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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vefaith Jul 08. 2019

물방울처럼 찰방거리는 인생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 브런치무비패스로 관람하였습니다.



새로울 것은 없는 영화다. 힘든 건 현실적이고 결말이 주는 희망은 기적적이다. 지치고 퀭한 보통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우리나라만 먹고 살기 힘든 것 같지만 프랑스를 포함해 어딜 가나 살긴 힘든 모양. 중년은 성숙이나 풍요보다는 위기와 불안이 어울린다. 하고 싶었던 꿈은 멀어져 가고, 사업은 망해가며, 재취업은 어렵고, 세상은 전산화 되어 내가 할 일마저 줄어든다. 가정은 화목하지 않고 상처는 남아있고, 병든 마음을 안고 약으로 연명한다. 이런 불행한 미저리들이 있냐고? 많다. 생각보다 이들을 딱하게 여기지 않았던 내 마음이 제일 놀라웠다. 익숙한 광경이니까. 이 분들은 몇 달 전 개봉한 영화 속 똑똑한 누군가처럼 '계획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특별한 목표나 열정도 없다. 그저 남자 수중 발레를 신청하고 올림픽이 있다기에 나가 보고 싶을 뿐이다. 그게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이다.



남자 수중 발레.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고 하지만 여전한가 싶었다. 남자가 발레를 한다고 게이같다니 빌리 엘리어트가 나온지가 언젠가. 영화 전반에서 이들은 비아냥을 참아낸다. 확실히 그들은 빛나는 사람들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네 까짓게' 싶은 자세로 그들을 하찮게 대한다. 그들은 서로 중얼거리지만 막상 말해야 할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못한다. 그야 그럴 수 있다지만 포스터의 '아벤저스' 문구가 잘못된 것 같다. 영화 중반이 되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올림픽 나간다고 수영복 훔치려다 걸렸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훈련을 하기는 하는 건가. 이렇게 하는 건 별 소용이 없는데. 꾸준히 열심히 하는 게 좋다지만. 아무래도 좋은 건가. 종목의 문제가 아니었다. 익숙한 이 기분. 망조다. 망할 각이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의욕을 잃고 비뚤어진 선생님. 과거의 빛나는 순간만 기억하고 술과 담배에 절고, 떠나버린 옛 남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선생님. 그녀가 문제였다. 다른 누구보다 그녀가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캐릭터였다. 다른 누구보다 무책임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돌아와야 했다. 아무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명은 그녀를 찾아가 근황을 전해주었다. 그래, 제 코가 석자였겠지. 그래도 그렇지. 그녀야말로 이 팀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대충 하라고,어차피 안 될 거니까.


자, 이대로면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망한다. 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영화는 특별한 메세지 없이 러닝타임이 끝나게 생겼다. 이들을, 영화를 어떻게 붙잡을까? 동앗줄 같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도망간 코치보다 열정적이고 모진 코치가 등장했다. 전에 있던 코치와 함께 수중 발레를 했고 안타깝게 다리를 다쳐 다시는 수중 발레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동정이나 연민, 부드러움을 기대하지 말지어다. 범죄수사물에서 흔하게 들어 본 좋은 경찰, 나쁜 경찰처럼 이 영화에도 좋은 선생님, 나쁜 선생님이 있다. 새로운 코치는 후자다. 시종일관 몰아붙인다.


그녀의 때려 박는 호통이 시작될 때부터 관객들은 킬킬거리고 웃기 시작했고 영화도 교통체증이 풀리듯 흘러갔다. 올림픽을 나간다면 저 정도의 훈련은 해야겠지 싶을 정도로 했다. 호통을 치며 엄격하고 까칠하고 원칙주의자인 캐릭터는 그리 특별하지 않지만 수중발레팀의 그들에겐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그들에게 대놓고 "멍청이들아! 이런 바보들을 가르치기 싫다! 제대로 좀 해!"라고 소리지르지 않았다. 강렬한 관심이자 외침. 드럽게 욕 나올 정도로 고된 일정이었지만 그들에게 탄탄한 기본기를 쌓아주었다. 물론 짧은 시간에 마음이 급하게 몰아세우는 게 과하다 싶을 때쯤 좋은 선생님이 다시 돌아와서 그들이 충분히 쉬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도 학생들을 버리지 않는 걸 보니 좀 더 기대를 걸어도 될 선생님이었던 모양이다. 코치와 선수들이 솔직한 사이라 좋았다. 남자들은 너무 힘들면 열이 받아 휠체어에 앉아있거나 말거나 코치를 물에 자빠뜨렸고, 그 코치 또한 팀원들을 사우나에 가둬놓고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다.



그들이 보여준 멋진 공연이, 그리고 금메달이라는 결과에 입을 틀어막고 놀랐다. 프랑스 팀으로 나가서 그런가 통이 크다. 금메달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여튼 잘 되면 좋다. 성취란 게 그렇지 않나. 할 땐 더럽게 힘들고 고생스러운데 그 짧은 순간이 참 시원하고 달다. 그 순간 공기가 가벼운 듯 하늘에 번쩍 들어올려진 듯 한 건 기분 탓만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를 들어올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들어올려준다. 물론 성취는 어차피 그렇게 자주 있는 일도 아니다. 무척 통쾌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다. 꼭 좋은 이야기만 할 수는 없다. 사랑한다는 게 꼭 좋게만 본다는 건 아니니까. 답답하고 기지배 같고, 무능력하다고 남편을 조롱하는 소리에 그럼에도 우리는 진실되고 서로를 믿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던 순간. 그가 그 순간을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그건 성취로는 느낄 수 없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가 내내 찾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빛났다. 코치와 선수들 모두 본 적 없이 웃었고 큰 소리를 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이 트는 새벽녁에 그들은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춰섰다. 고개를 드는 햇빛을 보고 자신들을 떠올린 건 아닐까. 우리 중 누구도 빛이 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달처럼 남의 빛으로 대신 빛날 수만도, 해처럼 매번 빛날 수도 없다. 하다 못해 해도 달도 우리 시선에서는 반나절이 지나면 저물어 버린다. 그러나 지금 빛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빛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별 뜻 없이 뜨고 진 해와 달이 어느 날엔 나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문제 중 무엇도 해결된 것은 없다. 그들의 금메달은 신문에서조차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달라진 게 있다. 그 남자들이, 그들의 가족들이 그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자녀들이 아빠를, 아내가 남편을, 치매걸린 어머니가 아들을 다시 보았다. 오래 두고 볼 일 아닌가. 오래 살고 볼 일 아닌가. 그들은 한번도 물 아래 가라 있었다고 영영 주저앉지 않았다. 우스꽝스럽고 숨이 차도 고개를 들었다. 헤엄이나 치고 물장구만 치면 되는 줄 알았던 수영장에서 그 남자들은 함께 하는 아름다움을, 살아 있는 기쁨을 수면 아래에서 끌어올렸다. 숨어 있던 인생이 물방울처럼 찰방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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