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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박국 Mar 06. 2017

서울의 클럽- 부킹, 부비부비, 픽업

<GQ> 2017.2 원래 기고글

본 글은 GQ 2017년 2월호에 '서울의 클럽'이라는 주제를 받고 쓴 글이다. 보낸 후 본래 기획의 의도와 맞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이에 수긍하고 수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다른 주제를 바탕으로 새로 원고를 써 보냈다. 새로 쓴 원고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서울의 새로운 가능성 ‘클럽’ 처음 쓴 글과 다른 방향의 글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의 클럽- 부킹, 부비부비, 픽업


2004년부터 2006년, 군대에 있었다. 잘하는 것도 다른 이와 겹치는 취향도 없이 조용히 보내던 군인 1의 시기다. 그러던 어느 날 소대에 있는 모든 이가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귀 기울이는 사건이 생겼다. 당직 부사관이 당직 사관에게 건의한 TV 시청을 허가받은 금요일 밤이었다. TV 채널은 엠넷에 고정됐다. 그날 밤 편성된 프로그램은 ’ 슈퍼 바이브 파티(바이브 나이트)’였다.



‘슈퍼 바이브 파티’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방영된 ‘국내 최초의 파티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입장하는 게스트를 품평하고 인터뷰하는 오프닝으로 방문객에게 ‘섹시 댄스’를 추게 한 후 사람들의 반응으로 ‘슈퍼’와 ‘낫’을 나눈다. 게스트 음악가의 공연이 열리고 남녀가 몸을 밀착해 춤을 추는 ’ 부비부비’가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슈퍼 바이브 파티’는 부비부비를 요즘 젊은이들의 문화라고 소개했다. 클럽에서 부비부비를 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노홍철이나 제롬 같은 진행자가 수줍어하는 사람 뒤에서 직접 시범을 보였다. 가끔 부비부비에 적극적인 여성이 있으면 모든 남성 진행자가 찬사를 보냈다.


방송 코멘트와 다르게 생활관에 있던 20대 초반의 젊은이 중 그 문화를 경험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비부비는 물론이고 클럽에 간 이도 전혀 없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음악을 좋아해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는 홍대 클럽을 다녔다. 그때 내가 사회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꼬치꼬치 물었던 선임 한 명이 그 사실을 기억해 냈다. 소대 안의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한 건 정말 클럽에서 부비부비를 하고 노는 지였다. 부비부비를 본 적도 해 본 적도 없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그들을 실망하게 할 수 없었다. 대충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들에게 전역 후의 새 목표가 생겼다. 큰 죄를 지었다. 



‘슈퍼 바이브 파티’가 방영된 2004년은 홍대에 m2가 생긴 해다. m2는 마트마타와 MI가 합작해 만든 홍대 최초의 대형 클럽이다. 홍대에 클럽이 하나둘 생긴 건 90년대 중반 유학생의 귀환과 전 세계적으로 일렉트로닉 음악이 유행하면서부터다. 모두 작은 규모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이었다. 클럽의 수가 늘며 2001년엔 패스 하나로 홍대의 모든 클럽을 둘러볼 수 있는 클럽데이가 열렸다. 걷고 싶은 거리, 플리마켓이 생기고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홍대 앞의 유동인구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수요가 늘면 공급이 필요하다. m2의 탄생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2004년에서 2006년은 케이블 TV의 경쟁이 심화한 시기이기도 하다. 자체 콘텐츠를 늘리고 지상파에서는 할 수 없는 콘텐츠로 승부를 걸었다. 대부분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었다. 2006년에 개국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채널 tvN은 수영복을 입은 여성들과 게임을 하는 ’tvNGELS’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지상파의 자리를 위협하는 지금의 tvN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비부비가 어떻게 젊은이의 문화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부비부비가 미디어와 대형 클럽의 이해관계를 모두 충족하는 콘텐츠였다는 점이다. 네이버 지식인과 클러버를 위한 다음 카페에 ’ 부비부비하다 발기하면 어떻게 하나요?’, ‘어색하지 않게 부비부비 하는 법 좀 알려 주세요.’ 같은 질문이 넘쳐났다. 금요일 밤 8사단의 소대원처럼 모두가 부비부비에 관심을 보였다. 슈퍼 바이브 파티는 햇수로 4년간 방영됐고 이후에도 엠넷을 소유한 CJ미디어는 계속 클럽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m2는 줄을 서서 입장하는 클럽이 됐고 CJ미디어는 강남의 나이트클럽을 인수하려다 철회했다. 


서울에서 클럽이 처음 태어난 건 1970년대의 일이다. 미국에서 유행하던 디스코 클럽이 이태원 등지에서 재현됐다. 이태원과 강남을 중심으로 늘어나던 서울의 클럽이 현지화된 건 1990년대의 일이다. 한국에서 댄스 가요가 크게 유행하던 시기다. 유럽과 일본의 댄스 음악을 틀던 디제이는 이제 댄스 가요를 틀었다. 쉬운 음악에 접근성이 늘었다. 나이트클럽에 놀러 가는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다. 현지화의 핵심은 웨이터가 여성을 남성의 테이블에 소개하는 ’ 부킹’에 있었다. 부킹은 10대의 대부분을 남/여가 분리된 학교에서 보내며 자연스러운 이성 교제 법을 익히지 못한 이들을 위한 맞춤 서비스였다. 표현 그대로 강남 바닥엔 밤이면 웨이터 이름이 쓰인 플라이어가 뿌려졌다. 2000년대 초까지 전성기가 이어졌다. 방송에서 ‘무도회장’이라 부르는 나이트클럽의 시대다. ‘부킹’은 나이트클럽의 정체성이 됐다. 


2005년, 중앙일보는 "촌스럽게 부킹은 …맘에 들면 '부비' 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다. 2000년대 중반 부비부비가 등장한 후 부킹은 나이트클럽과 클럽을 나누는 기준이 됐다. 나이트클럽은 금세 촌스러운 공간이 됐다. 처음 맥도널드의 셀프서비스를 경험했을 때처럼 사람들은 외국의 ‘일렉’, ‘힙합’ 음악에 맞춰 직접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접근해 부비부비 하는 게 선진문화라 생각했다. 갖춰진 인프라를 바탕으로 나이트클럽 역시 클럽으로 변화를 꾀했다. 마침 한국에는 댄스 가요의 유행이 사그라들고 ‘소몰이 창법’이라 불리는 신파조의 한국형 미드 템포 R&B가 유행했다.



바나나걸의 노래처럼 ‘너도나도 모두 부비부비’를 하는 동안 홍대 언더그라운드 클럽은 고군분투했다. 젊은 디제이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브랜드를 갖고 파티를 기획하는 파티 크루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부터 홍대 앞을 지켜왔던 조커레드, 명월관부터 클럽 툴, VIA 등에서 클럽과 수익을 분배하는 조건으로 이들이 여는 파티가 꾸준히 열렸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클럽 신이라 부를만한 것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였다. 홍대 언더그라운드 클럽의 운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대의 유동인구와 임대료는 크게 늘었지만 신은 그만큼 크지 않았다. 2011년 클럽데이가 막을 내리고 대부분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명월관은 얼마 전 20주년을 맞이했다.


강남 대형 클럽도 순탄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벌써 많은 이름이 등장했다 사라졌다. 대형 클럽은 유지에 비용이 많이 든다. 라운지 클럽의 등장 후 경쟁도 심해졌다. 공간을 채워야 하기에 입장료는 무색해졌다. 게스트를 남발하고 테이블 판매에 총력을 기울였다. 클럽은 보통 VIP 테이블과 플로어, 바로 나뉜다. 이중 플로어와 분리된 테이블에 앉아 즐길 수 있는 VIP 테이블은 보틀이라 부르는 병 패키지를 구입하면 주어지는 신분이다. VIP 테이블의 가격은 상황에 따라 수백만 원까지 오른다. 중요한 손님이다. 사라진 웨이터와 부킹이 영업을 뛰는 MD가 플로어의 여성을 VIP 테이블에 소개하는 역할로 부활했다. 일부 클럽은 여성 손님 대행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픽업 아티스트 또는 유흥 카페에서 모인 남성들이 조각이라는 형태로 돈을 모아 VIP 테이블을 잡는 일도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대형 클럽의 비즈니스는 플로어의 ‘수질 관리’를 통해 VIP 테이블에서 돈 많이 쓸 사람을 영업하는 일이 됐다. 



2013년, THE XX의 멤버이자 디제이 Jamie XX가 강남의 대형 클럽 옥타곤에서 디제잉을 하다 VIP 테이블의 요구로 20분 만에 퇴장당했다. 공교롭게도 DJ Mag의 전 세계 클럽 순위 12위에 옥타곤이 오른 해다. 옥타곤과 순위에 오른 다른 클럽을 구글 이미지에서 검색하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클럽은 클럽의 전경과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옥타곤은 (지금은 전보다 덜 하지만) 야한 옷차림의 여성 사진이 주를 이룬다. 대부분 클럽 측에서 홍보용으로 배포한 사진이다. 


클럽은 원초적인 즐거움의 공간이다. 원초적인 즐거움이야말로 지금까지 댄스 뮤직과 클럽 신을 발전시켜 온 동력이다. 여기엔 음악, 조명, 술, 춤 그리고 섹스의 가능성도 포함될 것이다. 여기서 서울의 클럽 문화는 그게 전부인 것처럼 섹스에 치우쳐 있다. 단순히 균형의 문제는 아니다. 클럽에서 섹스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있으며 대부분 행위가 강간 문화와 닿아 있다. 정확히 말하자. 서울 상당수의 클럽은 남성 중심의 강간 문화에 기대 운영되고 있다. 



2017년 이태원 케이크샵의 첫 로컬 크루의 파티는 그간 페미니스트 파티를 기획해 온 비친다(BICHINDA)가 차지했다. 모든 라인업이 여성으로 채워졌고 디제이 부스부터 플로어까지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이 공간을 채웠다. 부비부비를 시도하려는 ‘한남’은 존재했지만 분위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파티는 성공했다. ‘한남’의 등장에 클럽을 떠났거나 두려움에 온 적 없던 여성도 이 날 자리를 지켰다. 흥행도 흥행이지만 가장 큰 성공은 클럽에서 전에 없던 경험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인스타그램 피드와 트위터 타임라인에는 해방감의 후기가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사람들은 생소하지만 좋은 음악을 방해 없이 들으며 놀았던 점을 가장 즐거웠던 점으로 뽑았다. 지금 서울의 클럽은 여성에게 겨우 이런 기본적인 즐거움조차 주지 못하는 공간이다. 부킹, 부비부비, 픽업. 지금껏 서울의 클럽이 남긴 단어다. 이제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모두가 순수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새 단어가 클럽을 채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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