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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의 이야기/슬픔보다 더한

화가 난 게 아니다

by 하루하늘HaruHaneul

화가 난 게 아니다. 녹음이 푸르르고 붉은 벽돌이 적당이 어우러진 정동에서 막 점심식사를 마치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야외에 마련된 카페 테이블에서 커피와 후식까지 아주 맛있게 먹었던 후다. 보이는 그림이 아름답다고 현실이 달라지거나 고통이 가시는 건 아니다. 순간 잊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스치는 행복을 챙겨야 하는 거니까...


장마철에 비예보가 약속을 망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를 무색하게 적당히 부는 바람과 흐린 하늘이 걷기에 완벽한 날씨였다. 운동과 재활 중인 아버지를 모시고 하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시내 나들이. 그런고로 걷기에 예쁜 그러나 조금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길을 부지런히 찾는다. 오늘은 정동길이다. 아버지의 과거 기억이 그 길에 여전히 남아있는 모든 빌딩들의 이름을 소환하고 용도까지 되뇌며 걷는 중이다. 비가 예보된 육신은 모두에게 천근만근이다. 자식이지만 이미 나이가 들만큼 들어 자가면역질환을 동반 중이고 연로한 부모는 각 각의 무거움을 안고 즐거움을 찾는 길이다.


진통제를 먹고 나선 아침, 통증이 잦아들 때면 모든 기능이 퇴화된 부모에겐 그저 천군만마다. 말하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비법을 지닌 능력자. 나의 역할이다. 고통도 불행도 비껴간 자식으로 상정된 나는 오늘도 즐거움 가득한 하루를 준비한다.


조금 걷고 근사한 점심을 먹고 정원이 있는 카페에서 후식을 곁들인다. 직장인이 비껴간 한가한 장소, 청력이 손상된 아버지와 큰 소리로 대화가 가능한 곳, 늙음이 두드러지지 않은채 근사한 한적함을 유지할 만한 서울의 한복판. 쉽지 않은 전제조건이다. 그럼에도 딸은 기가 막히게 그런 곳들을 찾아내고 하루를 만들어 낸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내가 동시에 대화를 나누는 일은 어렵지만 핑퐁처럼 이렇게 저렇게 대화가 오가며 시간이 흘러간다. 눈앞에 놓인 후식이 없어질 때쯤 피로감을 호소하는 아버지의 움직임에 따라 집으로 가기 전 화장실을 경유한다.


빈틈없이 손이 간 예쁜 화장실을 다녀오신 아버지를 대신해 뒤처리는 나의 몫이다. 남자 화장실을 들여다보는 일도 어색하지만 모르는 척 그냥 돌아서기도 불편하다.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들여다 보고 흔적이라도 남아있는지 확인을 하고 누가 볼세라 문을 닫고 나온다.


큰 일은 없었지만 돌봐야 하는 주체가 부모가 되는 일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자식이 성인이 되고 더 이상 누구를 돌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잠시였다. 노인 두 분을 모시고 하는 나들이. 얼마나 가능할지 모른다. 오늘 가능했던 일이다.


인간에게 위엄이 사라지는 과정을 보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기억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 매번 낯섦을 찾아다니는 중이다. 마치 퀴즈의 정답을 찾아내듯 익숙했던 곳이 낯설어지면 어떻게 하나를 확인하고 낯선 곳에 대한 반응을 또 확인하고... 뇌기능을 확인하고 그렇게 삶을 붙들고 있다.


연습하듯 순간을 반복하고 복기하고 다시 연습하고... 그런 게 삶일지도 모른다. 멀리서 보면 별것 아닌 일들을 반복하는 일. 그런 사소한 일을 못하게 되면 큰일이 되는 것. 인생이라 말하기엔 참 보잘것없지만 놀랍게도 삶은 사소한 일들의 무탈한 연속이다.


하루가 간다. 아니 하루가 무사히 지났다.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듯 피로가 몰려온다. 화가 난 건 아니다. 기력이 좀 모자랐을 뿐이고 더불어 계속해서 좋은 텐션을 유지하기가 버거웠을 뿐이다. 원망도 아니다. 그냥 내 속내를 들여다볼 뿐이다. 슬픈 건지 화가 난 건지... 왠지 보상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다.


예전부터 봐둔 작가의 독립출판 책을 한 권 사들고 마음을 달래 본다.

슬프거나 화가 난 건 아니다. 그저 혼자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이 오늘은 넘쳐버렸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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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0GJ8lbRPp-Q?si=DJrm2LUEimq1Ch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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