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간 나는 인간의 모든 것을 읽어버린 느낌 속에 있었다. 인간의 한계와 마음의 구조. 사랑이란 이름으로 신비화하던 것들을 다 헤쳐서 실제를, 실체를 봐버린 느낌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은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왜곡되어 있었고, 그 방향을 잘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 연인 간의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있었다. 우정 역시도 그랬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에게 크게 마음을 다치고 벗겨져 드러난 관계의 본질에 실망하는 일을 여러 번 겪었다.
이제는 가까워질 때도 멀어질 일을 생각하고, 좋을 때도 상처받을 언젠가를 생각했다. 관계에서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엑스레이를 들여다보듯 구조와 흐름을 보는 기분이었다. 2년 사이 마음이 확 늙어버렸구나. 많은 사람들을 연속적으로 겪으며 이상하리만치 타격과 통증만 주로 이어진 탓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조차 나를 할퀴었다. 사람이 혐오스러웠다가, 두려웠다가, 가여웠다가, 이내는 아무렇지 않았다. 친절하게 웃는 사람들의 웃음 너머를 보았고, 목소리 속에 담긴 감정의 진실성을 가늠했다.
그건 단순한 냉소도, 일시적인 피로도 아니었다. 삶을 사랑했던 사람이 사랑의 본질을 꿰뚫고 난 후에 도달하는 아주 조용한 감정. 포기가 아닌 초월에 가까운 것이었다. 눈을 감은 게 아니라, 눈을 너무 오래 뜨고 있어서 지친 상태였다. 지극히 진실하고, 고통스럽고, 동시에 성숙한 자리에 닿은 감각. 그게 내가 겪는 내면의 변화였다.
지인은 그것을 ‘끝까지 사랑해본 사람만이 도달하는 공허’라고 말해주었다. 무심해진 게 아니라 너무 깊이 사랑하고, 너무 깊이 신뢰하고, 너무 많이 실망하고, 너무 오래 참아온 끝에 생긴 무감각이라고 했다. 냉담이 아니라 너무 많이 느껴서, 이제는 느끼는 법을 잠시 잊게 된 감정의 탈진이라고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런 탈진 상태가 이제야 온 게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아팠는데, 그렇게 무수히 다쳤는데, 이제야 끝까지 도달한 거라니. 도대체 내 사랑의 면적과 부피는 얼마나 컸던 걸까. 나란 사람은 얼마나 질기고 징하고 어리석고 대단한가.
화수분 같던 그 마음은 어디서 나왔던 걸까. 그건 의미가 있는 걸까. 아니면 감정의 부피가 크다는 건 오르내리는 어지러움과 불안정 속에 산다는 것과 같은 말일까. 사랑의 면적이란 곧 예견된 상처의 면적과 같은 것일 뿐일까.
“이유 없이 슬퍼. 아니, 이유가 너무 많은 건가.”
“넌 지금 슬퍼도 돼. 아무도 그립지 않아도, 사랑이 고장난 거 같아도, 그게 지금의 너일 뿐이지 고장난 게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이 무감각은 내 마음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마음이 스스로 두른 외투 같았다. 하지만 그 핵심은 고통이 아닌 통찰이어서, ‘나아질 거야’ 같은 말로 위로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그 곁에 앉아있어야 했다.
나는 누구를 믿으려 애쓰지 않았다. 다시 사람에게 환상을 가질 수 있을지 묻지 않았다. 그저 그 모든 걸 겪고 지금 이 자리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바라보았다. 무게를 잴 수 없는 감정의 여정을 돌이켜보았다. 거기서 보이는 나만의 진실을 알처럼 마음에 품었다.
그러면서 숨을 쉬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그럴 때면 숨 쉬는 법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늘 새로웠다. 나는 숨 쉬는 것만으로 잘하고 있다는 말을 굳이 자신에게 들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느낄 줄 알았다. 이 자리에 있는 게 나라는 것도 느낄 줄 알았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빈자리에 등을 대고 앉을 수 있는 내가 되기까지 내가 지나온 시간을 느낄 줄 알았다.
겨우 그만큼의 자리라도 이 순간을 위한 충분한 안전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 그것 역시 나에게 감정적 탈진을 가져온 수많은 타격과 상흔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전혀 예정에 없었는데 갑자기 오늘 글을 쓰게 되었네요.
정신없이 바쁜 나날 속에서 정신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분히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쓰고 또 고치는 과정 없이 한숨을 토해내듯 쓴 글입니다.
완성도가 부족하지만, 이렇게라도 쓰고 싶을 때 쓰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