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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Dec 18. 2018

박항서 감독 미안해요, 이렇게 낯뜨거울 줄 몰랐습니다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저를 사랑해주시는 만큼, 내 조국 대한민국도 사랑해 달라."
 
박항서 감독이 기자회견 말미 덧붙였다는 메시지는 확실히 감동적이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1-0으로 이기고 우승컵을 거머쥔 베트남의 박항서 감독. 복수의 매체에 따르면 그는 "선수들과 코치들, 그리고 우리를 응원해주신 모든 베트남 국민들과 우승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면서도 인터뷰 말미 위와 같은 '조국' 사랑을 잊지 않았다.
  
SBS가 이날 오후 9시경부터 2시간 넘게 생중계한 스즈키컵 결승 2차전은 전국 18.1%, 수도권 19.0%(16일 닐슨코리아 기준)라는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월드컵도, 올림픽도 아닌 아세안축구 생중계도 이채로울 뿐더러 20%에 육박하는 지상파 시청률은 '박항서 매직' 외에는 도무지 설명이 불가능한 수치였다.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우승한 베트남 선수들이 박항서 감독을 헹가래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 역시 16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어제 결승전에서 베트남 관중들이 베트남 국기와 태극기를 함께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축구를 통해 양국이 더욱 가까운 친구가 되었음을 실감했습니다"며 "지난 3월 베트남 국빈방문 때 훈련장에서 만난 박 감독님과 베트남 선수들이 이룩한 쾌거여서 더욱 뜻깊습니다. 앞으로도 멋진 모습 보여주기 바랍니다. 베트남과 한국이 각별한 우정을 다지며 밝은 공생번영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길 기원합니다"라며 축하했다.
 
다음은 예상 수순 그대로였다. 각종 현지 보도와 미담 기사가 쏟아졌다. 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과 아시안게임 4강, 스즈키컵 우승까지 거머쥐며 A매치 16경기 무패를 기록, 역사를 써내려간 '박항서 호'의 순항은 기본이었다. 박항서 감독을 '파파 리더십'이라 추켜세우는 현지 팬들의 축제 분위기와 함께 베트남 총리와 재벌 총수가 나서 박 감독을 칭송한다는 미담도 국내 언론을 통해 앞다퉈 소개됐다.
    

▲ 경기 지켜보는 박항서 감독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가운데)이 이영진 코치와 함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또한 박항서 감독의 연봉 수준과 특별 보너스 여부, "난 영웅이 아니다"라는 그의 겸손 발언, 박항서 초상화의 경매 시작가 액수, 김경수 경남지사가 경남 산청이 고향인 박 감독에게 보낸 축전 내용, 국내 한 예능 프로그램의 박항서 감독 섭외 여부까지. 17일 오후까지 쏟아진 기사들의 면면은 참으로 다채로웠다.
 
베트남 국민들의 '박항서 사랑'이 바탕이 됐을 이러한 보도들은 도가 넘지 않는 선에서 '박항서 특수'를 누리려는 '의도'라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도를 넘어선 '박항서 효과' 보도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밖에 없다. 박항서 감독을 자사 홍보의 도구로 활용하는 대기업과 정치인들이 그 주인공들 되겠다.
 
삼성전자와 롯데그룹의 '박항서 특수' 활용    

▲지난 16일자 <아시아경제> <한국에 빠진 베트남...박항서 열풍 전 삼성전자 있었다> 보도.ⓒ 아시아경제

 
"사실 이미 베트남의 국민기업 자리는 삼성전자가 꿰차고 있다. 기업평가리포트 회사인 베트남리포트(VNR)가 발표한 2018년 베트남에서 가장 큰 500대 기업(VNR500) 리스트에서 삼성전자는 1위에 올랐다. 2위와 3위는 국영 대기업인 베트남전력공사(EVN)과 베트남석유가스그룹(PVN)이 각각 차지했다. 2018년 베트남 500대 기업은 기업의 매출 성장 속도, 이익, 총 자산, 노동력 등을 종합 평가한 순위다(중략).

삼성전자가 1위에 오른 건 작년에 이어 올해로 두 번째다. 삼성전자는 2012년 4위를 기록한 후 2013~2016년 2위에 머물렀다. 삼성전자는 1995년 베트남 호찌민에 법인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현지에 진출했다. 베트남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000달러 수준이다. 세계의 공장이라고 일컬어졌던 중국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특히 베트남 정부는 세제혜택 등을 통해 외국 기업에 다양한 투자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6일자 <아시아경제>의 <한국에 빠진 베트남... 박항서 열풍 전 삼성전자 있었다> 기사 중 일부다. 이날 오전 11시경에 출고된 이 기사는 베트남의 스즈키컵 우승을 염두에 두고 이미 작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삼성전자의 베트남 내 실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 기사는 LG전자의 베트남 하이퐁 공장을 소개하는 한편 한화 김승연 회장의 '근황'도 소개했다. 김 회장이 "최근 2011년 이후 7년 만에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현지 공략 의지를 보였다"는 내용이었다.
    

▲<비즈니스 포스트>의 17일자 기사 <베트남 공 공들이는 신동빈, 롯데 '박항서' 효과 덕본다>ⓒ 비즈니스포스트 갈무리

 
이런 기사는 또 있었다. 이번엔 롯데였다. 17일 경제매체인 <비즈니스 포스트>는 <베트남 공 공들이는 신동빈, 롯데 '박항서' 효과 덕본다>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롯데가 그룹 차원에서 베트남 공략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롯데마트부터 롯데엔터테인먼트까지 어떻게 베트남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지 구구절절 나열했다.
 
그러나 <비즈니스 포스트>는 기사 말미 "박항서 효과가 롯데그룹 등 한국 기업의 매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정확한 수치가 나온 것이 없다"면서 "중국내 한류 열풍으로 한국 화장품이 중국 내에서 믿을만한 제품으로 통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 베트남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란 장밋빛 전망을 내놨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기업들이 이렇게 '박항서 특수'를 자사 홍보에 활용하는 사이, 소셜 미디어 상에서는 베트남에서 삼성전자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렸던 BBC의 보도가 재조명되고 있었다. 지난 4월 영국 BBC가 보도했던 <베트남 삼성 공장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국제단체 '유산 빈번해' 지적> 기사였다.
 
BBC가 보도했던 베트남 삼성전자 공장의 이면    

▲2018년 4월 2일 BBC 코리아의 기사 <베트남 삼성 공장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BBC코리아 페이스북 갈무리

 
"유산은 일반적인 일로 여겨진다. 근로자들은 졸도, 어지럼증, 시력 손상, 코피 등을 겪는다."
"놀랍게도 모든 인터뷰 대상자가 자신의 근로 계약서를 회사가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계약서 사본조차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근로자들은 온종일 서서 일한다. 그럼에도 가급적 쉬지 않으려 한다. 너무 많이 쉬는 것처럼 보이면 회사가 임금을 깎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베트남 현지 노동자는 16만 명에 달한다. BBC는 2017년 11월 국제 비영리 환경단체 아이펜(IPEN)과 베트남 시민단체 성·가정·환경 연구센터(CGFED)가 발표한 '베트남 전자산업 여성 근로자 실태 보고서(Stories of Women Workers in Vietnam's Electronics Industry)'를 인용, 삼성전자 베트남 노동자들의 심층 조사 인터뷰 내용을 보도했다.
 
해당 보고서는 베트남의 삼성전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근로자 4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조사를 토대로 작성됐고, 응답자들의 평균 연령은 25세였다. 그 중 가장 어린 응답자는 1997년생이었다. 여성 근로자들의 노동 환경과 인권 실태에 초점을 맞춘 이 보고서를 보도하며 BBC는 "모든 응답자가 작업장 내에서의 건강 문제를 언급했다"며 "유산은 '젊은 여성이라면 일반적으로 겪는 일'로 여겨진다"고 설명했다.
 
BBC는 또 이중 한 응답자가 "삼성에서 일하면 독성 물질에 노출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매일 도난 방지를 위한 자기장 문을 지나가야 하는데, 다들 이 문이 뭔지 몰라 걱정하고 있다"고 대답한 내용도 인용했다. 이와 관련, 보고서는 "응답자들이 화학 물질을 포함한 세척 용품이나 공장 내에서 쓰이는 화학 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고 황유미씨를 비롯해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백혈병 등 희귀병으로 숨진 삼성 직업병 노동자들의 전례를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BBC는 삼성이 이 보고서 내용과 관련해 즉각 반박했다고 보도했다. 삼성전자 측은 지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과학적 근거가 없는 보고서"라며 "보고서의 상당 부분이 거짓"이며 "작업 환경은 화학 물질로부터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베트남 정부 역시 즉각 조사에 착수, "문제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유엔(UN) 인권고등판무관실은 이와 관련 BBC의 보도 한 달 전인 지난 3월 20일 '베트남: 유엔 전문가들은 공장 근로자들과 노동 운동가들에 대한 위협을 우려한다'는 제목의 권고문을 냈다. BBC는 관련 내용을 이렇게 요약했다.
 
"권고문에 따르면 공장 근로자들은 '외부에 작업 환경 관련 이야기를 발설할 경우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위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측은 이튿날 BBC의 취재 요청에 '유엔 인권 전문가들의 우려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며 '이미 조사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으며 유엔 측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답했다."
 
낯뜨거운 '아이노믹스' 숟가락 얹기
 
어디 삼성전자뿐이었을까. '박항서 특수'에 난데없이 숟가락을 얹으려는 이는 또 있었다. 
 
"박 감독님이야말로 위대한 민간 외교관이자 진정한 애국자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 번 저희 당이 지금 아이노믹스 등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저희 자유한국당의 믿음, '대한민국 국민은 위대하다, 이 위대한 국민을 뛰게 하자'이런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그런 장면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김병준 비대위원장)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이 1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은 나경원 원내대표.ⓒ 남소연

 
박 감독이 써내려가는 베트남 축구의 새 역사와 베트남 국민들의 '박항서 축구' 사랑은 분명 흐뭇하고 환영할 만한 뉴스다. 하지만 우리가 좀 더 기억해야 할 정치인들의 베트남 관련 멘트는 이런 종류가 아닐 것이다. 
 
2017년 11월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며 과거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간접사과했다. 베트남 호찌민시 응우엔후에 거리에서 열린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 개막식 영상축사를 통해서다. 문 대통령은 "그렇지만 이제 베트남과 한국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경제 파트너이자, 친구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앞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1년 방한, 쩐 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2004년 베트남을 국빈 방문, "마음의 빚이 있다"고 간접적인 사과의 뜻을 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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