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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Dec 04. 2023

장사익|혼으로 노래하는 시대의 가인

The maestro of the era


지난 5월, 소리꾼 장사익의 공연을 본 에디터는 오랜 후유증에 시달렸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을 가득 품고, 깊이 고개 숙여 천천히 인사하는 그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노래 한 가락을 마치고 난 그의 눈가엔 눈물이 일렁거렸고, 그러고 나서도 그는 아이 같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또 한 번 90도로 허리를 굽혀 관객을 향해 인사를, 아니 절을 했다. 관객도, 에디터도 그와 함께 울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서 빠져나가는 듯 묘하게 울렁거렸다. 그의 노래는 정해진 박자 없이 한 호흡으로 연결된 바람 같았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뻥 뚫어 놓고는, 또다시 그 자리를 깊게 훑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 그의 노래와 목소리, 눈물과 웃음에 먹먹해진 가슴이 이내 시원해지는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 감동과 마력을 전해 받은 사람들은 또다시 장사익을 무대에 서게 하고, 노래하게 한다. 세상의 사람은 이렇듯 하나의 호흡처럼 연결되어 있다. 마흔여섯에 노래를 시작해 환갑이 넘은 지금까지도 혼을 부르는 이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와 같이.


EDITOR 조하나 PHOTOGRHAPER 김희언


장사익 '봄비'




인터뷰를 청하는 편지와 지난 파운드 매거진 몇 권을 챙겨 장사익에게 보냈다. 며칠 후 에디터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 구수하고 느릿한 충청도 사투리의 어르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장사익이라고 합니다. 책과 함께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 보고, 너무 감동해 이렇게 전화드려유. 시간 되실 때 우리 집에 들러 차나 한잔해유.” 인왕산 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는 홍지동 마을 끝자락, 장사익의 자택에 들렀다. 바람이 머물러 풍경 소리를 내고, 새가 앉아 울며, 들꽃이 피고 지는 모든 자연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원하게 쏟아붓던 장맛비가 잠시 쉬는 틈을 타, 살짝 얼굴을 내민 산꼭대기의 와불(臥佛)상을 카메라로 찍어 보여주며, “이렇게 그분이 오셨으니, 참 좋은 날 오신 거다” 말을 건넨 장사익은 “천천히, 여유 있게”라는 말이 담긴 말간 찻물을 내리기 시작했다.




감사하지, 복(福)이지


이곳에 터를 잡으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한 10년쯤 됐나? 자, 녹차 한 잔씩들 해요. (찻잔을 들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차(茶)가 참 좋아. 커피는 뜨겁게 타서, 뜨겁게 마시잖아. 차는 끓인 물을 적당히 식혀야 하지. 잔도 따뜻하게 덥히고, 찻잎이 적당히 우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혀. 천천히 여유롭게, 천천히. 나야 이렇게 폼 잡는 거지만, 차가 스님들헌텐 공부여 공부. 차를 많이 드시면 몸이 깨끗해져. 몸 안에 불순물이 빠져나가면서, 마음도 정화가 되고 그래.


경치가 정말 좋아요. 저절로 ‘소리’가 나올 정도네요. 

그렇지, 복(福)이지. 여기 있으면 사계절을 다 보고, 느끼고 할 수가 있어. 요새 젊은 친구들, 휴대폰 하나 들고 다니면서 변소에서도 보고, 버스 안에서도 보고 그러지? 딱 휴대폰 크기만큼만 세상을 보는 거여. 옆에 누가 있는지, 저렇게 산봉우리에 부처님(臥佛)이 오신 줄도 모르고, 봄이 왔는지, 꽃이 피는지도 모르고… 큰일이다, 큰일.


저희도 여기 오면서 휴대폰으로 길 찾다가 엉뚱한 곳에서 헤맸어요. 

차 가지고 오는 사람들은 여기 와서 이 좋은 풍경 보다가도 집에 돌아가는 길엔 또 내비게이션부터 켜. 버릇이여 버릇. 옛날엔 그런 거 없이도 다 길 찾고 잘 다녔어.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면서. 요즘은 기계가 알려주는 대로 뺑뺑 돌고, 틀린 걸 알려줘도 그게 맞는 줄 알고 따라다니지. 애기들은 공부도 안 혀. 컴퓨터가 다 해주는데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우리 땐 여기저기 찾아 댕기는 그것 자체가 공부였는디. 요즘은 마음도 점점 없어지고, 문제가 많어. 나는 지금도 차가 없어요. 지하철 타고 다니다가, 역에서 계단을 만나면 아이고, 얼마나 고마워. ‘운동할 시간을 주시네’ 하고 고맙게 올라가는 거지. 좋잖아요, 늘 감사하게 생각해야 돼.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건강해야 세상일을 할 수가 있는 거여.


운동 따로 하세요? 

내가 개발한 게 있지. (웃음) 아침에 눈 뜨면 혼자 이부자리에서 맨날 혀. 이불 위에 엎드려서 눈을 계속 누르면서 배를 바닥에 쭉 깔고 발바닥을 300~400번씩 마주치고, 비비고, 돌리고. 허리도 쫙쫙 펴고. 그러고 나서 무릎 꿇고 앉아서 여기저기 움직이고, 비틀고. 이러면 1시간 30분이여. 맨날 혀, 맨날. 운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마음의 짐이잖어. 일어나는 게 제일 힘들어, 그쵸? 운동이라고 생각 않고 하는 거여. 얼마나 재미있어.




지나 보니 꿈꾸던 시절


선생님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주세요. 

충남 홍성군 광천읍이 내 고향이여. 중학교 3학년까지 고향 살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왔어. 내가 일곱 형제 중 누이 다음으로 장남이어서 어려운 형편에 엄마 아부지가 공부시키려고 서울까지 보내줬지. 그때가 박정희 정권 때라 국가재건에 ‘으샤으샤’ 하는 분위기였어. 공부시켜 준 엄마 아부지 때문에 그때는 은행원만 돼도 소원이 없겠다 했었어. 은행원이 최고인 줄 알던 시절이니께.


그래서 은행원이 되셨나요? 

상고 마치고, 보험 회사에 취직혔지. 다음에 은행 시험을 보긴 했는데, 떨어졌어. (웃음) 보험회사 3년 다니다가 군대 갔다 오니까 회사가 바뀌어버렸더라고. 복직도 안 되고. 그래서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녔어. 그때부터 수난이 시작됐지. (웃음)


일이 잘 안 풀리셨군요. 

내가 능력도 없고, 적응도 잘 못하니께, 여기저기 전전하며 참 힘들게 살았지.


어떤 면에서 직장 생활에 적응을 못 하셨어요?

충청도 말에 ‘자발없다’는 말이 있어. 차분하지 못하고, 가볍다 이거지. 금방금방 싫증 내고 짜증 내고, 진득하니 뭘 잘 못했어. 지금 보니까 열댓 군데 직장을 전전했던 이유를 알겄어. 그땐… 내가 꿈이 많았던 거야.


꿈이 없었던 게 아니라, 꿈이 많았기 때문이라구요?

그렇지, 꿈이 많아서 현실에 적응을 못 한 거야, 꿈꾸느라고. 새가 하늘을 날 생각을 하지, 땅바닥에서 뭘 쪼아 먹으려고 하나? 직장 다니면서도 내내 엉뚱한 생각만 하는데, 일이 잘될 리가 있나. 이상과 현실이 평행선처럼 만나질 못하고, 이게 서로 어울릴 수도 없어. 하나를 택하면, 나머지는 버려야 하는 거여. 근데 나는 무엇 하나 버리지도 못하고, 꿈만 꾼 거지. 음악도 하고 싶다 생각했다가, 돈도 벌고 싶다 했다가. 그렇게 불나비처럼 쏘다니면서 허송세월 많이 했지.


꿈꿀 때 행복하셨어요? 

그땐 내가 꿈꾸고 있다는 생각을 못 했지. 지금 와서 보니까 ‘그게 꿈이었구나’ 하는 거여. 그땐 ‘내가 왜 이리 무능하고, 세상에 적응을 못 하나’ 자책만 혔지. 말이 그렇지, 25년 동안 열다섯 군데 이상 직장을 전전한다는 건 정말 챙피하고 웃기는 거여. 결혼해서 가정도 있는 사람이. 와이프도 힘들었고,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었어. 나중엔 일할 때가 없어서 빌빌거리다가 매제가 하는 카센터까지 가서 일을 혔어. 손님 상대도 하고, 파킹도 해주고, 차 고친 거 가져다주고. 그걸 한 3년을 했지. 밥만 겨우 벌어먹으려고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혔어.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이러려고 세상에 나온 게 아닐 텐데’ 했지.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를 찾아보자, 그래서 마지막으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걸 딱 3년만 해보자’ 하는 생각을 혔어. 내가 뭘 하고 싶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취직도 아니고, 아주 소박한 거, 태평소 부는 거였던 거여. 바로 카센터를 그만두고 태평소만 했지. 1993년, 나이 마흔여섯에.


왜 하필 태평소였어요? 

내가 유일하게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게 그거 하나였어. 어렸을 때 농악 하시던 아부지랑 아부지 친구분들한테서 들었던 그 소리가 고향 떠나 객지 생활하면서 계속 생각났거든. 태평소는 사물놀이에도 없어. 이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악기여. 거기에 내가 목숨을 건 거지.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이 악기를 열심히 해서 밥만 먹을 정도로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자 했지, 광대처럼. 잘된다는 보장도 없었고,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사물놀이 하는 친구들한테 “시켜만 줘~” 해서는 ‘오늘 배운 이 가락, 내일 써먹어야겠다’ 하면서, 그렇게 살았어.


행복하셨어요? 

그럼, 행복했지. 태평소 소리가 얼마나 크고 찌렁찌렁한데. 이건 호흡으로 부는 악기여. 전체적으로 벌어지는 판을 보고, 즉흥적으로 부는 것이지. 마치 재즈같이. 태평소 불면서 내가 즉흥적인 게 많이 늘었어. 그때가 잠실에 살 때였는데, 1월 한창 추울 때 고수부지 토끼굴에서 장갑 끼고 매일 밤 태평소 연습을 혔어. 밤에 태평소 소리가 나니까, 사람들이 어찌나 무서워하던지. (웃음) 그때 정말 죽을힘을 다해서 혔어. 정말 치열하게 살았지. 그전까지 나는 지난날을 돌아보고 반성할 때 ‘나 열심히 살았는데…’ 가 아니라, ‘한다고 했는데…’ 했거든. 형식적으로 산 거였지, 죽을힘을 다해서 산 게 아니었어. 죽을힘을 다해 살기 시작하니, 몸은 힘들고 생활은 고단혀도, 마음은 행복했지.



누구나 인생에 꽃피는 순간은 온다


태평소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는데, 노래하는 소리꾼이 되셨네요.

93년부터 ‘3년만 해보자’ 해서 하던 일 다 그만두고 태평소만 2년째 하고 있는데, 그해부터 시만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노래가 툭툭 튀어나오는 겨. ‘찔레꽃’, ‘국밥집에서’ 같은 곡들. 농악 공연 마치고 뒤풀이에서 그걸 슬슬 불렀는데, 그걸 친구들이 막 좋아하는 겨. 애들이 객기 어린 소리로 “너 노래 잘하니, 가수 데뷔 한번 해봐” 해서 그해 말에 홍대 조그만 극장 무대에서 노래를 한번 불렀지. 그동안 내가 흥얼거리던 거 딱 한 번 한 거여. 근데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내 길을 드디어 찾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딱 한 번일 줄 알았더니, 그게 지금까지 온 겨. 이렇게 빙~ 둘러서 온 겨. 25년, 시간의 길을 거쳐서 찾은 겨. 세상 사람들 중에 세상에 나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평생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겄어?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다 제 길을 찾는 거거든. 아, 내가 그동안 이렇게 길을 닦아온 거였구나. 내가 꿈만 꿨던 거, 가수될까 가요학원 잠깐 다닌 거, 회사 다니면서 취미로 국악 배운 거, 그게 다 내가 노래하는 길로 가려고 거친 길이었구나. 음악에 대한 끈을 엄마 탯줄처럼 내가 한시도 안 놓고 있었던 거여, 그때 당시 나는 그걸 몰랐지만. 현실을 벗어버리고 태평소 불면서, 꿈을 더듬다가 결국 길을 찾은 거여. 근데 이것이 허황되고 욕심 된 것이 아니라, 아주 보잘것없는 소소한 거에 뜻을 두니까 큰 것이 뒤에 숨어 있던 거여. 처음부터 내가 ‘가수가 되겠다’ 했으면 아마 안 됐겄지.


선생님 자신의 행복을 위한 소박한 꿈이었는데 말이죠. 

그게 바로 가벼워지고, 버리는 거여. 겨울에 나무가 잎사귀 다 버리고, 그 추운 겨울에 홀몸으로 탁 서 있잖아. 요즘 사람들은 여름엔 훌렁훌렁 벗고 겨울엔 껴입고. 주체를 못 하잖아, 몸이 무거워서. 욕심을 버리니까 길이 보이더라구. 저기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바로 뛰면 거기가 길이지, 길이 저기 멀리 있는 거 아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이, 글 쓰는 사람은 글이, 그런 게 바로 세상 사는 이유 아니겄어? 내가 이 세상에 뭐 하러 나왔지? 내 인생에 꽃을 피웠나? 그러다 길을 찾는 거여. 마음을 버리고, 비우고, 아주 소소한 거에 지극정성으로 열심히 온 힘을 다하다 보면 길이 보이는 겨. 나는 살아가면서 그걸 터득했어, 고맙지.


1994년, 홍대 극장 무대에서 처음 노래 불렀을 때가 선생님의 꽃이 피기 시작한 때인 거네요? 

그렇지. 국화꽃은 지금 안 펴. 찬 서리 끼고 추울 때 핀단 말여. 목련은 성질이 급해서 겨울부터 몽우리 져 있잖여. 봄 되면 제일 먼저 피고, 또 제일 먼저 떠나가지. 사람도 다 때가 있는 법이여. 살면서 꽃이 피는 순간은 누구나 있어, 노력만 하면. 아직도 고향 사람들은 내가 노래를 젊었을 때 더 일찍 시작했으면 팔자 고쳤을 텐데 하는디, 나는 내가 일찍 안 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혀. 내가 일찍 노래 불렀으면 아마 지금 같은 노래들을 못했겄지. 유행가나 부르고, 거기에만 머물렀지, 지금처럼 나름대로 깊고 넓은 노래들을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앨범으로 데뷔하실 때, 선생님 노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걱정 안 하셨어요? 

내 음악에 대한 정체성은 나도 몰라. 그냥 내가 즉흥적으로 만들어 흥얼거렸던 노래들을 한 건데 사람들이 좋아하더라 이거여. 시조 같다는 사람도 있고. 노래가 안 될 때는 어거지로 음표를 만들어서 할 필요 없이, 그냥 읊조리면 되는 거여. 그래도 노래가 될 수도 있어. 남들은 4분의 4박자라면 그 박자 계속 맞춰가야 하는지 알지만, 나는 안 그려. 내 노래는 부를 때마다 달라. 어떨 땐 뮤지컬처럼 이야기도 나오고, 판소리처럼 소리도 지르고, 갑자기 추임새도 나오고, 합창도 하고, 춤도 추고. 나는 음악을 해체해서 오페라나 뮤지컬, 판소리 형식같이 편하게 한 거여. (그러다 선생님은 갑자기 ‘찔레꽃’ 한 자락을 뽑았다.) 이렇게 흘러주고 땡겨주고, 노래가 재미있잖여.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발갛고, 겨울은 나뭇잎 다 떨어지고.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는데 그게 바로 자연의 호흡이여. 서양 음악은 비트잖어. 메트로놈처럼 똑딱똑딱, 똑딱똑딱. 그 박자 틀리면 난리 나는 거여. 정확하지, 아주. 난 그걸 깨부쉈단 말이지, 자연의 호흡처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게 노래야 뭐야, 국악도 아니고 유행가도 아니고’ 하지. 당연하지. 따라 부를 수도 없고, 듣기에도 거북하고. 근데 10년이 넘다 보니께 사람들이 이제 내 노래의 호흡을 아는 거여. 내가 외국 가서 공연하는 것도 다 이런 실험을 하는 겨. 우리가 팝송들을 때 가사 알고 듣나? 클래식은 가사도 없고, 정서도 우리랑 안 맞잖아. 근데 뭐가 있어? 베토벤이 이야기하는 죽음과 삶, 100을 표현한다 치면, 몇 번 듣다 보면 그중에 한두 개는 나한테 오게 돼 있어. 아무리 우리가 잘한다 그래도 밥만 먹고 블루스, 알앤비하는 서양 애들은 못 따라가. 걔들이 못하는 걸 해야지, 된장 냄새 펑펑 나는 거. 그렇다고 고리타분한 게 아니라, 새롭고도 보편타당하게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거, 그게 생명력인 거지. 남에 거 따라 하고 베끼지는 말아야 혀.



하루도 쉬지 말고 짓고 쌓아라


마흔 중반 데뷔 후,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활동하시면서 목소리에 대한 부담은 없으신가요? 

당연히 부담감도 있고, 힘도 빠지고, 여러 가지로 열악해지지. 내 나이가 환갑이 넘었는데 옛날 같지 않은 건 당연하지. 하지만 난 더 흥미롭게 가고 있어 점점. 10년 후에 내가 70대 중반인데, 그땐 내 목소리가 어떻게 날 것인가,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기대하고 있어. 그땐 지금처럼 테크닉으론 못 가더라도 연륜으로 가는 거지. 춤추는 사람들이 늙으면 열 번 움직일 거 천천히, 한 번만 흔들어도 춤이 돼. 아니, 그냥 딱 서 있기만 해도 춤이 되지. 노래하는 사람도 가만히 서서 읊조리기만 해도 노래가 될 수 있는 겨.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 할아버지들처럼.


노래에 대한 선생님의 철학은 뭔가요? 

노래할 때 까불지 않고, 진지하게, 열정적으로,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 하지만 음악이라는 건 그렇게만 해서 되는 게 아니야. 노래라는 것은 살살 불러도 인생과 자연, 삶이 녹아나야 하는 거여,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여. 지금 사람들은 형식만 가지고 난리를 치제. 누가 베토벤하고 모차르트를 싸움 붙이겄어? 비교하고 등수 매기고 그럴 게 아니여, 음악은.


나이가 들면서 능력이 줄어든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그건 줄어드는 게 아니여. 더 늘어나. 사람들은 그걸 몰러. 우린 모두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나를 봐, 내 한 몸 주체도 못 했는데, 노래를 하다 보니 책임이 커지고, 앞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 고민도 하게 되는 겨. 옛날엔 몰랐던 내 능력이 끌어져 나오는 거여. 한번, 두 번 하면 실력이 어느새 이렇게 늘어. 노래도 처음엔 트로트만 하다가, 이리저리 해보고 고민해 보고 하니 새로운 창법이 나오는 겨. 그렇게 나도 몰랐던 내 능력이 자꾸 계발되는 거여. ‘난 안 돼, 난 아니여’ 이런 생각 말고, 하루하루 내 인생에 벽돌 하나 놓듯 산다 하면 언젠가 꽃이 피는 겨. 나도 직장 생활하면서 노래 배우고, 국악 배우고 했던 모든 것이 노래라는 집을 짓기 위해 하나씩 벽돌을 쌓았던 거라는 걸 인제야 알았어. 뜬금없이 아무나 보고 “야, 너 가수 해!” 하면 되남?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근데 알고 보니 나도 모르게 어렸을 적부터 웅변하느라 발성 연습도 하고, 아버지 장구 소리, 태평소 소리도 듣고, 사회생활하고, 군대도 가고. 이 모든 것이 노래를 하기 위한 벽돌이었던 겨. 집 짓는 동안은 모르지. 내가 어떤 걸 짓고 있는지. 사람은 하루하루 뭔가 하나씩 짓고, 쌓아야 해.


선생님은 노래 말고, 10년 동안 하고 계신 거 없으세요? 

내 홈페이지랑 공연 포스터, 앨범에 들어가는 글씨 모두 내가 직접 쓴 겨. 한글 흘림체를 시작한 지 7~8년쯤 됐는디, 첨엔 장난 같고 낙서 같고 그랬지. 10년 가까이 되니, 이제 사람들이 나한테 글씨를 써달라고 그려. (웃음)


노래는 어떻게 만드세요?

맘에 닿는 시가 보이면, 그냥 혼자 멜로디를 붙여서 녹음하지. 난 악보 못 그려. 그래서 난 ‘작곡’이라고 안 하고, ‘엮음’이라고 허지. 내 주변에 모든 걸 끌어다 굴비 엮듯 엮어서 곡을 만드니께. 알게 모르게 어렸을 적부터 들었던 여러 가락이 녹아있겠지. 우리 민요가 전부 비슷비슷한 것 같아도 다 틀려. 예전엔 다 구전이었지, 어디 악보가 있었나? 악보는 문명 발달하면서 나온 기호나 약속 같은 거여. 서울에 가는 방법에는 비행기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걸어서 갈 수도, 물속으로 갈 수도 있어. 음악을 악보도 모르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자연과 인간,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이 덜하다고 할 순 없는 겨. 마찬가지로 나도 그려. 순서는 바뀌었을지언정 나는 당당하게 악보 그리는 사람한테 녹음 파일 가지고 가서 악보 그려달라고 말하지. 그럼, 다 그려줘. (웃음)


음악을 하려면, 악보나 화성학부터 배워야 한다고 대부분 생각하잖아요. 

그런 형식에 얽매이다 보면 벌써 시간 다 가서 늙어 죽어야 혀. ‘시몬, 너는 아느냐’ 시에 운율이 있잖여. 수백 번 읊조리면서 고조 장단과 감정을 넣으면 노래가 되는 거여. 누구나 다 노래를 만들 수 있어.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


공연 예매하는 관객들에게 직접 편지와 이름을 써서 우편으로 보내신다고 들었어요. 

옛날에는 편지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쓰고 그랬는디, 지금은 너무 많아서 그렇게는 못 하고 편지 내용은 내가 한 장 써서 복사하고, 이름을 봉투에 하나하나 직접 써서 드리지. 이게 신기한 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도 처음 보는 이름을 보고 쓰는 동안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랑 나랑 교감하는 느낌이 든다니께.


공연하실 땐 항상 하얀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꼿꼿하게 서서 노래하세요. 

나도 모르게 하는 거여. 어떨 땐 손도 발도 조금 움직이고. 그래도 나는 무대 1미터 밖으로 움직이질 않아. 마이크를 만지지도 않고. 공연 2시간 30분 동안 마이크하고 나하고 둘이 팽팽하고 치열한 싸움을 하는 거지.


노래 한 곡 끝날 때마다 매번 관객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공연하는 사람과 관객과의 교감이지. 진심의 소통이여. 내가 까불면, 사람들도 까불게 들어주고, 내가 진심 갖고 노래하면 사람들도 진실로 듣는 법이지. 100을 가지고 부르면 100을 가지고 들어주는 겨. 공연하면서 내 모든 걸 보여주고, 소리를 관객에게 바치는 거지. 불교의 ‘음성공양(音聲供養)’이랑 같은 거여.


노래하실 땐 또 그렇게 우세요. 

그냥 빠져버려야 혀. 나도 모르게 굿쟁이처럼 돼버리는 겨. 내 공연이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내가 나중에 비디오를 봐도 1부에선 표정이 아주 심각혀, 웃음 하나 없어. 1부에서는 내가 노래를 하는 이유, 메시지를 주는 거여, 사람들한테. 내가 진정으로 노래하고자 하는 걸 관객들에게 드리는 거지. 이게 관객들은 힘든 거야. 박수도 못 치고, 따라도 못 부르고. 그래서 2부는 계속 까부는 거여. 2부는 유행가들로 꾸미는데, 여기서 모든 걸 풀어버리는 거지. 맺히고 풀고, 플러스, 마이너스, 결국 제로. 그래서 공연 끝나고 나갈 땐 속에 있는 걸 다 비워버리고 하얀 마음이 되는 거지. 사람들이 공연 끝나면 개운하다, 시원하다 얘기를 많이 해. 세상에 나가서 다시 그림을 그리고, 색칠할 수 있게 되는 거여.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겨. 그래서 내가 비싸. (웃음) 티켓이 10만 원이면 사람들은 10만 번을 고민허겄지. 하지만 10만 원 주고 와서 본 공연이 그 돈이 아깝지 않은 가치가 있으면 되는 거여. 요즘은 엄마 아부지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사람도 많잖아. 그러면서도 이 하찮은 대중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싶다고 찾아오는 건 엄청난 거거든. 공연 보면서 눈물 흘리고, 신나서 박수치는 건 돈 천만 원을 줘도 못 바꾸는 가치가 있는 거여. 노래의 생명력은 거기서 나오는 거여.


선생님 노래엔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 모두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세상 사는 이야기지. 젊은 친구들은 희(喜), 락(樂)만 알지만, 나는 젊은 친구들보다 더 살았고, 굽이굽이 거쳐 와 인생 구석구석, 희로애락을 모두 얘기할 수 있는 거지.


음악을 통해 인생과 자연의 섭리를 깨달으신 것 같아요. 

그렇지. 특히 내 노래는 죽음과 관련된 노래들이 많아. ‘꽃구경’도 그렇고, ‘허허바다’도 그렇지. ‘황혼길’에는 딸네 집 놀러 가듯 죽으러 가는 내용도 있고. 요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잖여. 얼마나 힘들면 죽겠냐 생각을 하기도 해.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쉽게 죽음을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 나는 거꾸로, 노래를 통해 사람들에게 캄캄한 밤을 보여주는겨. 우리가 사는 세상의 ‘죽음’을 일부러 보여주는겨.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이 희망이 되듯이, 내가 죽음에 대해 노래함으로써 결국 사람들에게 삶을 보여주는 거지. 어두운 죽음을 보여주면서 역설적으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깨닫도록. 깊은 슬픔을 씻어내면 희열 같은 게 느껴지는 법이거든.



장사익 '꽃구경'



노래를 통해 세상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 텐데요. 

노래하는 사람이건, 그림 그리는 사람이건, 글 쓰는 사람이건, 사진 찍는 사람이건, 꾸준히 노력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어. 나도 마찬가지여. 늘 마음으로도 계속 노래해야 혀. 24시간 내내 이 속에서 항상 노래를 불러야 혀. 나는 ‘세상은 살만하다’는 걸 노래로 보여주고 싶어. 열심히 살다 보면 길이 다 있게 마련이야.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도 알 수 있고. 젊은 친구들 노래도 잘하고, 만화 주인공처럼 이쁘고 늘씬하게 생겼는데, 노래의 변하지 않는 본질은 비디오가 아니고, 오디오야. 영혼을 달래주고, 흔들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지. 나는 TV도, 컴퓨터도 안 보고, 휴대폰도 안 가지고 다녀서 몰랐는데, 어느새 우리나라가 가수 천국이 돼버렸네? 휘둘려서 사는 거여. 음악에 무슨 선생이 있어? 고등학교까지 음악 시간 있었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음악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테크닉을 다 배운 겨. 노래는 누가 가르쳐 주는 게 아니여. 진짜 노래는 인생을, 자연과 삶을 어떻게 담고 있는가여. 세상에 얻어터지고, 깨지고, 넘어지고 하면서 인생과 삶, 희열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싱어송라이터가 되는 겨. 그럼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을 움직일 수 있어. 금방 스타가 되려고 하지 말어. 노래는 나이 들어 하는 거여. 지금 꾹 참고, 40~50대 가서 노래를 해봐. 그럼 되는 겨. 나같이 얼굴도 못생기고, 빌빌하고, 넘어지고 깨지고 무능한 사람도 되는데.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겨. 금방 아니야. 10년 동안 내가 쌓고, 지어야 해. 내가 TV 안 나가는 이유가 뭔데? 가수는 TV 안 나가도 먹고 살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해. 요즘 아이돌은 몇 월 며칠 누가 나온다 하면서 여기저기 홍보하고 난리인데, 그게 며칠을 가나? 유명한 애기들 이름은 나도 알지. 얼굴이랑 이름은 아는데, 걔들이 뭘 불렀는지는 몰라. 가수 이름은 있는데, 노래가 없어, 본질이 없지. 장사하는 사람들이 획일적으로 몰아붙이는 겨. 거기에 휩쓸리면 안 돼. 호랑이는 산에서 혼자 살아가는 겨. 세상의 소리를 들어봐야 노래도 하는 겨. 세상에 소리 지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힘을 키워야 되는 겨. 인생 공부를 많이 하면 그게 다 보이거든. 노래를 안 하고 무대에 서기만 해도 사람들한텐 그게 다 보이는 겨. 그런 경지까지 가려면 많은 세월, 공부하고 노력해야 혀. 노래 잘한다고 지금 까불면 금방 떨어져. 일찍 박수를 받으면 금방 끝나는 겨.


선생님 10년 후의 꿈을 여쭤도 될까요? 

10년 후면 70대 후반인디, 그때도 노래할 거여 나는. 이렇게 가늘고 길게 사는 거지 뭐. (웃음)



서른이 되어서야 꿈을 찾은 늦깎이 에디터가 마흔여섯이 넘어서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장사익 선생님을 만났다. ‘왜 나는 이리 길을 잃고 헤매나’ 생각했던 시간 모두가 지금을 만든 하나의 벽돌이 되었음을 감사히 깨달았다. 인터뷰 내내 선생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차를 따라 주고, 경치 한번 보고, 소리 한 자락을 뽑다가, 아이처럼 웃었다. 대화의 끝자락, 함께 양갱을 까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자연의 풍경에 감탄하다 나선 길, 꽃 같은 웃음이 생각나 뒤를 돌아보니 문 앞까지 배웅 나온 선생님이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우리 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됩니다. 즐겁고 슬픈 얘기를 엮어 노래를 부릅니다. 세상이 참 아름답고 살맛 납니다.” 장사익 홈페이지(www.jangsaik.com)에 선생님이 직접 써넣은 글귀다. 그는 자신의 인생으로 겪어내 깨달은 삶의 비밀을 노래를 듣는 사람들과 매 순간 나누고 있었다. 



F.OUND magazine, August 2011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Behind Story



처음 내가 장사익을 인터뷰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 의아해했다. 젊은 이들이 주로 보는, 그것도 대중 잡지도 아니고 인디 매거진에서 장사익을, 왜? 하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앞으로 10년이 흘러도 여전히 세상에 유효한 질문을 던질 거라고. 그리고 나는 그런 거대한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그릇의 에디터라고.


인터뷰를 마치고 문답 형식이 아닌 서너 시간 이상의 부드럽게 이어지는 대화를 어떻게 기사로 옮길까, 고민이 많았다. 장사익이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그의 사투리까지 모두 살렸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내용이 많아 편집장을 설득해 지면을 늘렸다. 책이 나오자 선생님은 직접 손글씨로 편지를 써 보내셨다. 진정한 어른은, 마음이 부유한 거장은 이렇게 상대에게 존중을 표하고 대접한다. 


내 젊음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십 대 후반엔 집엘 안 들어가고 부모님 속을 썩이며 방황했고, 이십 대엔 홍대 거리를 배회하며 방황했고, 삼십 대엔 사회 시스템에 속해 직장을 다니며 방황했다. 나름 자유롭다는 독립 잡지사에서 경험이 전무했던 피쳐 에디터 일을 덥석 시작해 나름 업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내 삶을 가득 메운 방황 때문이었다. 언제나 갈팡질팡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던 내가 맨몸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 마음을 열어 제각각 꼭꼭 숨겨둔 삶의 비밀을 듣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된 건 순전히 방황하는 동안 끝없이 던진 질문 때문이었다. 글을 어찌 쓰는지, 인터뷰는 어찌하는지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내가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 출간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스스로 의심하고 비난하던 못난 방황과 실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방황과 실패, 그리고 허황된 꿈이 결코 쓸데없는, 하찮은 낭비가 아니었음을 확인해 준 사람이 바로 장사익이었다. 


시대를 관통하는 혜안과 위로가 담긴 장사익과의 인터뷰 이후, 나의 인터뷰이 선정 기준은 보다 확고해졌다. 그리고 나는 보다 단단하고 뚝심 있는 피쳐 에디터로 성장할 수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인터뷰를 읽으며 여전히 잦은 바람에도 일렁이는 내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옳은 방향으로 잘 가고 있다며 스스로 안심시킨다. 지금 내가 겪어내는 모든 경험, 매일 벽돌 하나씩 올리는 마음으로 쓰는 글, 그리고 다이빙이 내 삶의 본질로 단단해질 거라고. 


10년 전 방황하던 나처럼, 흔들리고 있는 누군가에게 여전히 이 글을 권한다. 늦게 피는 국화보다 빨리 피는 목련이 되고 싶은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에서 누구든 자신만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아주 멋진 인터뷰라 자부한다. 그리고 이 인터뷰 말미에 나왔듯, 장사익 선생님은 여전히 왕성하게 노래 짓고 공연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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