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스펙트럼을 넓히다
큰 아들이 초등학생, 작은 아들이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 워킹맘이었던 나는 늘 물먹은 솜처럼 저녁을 보냈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먼저 잠이 든 경우는 허다했고, 책을 읽어주면서 어떤 헛소리를 했는지 아이들이 나를 흔들어 깨웠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이 더 이상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 오니, 몸 곳곳에 이상신호가 온다. 없던 혹들이 몸곳곳에 총알처럼 박혀있고, 아침마다 퉁퉁 부은 손가락은 소위 내 몸의 기초대사량이 엉망임을 알려온다.
몇 년 전 다니던 회사에서 이사장이 바뀌면서 내 일에 대한 사명과 기쁨이 사라지고, 어쩔 수 없이 회사를 이직한 순간이 있었다. 플레이리스트에 일부러 힘나는 노래를 모아서 출퇴근 길에 들어보아도 힘이 나지 않던 그 시절, 누군가 함께 발레를 배워보자 했다. 이후 6년째 수많은 발태기를 넘기면서 지금까지 간신히 매주 한 번씩 발레를 해오고 있다.
발레는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이지만, 정확히 지향하는 동작의 이상향이 너무나 명확하다. 그래서 때로는 참 슬픈 예술이다.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우스꽝스러운 행위가 되어버릴 때가 많다. 그리고 아직 한국에서 취미발레는 감성적 표현보다는 더 정교한 동작을 하고 싶은 욕망들이 더 앞서가다 보니, 나이가 들어 시작한 발레는 자괴감을 줄 때가 빈번하다. 선생님이 칭찬하면 뿌듯했다가도, 왼쪽 오른쪽 방향도, 금방 배웠던 동작도 까먹은 채 혼자 헤매고 있을 때면, 승부욕 강한 나는 어찌할 수 없는 못난 마음이 올라오는 걸 지켜본다. 발레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늘 비교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면서 나의 쪼잔한 모지리 우월감의 아픈 조각이 드러날 때도 있었다.
올봄부터 새로 시작한 걷기, 달리기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좋은 운동이 되었다. 어쩌면 내가 운동을 하는 이유는 몸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시달리는 나의 잡생각들과 이별하는 순간을 가지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선천적으로 걱정과 생각이 많다. 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현재가 잠식당할 때도 있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미리미리 걱정을 하다보니 일요일 밤에는 다음 한 주의 업무계획을 세우거나, 보기 싫은 사람들을 회사에서 만날 생각에 잠을 설치는 순간이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운동을 시작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흘려보내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하고, 다시 불뚝 긍정적인 생각을 세우기도 하면서, 땀을 흘리는 상쾌함이 나를 괴롭히는 그 생각들도 같이 씻어내줄 때가 많다.
겨울이 되니, 따뜻한 부산이어도 좀처럼 나가서 달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잠깐의 실내활동으로 헬스장을 다니기로 했다. 사실 처음에는 러닝머신을 주 종목으로 하려고 등록했지만,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다 보니 웨이트 운동의 매력에 새삼 빠지게 되었다.
달리기는 끊임없이 올라오는 잡생각을 흘려보내지만, 웨이트 트레이닝은 자신과의 싸움이 되다 보니 잡생각은 들어올 틈 없는 명료한 명상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떤 근육에 힘이 들어오는 지를 끊임없이 느끼기 위해 의식은 몸에 집중해야 하고, 누군가와 말을 섞을 필요도 없고, 각자 다른 기구에 집중하다 보면 타인과 비교할 틈도 없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도 헬스장에 갔다. 아이들은 각자의 약속이 있었고, 더 이상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기지 않으면서 남편과도 크리스마스의 작당모의는 사라졌다. 산타 할아버지는 건강을 선물로 주시지 않으니 셀프로 선물하는 수밖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셀프로 건강을 선물하고 있었고, 나 또한 내 몸을 위한 소중한 명상의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아침에도 내 몸은 붓고 있고, 헬스를 시작하며 오히려 입이 터지는 바람에 드라마틱한 몸무게 변화도 아직은 없다. 그러나 밥 먹고 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나 설거지를 바로 시작하고, 외출이 많은 주말을 보내도 월요일에 두렵지 않으며,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날, 억지로 헬스장으로 나서는 작은 변화들이 시작되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용두사미 헬스장 기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운동 후에 가벼워지는 몸과 마음의 감각을 잊지 않고 헬스장 등록 마지막 날까지 이 루틴을 이어가기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