박주원, 말로, 민경인, 조윤성, 라벤타나, 전제덕 등)들의 연주로만 본다면 잘 만들어진 재즈 앨범 정도로 여겼겠지만, 당신의 목소리로 인해 음악의 질감이 특별하게 변했단 걸 느꼈습니다. 용기를 내주셔서, 이런 앨범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처음 뵙자마자 심상치 않은 패션 감각을 눈치챘지요. 우리 잡지에 나온 곽민석을 보고 누구냐 물으시곤 그의 신발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탁자 아래로 갑자기 발을 번쩍 들어 올리시며 “한국엔 멋진 게 없어 이 신발도 일본에서 사 온 거”라 하실 땐 조금 당황했습니다. 한국에도 멋진 스트리트 브랜드가 많으니 앞으로 많이 소개해드릴게요.


새 앨범 나오고 요즘 인터뷰 많이 하시죠? 

네. 많이 해요. 생전 처음이에요. 신인 때 첫 앨범 나왔을 때나 조금 했지. 


그때 소속사 이름이 ‘서라벌 레코드’였죠? 

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선생님 뒷조사, 많이 했습니다. (웃음) 

요즘 인터넷에 나와 있는 거 엉터리가 많아요. 왜 이렇게 해놨냐고 할까 하다가 귀찮아서 안 했어요.


수정해도 소용없어요. 이미 본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버리거든요. 

저는 인터넷이나 SNS 같은 거 안 하고, 또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어느 정도 가려져 있어야 해요. 요즘은 그게 다 없어졌어. 사람에 대한 신비감이 없어요. ‘영웅’이 없어요, ‘영웅’이. ‘전설’이 없어졌어요. 


SNS만 보면 세상에 외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 같아요. 

사람의 관계라는 게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길 해야 하는 거예요. 서로에게 가 닿아야 하는 거죠. SNS 같은 걸로 사람들이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고립되는 거예요. 우리 어릴 적, 컴퓨터라는 게 없었을 때, ‘언젠가 인간이 기계에 망할 것이다’ 하는 SF 영화나 만화, 소설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 그렇게 됐잖아요. 기계가 길을 찾아주다 오류라도 나면 완전 다른 곳에 가있게 되고.


어린 시절에 만화 많이 보셨나 봐요. 

그럼요. 국민학교 때 만화 보고 따라 그리다 그림을 하게 됐으니까. 지금도 홍대 앞에 ‘북새통’인가? 거기서 만화책 많이 사요. 어렸을 때 <라이파이>라는 어마어마한 SF 만화가 있었어요. 우리 세대는 두 부류로 나뉘지. <라이파이>를 본 사람과 안 본 사람. 이걸 본 사람은 괜찮은 놈, 이거 모르는 놈들은 상대하면 안 돼. 공부밖에 안 했던 놈들이야. 


인생의 풍류를 모르는 사람들이요? 

그렇지. 모르는 게 아니고 피해온 사람들이죠. 


선생님은 <라이파이>를 본 사람들에 속하시네요? 

나는 <라이파이>에 ‘빠졌던’ 사람… (핸드폰 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내가 그린 라이파인데… (웃음) 팬클럽에도 내가 들어가 있어요. 거기 가면 ‘라이파이’가 하고 다니는 가면 하고 두건을 줘요. 


최백호가 그린 라이파이


팬클럽 회원들이 이걸 쓰고 만나시는 거예요? 

다는 안 쓰고, 간혹 쓰고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도 썼고… (웃음) 라이파이 요새가 태백산에 있어요. 삐삐가 오면 비행기를 타고 라이파이가 나타나는데, 비행기 이름이 ‘제비호’야. 비행기 운전하는 여자 파트너 이름이 ‘제비양’이거든. 


‘007’과 ‘본드걸’처럼요? 

비슷해요. 제비양이 비행기를 운전하고, 라이파이는 줄을 타고 내려와서 악당을 무찌르곤 했는데, 정말 대단했어. 나는 그때 이게 상상의 만화가 아니라 라이파이가 틀림없이 태백산에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참 웃기는 게… 우리 딸아이가 어렸을 때 무슨 만화를 보다가 학교에서 로봇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그게 실제로 있다고 우기는 거야. 그걸 보면서 내 옛날 생각이 나서 얼마나 웃었는지… <라이파이> 연재 끝나고는 박기정 선생님의 <도전자>라는 만화를 봤어요. 여기 팬클럽에도 내가 가입했어요. 가면 다~ 내 또래야. 대학교수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화 주인공 얘기하고 그래요. 


미국 사람들이 <스타워즈> 분장하고 모여서 노는 것처럼요? 

맞아요. 사실 그게 필요해요 우리 사회는. 그런 게 너무 없어요. 중년이 되면 그런 감성들을 잃어버리잖아. 그걸 간직해야지, 잃어버리면 안 돼요. 나이가 들어도 만화를 봐야 해요.



삶의 기복에 동요치 않으리


선생님은 태어난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삼 남매의 막내로 자랐다 하셨지요.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 했으나 스무 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후, 생활고로 차라리 군 입대를 택했다 하셨습니다. 그마저도 결핵을 앓아 1년 만에 의병 제대를 하셨지요. 가난으로 고생하다 70년대 당시 불었던 통기타 붐으로 여기저기 라이브 업소가 생기는 바람에 얼떨결에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셨다죠. 선생님은 일주일 만에 다른 대형 업소에 스카웃되고, 금세 부산 시내 몇 군데 업소에서 ‘스타’가 되셨습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그때부터 느꼈노라 하셨지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다음 해 서울로 올라와 발표한 앨범에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와 ‘뛰어’가 들어있습니다. 작곡가들에게 많은 곡을 받았지만 맘에 들지 않아 부르지 않았다 하셨지요. 그때 감정이 나빠진 작곡가들은 지금도 여전히 사이가 안 좋다고. 그래서 남의 곡을 잘 안 받는다, 내 곡은 내가 쓴다, 하셨습니다. 작곡가가 중앙정보부에서 일하는 사람과 친척뻘이라는 이유로 그의 곡을 불러야만, 가사를 자르고 중간을 드러내야만 심의가 통과되는, 살벌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울며 겨자 먹기로 앨범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엉성하고 찝찔한 미완의 노래 ‘입영전야’를 선생님은 작년에 다시 불러 발표하셨지요. 온전한 제 모습을 갖춘 곡으로요. 77년의 ‘입영전야’가 2011년에 다시 태어나기까지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근사한 반백의 신사가 되셨습니다.


앨범 내기 전에 노래나 음악을 배운 적은 없으셨죠? 

그럼요. 그저 앨범 하나 낸다는 거 자체에 흥분되고, 매 순간마다 긴장되고 좋았어요. ‘노래를 어떻게 해야겠다’가 아니라 스튜디오 안에서의 즉흥적인 느낌으로 불렀어요. 지금도 나는 노래를 매번 똑같이 부르질 못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개성이 없어요. 우리 세대는 직접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게 전부였지, 선생도 없었고 배운 적도 없었잖아요. 그런 점들이 더 다양한 개성을 만들어냈지. 그래서 우리 때 좋은 가수들이 많이 나왔어요. 조용필, 나훈아, 송창식… 요즘은 노래도 목소리도 창법도 모두 비슷비슷해요. 노래는 대학에서 배우면 안 돼요. 배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선생의 냄새가 배거든. 가수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으로 색깔을 내야 해요. 


데뷔 앨범이 크게 히트했어요. 

그 해에만 8만 장이 팔렸으니까. 전축 있는 집도 얼마 없던 시절인데 8만 장이면 어마어마한 거였어요. 섭외 전화가 하도 많이 와서 하숙집 아주머니가 전화 한 대를 따로 만들어주실 정도였지. 내가 있던 레코드사에 좀 이따 정태춘이 들어오고, 산울림도 들어오고. 그런데도 돈은 하나도 못 받았어요. 그 바람에 하숙비 3~4개월 치를 밀렸어요. 그러다 나는… 돈을 많이 주는 레코드사로 갔지. 지금으로 따지면 1억 정도 되는 돈을 받았던 거 같애. 돈이 하나도 없다 1억이 생기니 어쩔 줄을 몰랐어요. 은행에 계좌를 열어서 저금하는 방법도 몰랐어요 나는. 세상 물정을 잘 몰랐지. 그때 그 돈을 하숙집 이불 밑에 넣어놓고 조금씩 꺼내 썼어요. (웃음) 


가요계 분위기도 지금 하곤 많이 달랐겠어요. 

선후배 관계가 확실했어요. 같이 만날 시간도 많았고. 지금은 그런 게 다 없어졌지. 사실 그 책임의 반은 방송국에 있어요. 일본에선 신인이 나와 아무리 빅히트를 쳐도 신인은 신인이에요. 방송국 연말 가요제에 아무리 톱스타라고 하더라도 신인이 제일 먼저 나오고 연륜 있는 중견 가수들이 맨 나중에 나와요. 가수왕은 10년 이상 꾸준히 활동하는 사람을 줘야지. 새까만 신인을 자기네 방송국 가요제 나왔다고 시청률 올린다고 상을 주면 체계가 틀어져요. 


요즘은 후배들과 같이 무대에 설 기회가 거의 없으시죠? 

작년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이적이랑 공연한 적이 있었어요. 알리와 공연한 적도 한번 있고. 공연 끝나고 뒤풀이하면서 되게 친해졌어요. 요즘은 흔치 않은 기회지. 방송사나 공연기획사들이 중견가수를 대우해 주면 후배들도 자연스럽게 선배들을 존경하게 돼요. 방송사가 대우를 안 해주니 후배들도 우습게 알지. 이 사회 자체가 어른에 대한 대우가 없어요. 전설, 영웅이 없는 사회예요. 나이 든 사람들이 잘 나가야 돼. 앨범을 꾸준히 내고, 앨범도 많이 팔리고, 콘서트도 하고, 활동을 해야 해요. 그래야 후배들도 선배를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되지.


젊은 친구들은 오히려 보고 따를 수 있는, 말 그대로 ‘아이돌’이 없단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맞아요. 그런 활동을 보여주는 선배들이 많지 않죠.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 송창식 선밴데, 얼마 전에 새벽까지 술 마시면서 이런 얘길 했어요. 형이 자꾸 앨범도 내고 활동도 해야 한다고. 


그래도 선생님은 7, 80년대부터 쌓아온 명성이 있으셨잖아요.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요즘은. 경력이나 연륜에 대한 인정이나 존중이 없는 사회니까. 대부분의 중견가수들이 체념하죠.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은 매일 술이나 마시죠. 밤에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 부르고. 


선생님도 80년대 말까지 1, 2년에 한 번씩은 앨범을 내셨어요. 그러다 공백이 있으셨고요. 

계속 음악을 했는데 ‘영일만 친구’ 이후로 앨범이 하나도 안 됐어요. 그래서 미국에 이민도 갔었고, 부산에 내려가 한 2년 지내고. 음악을 거의 포기했었어요. 가수들은 인기가 떨어지면, 거기서 발생하는 현상들이 주는 인간적인 모멸감이 상당해요. 클럽에 가서 노래를 하면 100만 원을 받는데, 어느 날 갑자기 50만 원만 받으라는 거야. 그만두라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기분이 나빠요. 자존심도 상하고. 방송도 계속하다가 어느 날부터 점점 전화가 줄어들면서 일이 끊겨요. 그럴 때 세상으로부터 드는 소외감 같은 건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인기가 올라갔다 떨어지는 순간을 견뎌내기가 힘들겠네요. 

아주 큰~ 힘이 절벽 위에서 멱살을 쥐고 있다 확 놔버리는 느낌이지. 정말 비참해요.



낭만에 대하여


LA 한인방송국이 생기면서 디제이 자리를 약속받고 떠난 이민길이었지요. 그마저도 2년 만에 문을 닫아, 가족을 미국에 남겨두고 홀로 한국으로 돌아와 하루 일곱 군데 밤무대를 돌며 노래를 했다 하셨습니다. 가수들이 노래하다 마이크를 관객들에게 돌리는 건 하기 싫어서라고, 네 군데 업소를 돌고 나면 그다음부턴 노래가 안 나온다 하셨지요. 그게 너무 싫었다고. 그렇게 1년을 뛰어 가족들을 다시 품으셨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시던 마음은 가수였을까요, 가장이었을까요. 음반사 계약금이 1억이나 됐던 인기 최고의 이십 대 청년이 마흔 중반이 되어 쓴 노래가 바로 ‘낭만에 대하여’였지요. 한낮에 집안 거실에 앉아 설거지하는 아내를 보며 읊은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로 시작된 노래였습니다. 삶이 고달플수록, 현실이 팍팍할수록 선생님도 잃어버린 낭만을 찾고 싶으셨나 봅니다. 선생님이 그 노래를 쓰실 때쯤, 나의 아버지 또한 그러했을까요. 지금은 불후의 명곡이라 불리는 ‘낭만에 대하여’는 사실 발표 이후 1년 반 동안은 아무 반응이 없었지요. 어느 날 갑자기 몇 만 장씩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목욕탕집 남자들>에 나온 날부터였습니다. 그렇게 팔린 앨범이 35만 장이었다죠. 당신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렇듯, 삶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모든 우연과 기적이 이어진 순간들의 합이라고. 


‘낭만에 대하여’로 많은 변화가 생겼나요?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나에게 그런 노래가 생기리라곤 꿈도 안 꿨어요. 음악 생활뿐만 아니라 내 삶 자체가 바뀐 거죠. 그 노래 때문에 지금까지 라디오(<최백호의 낭만시대>) 디제이도 하는 거고, 17년 동안 잘 살고 있어요. 정말로, 고맙죠.


목소리는 어떠세요? 

신인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예전보다 지금 노래를 훨씬 잘합니다. 옛날엔 노래를 참 못했어요. 노래의 맛을 몰랐다고 할까요? 자신감도 없었고, 건강도 별로 안 좋았고. 10년 전부터 채식 위주로 식생활도 바꾸고, 담배도 끊었어요.


젊은 친구들은 나이가 들면 목소리든 노래든 당연히 더 안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노래 실력도 앞으로 더 좋아질 거고, 더 좋은 노래를 쓸 거라 생각해요. 마흔 중반에야 ‘낭만에 대하여’를 썼는데, 칠십이 되면 더 기가 찬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사실이에요. 더 멋진 가사를 쓸 수 있을 거예요. 삶을 더 겪으면서 세상이 좀 보이겠지.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틀림없이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런 기대와 자신감이 있어요 정말로.


그림도 그리시잖아요. 얼마 전 개인전도 하셨고요. 음악과 그림의 표현 방법에의 차이가 있을까요? 

미술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거죠.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사람들이 그걸 보고 생각을 얻어가는 거예요. 하지만 음악은 하나의 언어예요. 대화의 방법이죠. 혼자 떠드는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선생님은 음악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계세요? 

콘서트를 하면서 그런 걸 많이 느끼죠.


음악은 반드시 듣는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거네요? 

당연하죠. 절대 음악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관객이 필요 없으면 이불 뒤집어쓰고 혼자 노래하는 게 낫지, 굳이 앨범을 낼 필요가 없어요.


오랜 시간 직접 곡을 쓰다 보면 비슷한 곡이 계속 나온다던가 하는 경우는 없으세요? 

나는 가사를 먼저 쓰고 곡을 붙이는데, 특별히 음악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장르를 하겠단 사람이 아니어서 가사 내용이 약간 ‘뽕짝’ 느낌이 나면 트로트로 가고 그래요. ‘낭만에 대하여’는 가사 느낌에 탱고가 어울리겠다 해서 그렇게 간 거고, ‘영일만 친구’는 그 시절의 록 느낌으로 간 거고. 물론 가끔씩 매너리즘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죠. 근데 이번 앨범 작업하면서 그동안 내가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현 방법이나 가사나 멜로디를 만나서 좋았어요. 새 앨범 준비하면서 내가 아주 공부를 많이 했어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역할을 내려놓으시고 가수로서 노래만 부르셨어요. 오랜 시간 굳어진 선생님만의 단단하고 정제된 음악 세계나 고집이 있었을 텐데 그런 부분에선 힘들지 않으셨어요? 

모든 걸 내가 다 하다가 후배들에게 맡기고 노래만 하려니 처음엔 많이 힘들었어요. 이해를 못 하겠는 부분도 있었고. 앨범을 준비해 가는 과정에서 그런 면에서 나 스스로 변화된 부분이 많아요. 내가 가진 한계나 문제점들을 많이 봤어요. 내가 어떤 게 모자라는구나, 공부를 더 해야겠구나 생각도 하고. 다음에 곡을 쓰면 훨씬 더 좋은 곡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기고. 


사실 선생님 입장에선 굳이 새로운 시도나 모험을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나는 지금까지 꾸준히 음악을 해왔어요. 앞으로도 끊임없이 해야 돼요. 가수는 새 노래가 없으면 끝이에요. 그게 알려지고 안 알려지고를 떠나서 새 노래를 만드는 자세가 없으면 끝이야. 정신이 죽어버리는 거예요. 앞으로도 끊임없이 곡을 만들 거예요. 사실 이번 앨범에 들인 제작비를 건지긴 힘들 거야, 아마. 레코드사 대표가 다음 앨범을 안 만들어주고 도망갈지도 몰라요. 그래도 나는, 계속 노래를 만들 거예요. 


선생님 노래엔 사계절이 다 들어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 인생에서 지금을 계절로 표현하면 언제쯤인 것 같으세요? 

음…… 나는 아직, 가을이 오기 전이라고 하겠어요. 늦여름. 아직 수확할 게 많이 있어요.                                                                                                             



다시 길 위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EBS <스페이스 공감> 녹화 공연장에 선생님을 따라갔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CD와 유튜브 영상으로만 보고 기사를 쓰고 싶지 않았거든요. 관객석엔 나란히 손을 잡고 온 엄마와 딸도 보였고, 오붓하게 팔짱을 낀 중년의 부부도 보였습니다. 선생님의 공연이 시작됐지요. 재즈곡으로 리메이크한 ‘보고 싶은 얼굴’을 부르시는데 ‘허-’, ‘황-’, ‘한-’, 이라는 음절을 소리로 뱉어내실 때, 그때 제 마음이 탁 내려앉았습니다. 그 소절 하나만으로, 노래는 기술로 부르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느꼈지요. 억지로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닌, 당신만큼의 시간과 인생이 쌓여야만 가능한 표현이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큰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에게 90도 허리 숙여 꾸벅 인사를 하셨지요. 관객들의 박수와 무대의 소중함이 얼마나 절실하실까요. ‘존경하고 좋아하는 뮤지션’이라 직접 소개하신 말로와 ‘아들뻘 되는 뮤지션’이라 소개하신 박주원과 한 무대에서 노래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졌던지요. 집시 기타와 콘트라베이스만으로 편곡해 넉넉하게 비워둔 여백을 선생님 목소리만으로 채운 ‘낭만에 대하여’를 듣다 결국 울어버렸다면 제가 호들갑 떠는 걸까요. 선생님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 제가 찾고자 했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절로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선생님도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셔야 하지만 저 또한 선생님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천천히 빛을 내기 시작한다는 것을. 선생님, 이 말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낭만에 대하여’라는 근사한 애창곡을 갖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아버지가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노래들, 술 한 잔 하실 때면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들, 많이 만들어 주실 거라 믿어요. 선생님은 저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영웅이세요.



F.OUND magazine, December 2012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Behind Story


2021년의 수작, 드라마 <괴물> 첫 화 엔딩이었다. ‘어어~~~~~’ 가사도 없이 허공으로 내뿜은 탄식이 노래가 되었다. 이 멋진 드라마가 음악을 제대로 만났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백호였다. <괴물>에선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 역시 대사로도,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로도 여러 번 등장한다. 같은 해 방영했던 드라마 <나빌레라>에서도 최백호의 ‘바다 끝’이 여러 사람들을 울렸다. 세상은 10년을 돌아 다시 한번 최백호의 목소리를 찾는다. 나는 10년 전 인터뷰로 최백호를 만났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고 흘러간 노래의 주인공이라 생각하던 때였다. 그 당시 나는 부쩍 내 삶에서 지분을 잃어가는 ‘낭만’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낭만에 대하여’ 같은 가사를 쓰는 사람의 삶은 어떨까, 궁금했다. 운명이었는지 그가 오랜만에 새 앨범 <길 위에서>를 발표했다. 이삼십 년 차이나는 젊은 후배들과의 작업이었다. 인터뷰 자리에 나타난 그는 내가 다니는 잡지를 들춰보며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에 해박한 지식과 관심을 드러냈다. <스페이스 공감> 녹화장까지 쫓아가 그가 노래하는 걸 생전 처음 봤는데 사람이 몸을 악기로 쓰는 게 바로 저런 거구나, 했다. 이듬해 그가 서울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걸 봤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이었고 기타리스트 박주원이 ‘낭만에 대하여’를 집시 기타로 편곡해 연주했다. 그리고 최백호가 목소리를 얹었다. 이십 대 친구들이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최백호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는 게 보였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with  박주원)


그런 게 바로 삶의 ‘낭만’이었다. 그리고 나는 잡지사를 옮긴 후, 최백호를 한 번 더 인터뷰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 깊은 울림으로 세상에 위로를 건네는 가수가 드물기 때문이었다. 제발 계속해주세요, 당부이기도 바람이기도 했다. 녹록지 않은 삶에서 먼저 견디고 지키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위안이 되는 것도 없다. 여전히 최백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어 행복하다. 우리는 행복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