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묘의 일부가 내 안에 있다

시가 있는 물리학 에세이 「우주를 만지다: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by 묘보살과 민바람

코시국이 되고 나서는 어머니께 아리송한 칭찬을 듣곤 한다.

"너는 어찌 알고 그렇게 이상한 습관을 들였냐?"

하지만 코시국 전에는 한 소리씩들었다.

"너 그거 병이야."


내가 늘 알코올 솜을 챙겨다니고, 바깥에서 놓았던 물건을 닦기 전에는 방바닥에 못 놓게 하며 예민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담배 냄새와 매연, 먼지에 과민해 여름을 제외하고는 늘 마스크를 장착하고 다녔으니, 내 경우는 코시국 이전과 이후의 생활에 크게 달라진 점이 없는 셈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 생활공간도 깨끗할 것 같지만, 그건 얘기가 다르다. 정리는 좋아하지만 쓸고 닦는 청소는 힘들어서 손이 잘 안 간다. 거실에서는 실내화를 신고 방에는 맨발로 들어가는데, 거실 바닥은 사무실 바닥처럼 막 쓴다. 열중하는 일이 있을 때는 일주일이 넘도록 거실 바닥을 방치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실용성 없고 일관성 없는 결벽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게 같이 사는 사람을 힘들게 한다. 나의 동거인은 종종

"내가 벼랑 끝에 매달려 있어도 내가 손 안 씻었으면 손 안 내밀어줄 것 같아."

라고 한다.웃고 있었지만 분명 진담이다. 심지어 나도 가능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같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나서 그가 신발을 고쳐 신다가 휘청하며 내게 손을 뻗었는데, 그 순간 내가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해버렸고, 그의 손은 내 팔 대신 땅을 짚었다. 내가 당해도 서운할 일이다. 그런데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몸이 벌써 반응해 버리니, 이 병이 맞다.


문제는 우리집 고양이를 둘러싸고 자주 일어난다. 우리 '토시'는 동거인이 전부터 키우던 고양이인데, 이 기준 없는 결벽을 가진 나는 고양이가 집 안에 흘리고 다니는 분비물(..)을 보며 바퀴벌레라도 본 듯 생난리를 피우곤 했다. 아무래도 진정한 애묘인과는 거리가 한참 먼 것 같다.


이런 괴팍함을 미안해하면서도, 더러운 곳과 깨끗한 곳을 나누어 집착하는 습관은 잘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 어떤 책의 한 구절을 읽었다.


아보가드로수는 물질 1mol에 들어있는 원자의 수다. 1mol은 대략 화학실험실에서 사람이 취급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을 말한다. 아보가드로수는 약 6×(10의23승)이다. 0이 무려 23개. 억을 넘어 조를 넘어 경을 넘어 이름도 붙일 수 없는 큰 수다. 아무튼 엄청나게 큰 수다. 원자가 이만큼 모여야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거시세계가 된다. 물 한 방울에 들어있는 원자의 수가 대략 이와 같다. 우리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가 내놓는 공기 분자의 수가 대략 이 정도다. 침을 탁, 뱉었다 하면 대략 이 정도의 분자들이 날아간다.
아보가드로수가 이렇게 크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런 말이 있다. 오늘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서 한 아이가 눈 오줌에 있는 물 분자가 한 달 뒤 내가 마시는 한 컵의 물속에 들어있다. 그 아이의 오줌에 들어있는 물 분자의 수는 대략 10의 23승일 것이고 이 많은 분자가 증발하면, 전지구의 대기에 섞일 것이다. 10의 23승 개가 대기에 섞이면 우리나라 상공에 있는 구름 속에는 적어도 수천억 개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구름에서 내린 빗방울 속에는 바로 그 오줌에 있던 물 분자가 적어도 몇 개씩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오늘 물을 마신다는 것은 그 오줌을 마신다는 말이 된다


물리학자 권재술 교수의 <우주를 만지다: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에 나오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고 '헉'했다. 내 몸 속에 피가 되고 살이 토시의 분비물이 느껴졌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오줌 자가 몸에 흐르고 중국 사막의 모래가 내 호흡기를 관통할진대, 하물며 한 집에 살고 있는 토시의 것이야. 나의 결벽은 팬데믹 시대에 유용한 습관이기는 하지만, 내가 자신이 설정한 영역에 무의미하게 붙들려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날 집에 돌아온 동거인에게 말했다.

"난 이제 포기했어. 토시는 내 안에 있어."






약장수처럼 서론이 길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참 좋았는데,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네..(지금부터 한다 그 설명.)


마침 학창시절 나를 두드러기나게 했던 물리학이 생각보다 못돼먹지 않은 학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시작할 때,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의 첫 번째 미덕은, 알아듣기 쉽다는 것이다. 물리학이라면 아무리 풀어 써도 물리학이겠지 했는데, <우주를 만지다>는 이론을 풀어서 해설한다기보다는 우리 삶에 닿아있는 흥미로운 지점들을 콕콕 집어내어 '이런 게 있다니까?'라며 어제 겪은 이야기처럼 신나게 들려준다.


읽으면서 원숙한 학자의 비유력에 감탄했다. 말도 못하게 크거나 말도 못하게 작은 물리학적 개념들을 피부에 와닿게 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니. 양자얽힘, 불확정성의 원리, 상대론 등의 개념도 나오는데, 워낙 이해가 어렵기로 악명 높은 이론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납득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이들을 다루는 책 중에는 가장 장벽이 낮은 책이 아닐까 한다. 끝없이 흥미를 자극하는 질문을 던지고 짧은 문장으로 발랄한 호흡을 살려가며 시원하고 재치 있게 전개한다.


고교 때 나는 수학 과목과 언어/사회 쪽 점수 차가 70점에 달할 만큼 극단적인 문과 머리였다. 수학이나 물리나 숫자가 들어가는 건 매한가지라서 그쪽 세계(이과)는 신 아니면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의 알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겼다. 장르 구분이 뚜렷한 머리를 가진 나는 나도 모르게 자신의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어려서부터 천문학과 기상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내가 감히'라는 생각에 꿈도 꾸지 않았다. 매일 밤 누워서 SF적인 상상을 했지만 SF문학은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므로(이것은 SF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다) 나의 섬세한 문학적 감성(?)과 함께 나아갈 수 없는 분야라 결론 짓고 봉투까지 밀봉해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 판단을 열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그 봉투를 좍좍 찢어버릴 수도 있었을 거다. 이 책은 삶과 물리학이 만나는 지점뿐 아니라 물리학과 문학, 우주와 감성이 절대 물과 기름 같은 사이가 아님을 알려준다. 한 절이 끝날 때마다 내용에 대해 저자의 감성을 담은 '시'가 나오는데. 시 역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편안히 건네는 농담 같기도 하고 일상의 애환을 담은 그림 같기도 하다.


이 책이 문학적인 이유는 시가 있어서가 아니다. 우주와 관련된 개념들이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이 과정 자체가 울림을 준다. 과학이 문학보다 문학적이고 철학보다 철학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삶은 우주적인 물질과 규칙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를 잘 들여다보면 자신의 본질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낭만은 '우리는 모두 별에서 온 먼지로 이루어졌다'는 칼 세이건의 유명한 말이 전부가 아니었던 거다. 사랑하는 이들이 삶을 마감한 뒤에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어 우리 곁에 있다는 말 역시 진실이다.


<우주를 만지다>는 이런 부분들을 딱딱 짚어내 시선을 넓히고 영감을 준다. 책은 총 4장과 부록으로 되어 있다. 1장 '별 하나 나 하나'에서는 거시세계를, 2장 '원자들의 춤'에서는 미시세계를 다루고, 3장 '신의 주사위 놀이'에서는 양자역학에 대해, 4장 '시간여행'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대해 주로 이야기한다. 부록은 본문의 개념 이해를 돕는 정리와 심화 역할인데, 역시 재미있다.


신기한 과학적 사실을 알아가는 맛도 쏠쏠하지만, 존재를 대하는 저자의 상냥함이 드러나는 부분들은 특히 마음에 와 닿는다.

경계가 이렇게 모호하다는 것은 세상만사와 세상 만물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물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고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통합된 하나를 인간의 분별지심이 갈라놓는 것이다. 분별지심은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더 깊이 이해하고 나면 이 분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계는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다. 경계는 실체가 아니라 관념이다.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관념이다. 모든 갈등은 이 경계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다. (1부 '경계는 없다' 중)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다. 참 아름다운 시로 보이지만 실은 엄청난 폭력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름이 있고 없고, 이름이 불리고 안 불리고가 왜 중요하단 말인가?
(1부 '이름이라는 폭력' 중)

대상에 이름을 붙이고 분별한 뒤 스스로 만든 이름과 경계에 갇히고 마는 인간의 속성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현상에 생각이 미친다. 가깝게는 내가 문과생, 문과 체질이라는 이름에 나를 가두고 상상의 영역마저 한정했던 것, 페르소나에 갇혀 '이러면 안 될 거야', '이렇게 해야 해'라는 강박을 가졌던 것, 또 넓게 보면 'MZ세대', '페미니스트' 등 사회적 용어가 고정시켜버린 편견과 인상들.


아보가드로수가 이렇게 크다는 것은 너와 내가 우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마주보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너와 내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몸에 들어갔던 공기가 1초 후에 너의 허파 속으로 들어가고, 1분 후에는 너의 핏속으로 들어가고, 1시간 후에는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간다. 나의 피와 살이 너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지만 모든 생명체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2부 '아보가드로수의 비밀' 중)


이제는 뉴스에 나와도 전혀 새롭지 않은 세계 각지의 혐오범죄를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연결감을 잃고 있는지 실감한다. 너는 나에게 해만 끼친다는 생각, 절대 너 같은 건 나와 같은 종류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전해져 몸이 굳는다.


그러나 내가 완전히 독립된 존재라는 생각 역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몫을 해내고 책임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요한 개념이지만, 우리는 몸부터 원자 간 이동으로 재구성되고 병이 옮기도 하는 열린 존재들이다. 그리고 누구도 다른 사회구성원의 도움 없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벽이 없다면 방이라는 공간은 없다. 공간이란 물질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에 대한 인간의 관념이다. 만약 이 우주에 입자 하나만 있다고 해 보자. 그 입자의 위치가 어디인지 말할 수 있을까? 좀 더 나아가 입자 두 개만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두 입자 사이의 거리를 말할 수 있을까? 두 입자 사이의 거리는 그 두 입자 사이에 늘어선 `그 무엇'(다른 입자)으로부터 알 수 있다. 그 두 입자 사이에 `그 무엇'이 없다면 어떻게 거리를 알 수 있겠는가? 공간이란 텅 빈 무엇이 아니라 입자들의 배치관계일 뿐이다. 입자가 없으면 공간도 없다. (4부 '시간과 공간의 탄생' 중)

세상에 오로지 홀로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찾으려 애쓰는 '의미'라는 녀석들 자체가 대상과 그 대상의 변화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나의 좌표를 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를 둘러싼 대상을 지켜보게 된다. 그렇게 보면 내가 대하는 모든 것들은 나와 이어져 있으며, 나의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책이 내가 차곡차곡 쌓아온 오만을 돌아보게 하듯이 말이다.


저자가 머리말에 적은 '내가 바로 우주의 일부'라는 말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나도 당신도 더 큰 것의 일부이다. 그러니, 우리가 미세한 존재일지언정 수많은 우주적 가능성의 결정 인자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매순간 우리는 선택을 한다. 이 선택의 결과가 밤하늘에 반짝이는 저 수많은 별이 되고, 우주가 되고, 오늘의 내가 된 것이다. 선택, 그것은 모든 존재의 존재 이유다. (3부 '선택, 존재의 이유' 중)


요즘 훌륭한 소프트 SF 소설들을 읽으며 내가 접어두었던 가능성의 세계를 여행하는 맛에 빠져 있다. 사실 바다를 메운다며 치명적 독극물이 나오는 산업폐기물을 갯벌에 쏟아붓고, 가열찬 지구가열로 빙하가 녹아 75년 전의 탄저균이 나오는 이 시대에 SF 속 디스토피아를 따로 찾아다닐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틀, 경계, 구분에 얽매어 일부만 보던 나라는 우주를 제대로 살펴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참여한 기후문학이 나와 이어진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바꾸고, 그래서 우리의 현재가 바뀌고 미래가 바뀌는 꿈을 꾼다.


말도 못하게 중요하면서 말도 못하게 사소한 우리는,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갈 뿐이다. 그게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담겨 있는 마음을 이제야 깨닫다니.


베란다 타일 위에서 배를 시원하게 까뒤집은 토시를 보며 읊조린다.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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