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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vefaith Oct 31. 2021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어느 가난한 왕국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고등학교 때 한문 선생님께서 어느 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본 적 있는지 물어보셨다. 읽진 않았지만 들어는 봤다고 답하고 나서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궁금했다. 막상 질문의 의도가 궁금했는데도 직접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은 채 시간만 흘렀다. 그 시절엔 불안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소리 내어 읽어봐도, 속으로 읽어봐도 의미심장한 느낌이다. 그런 기대를 안고 극이 시작됐다. 전차를 타고 블랑쉬가 극락에 내렸을 때 우리 또한 그녀만큼 혼란스럽다. 여기가 정말 극락이라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기는커녕,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작은 동네다. 블랑쉬의 옷은 허름한 극락에 비해 화려하다.


어느 시대든, 어느 가족이나 조금은 콩가루스러운 모습이 있다는 가설은 제법 잘 맞는 편이다. 한 지붕 아래 이렇게 다른 생각이 대립한다. 신경쇠약인 데다가 하나뿐인 동생 스텔라를 찾아왔면서 어쩐지 떠날 생각이 없이 뭉그적거리는 게 이상한 스텔라. 동생 형편이 넉넉지 않은 걸 알면서도 목욕도 자주 하고 집안을 자기 취향대로 꾸미기 시작한다. 스탠리와 행복하게 잘 사는 줄만 알았는데 종종 그에게 폭력을 당하고 화해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스텔라. 애초에 사랑한다면서 손을 올릴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데도 아이를 가진 자신을 때린 건 납득한다. 그녀가 스탠리에게 불평하는 건 블랑쉬를 함부로 대할 때 정도다. 고향 땅 얘기에 눈이 돌아가선 나폴레옹 법전을 운운하며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을 시전하는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 스텔라가 블랑쉬가 온 이후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블랑쉬도 집안을 마음대로 쓰는 것 같아 못마땅해하면서 벼르고 있었다.


균열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블랑쉬는 자기만의 환상에 빠져 거짓말을 일삼았고, 스탠리는 그 사실을 그의 친구 미치, 스텔라, 블랑쉬 본인에게 그 소식을 전한다. 미치는 블랑쉬와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정숙한 여자', '어머니에게 소개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며 이별을 고한다. 어쩌면 그와 만난 첫날, 블랑쉬가 담배를 빌리고, 영문학 선생님인 걸 부각하고, 결혼했던 사실은 속인 건 수많은 남자에게 똑같이 했던 수법이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그녀는 나이를 말하지 않고 해가 어두운 저녁에만 그를 만났다. 마치 그러면 그녀의 나이를 영원히 숨길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블랑쉬에게도 사연은 있었다. 그녀에게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 사랑에 대한 욕망을 준 게 첫사랑 앨런이었다. 그와 결혼했지만 그는 동성애자였고, 다른 남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가 자살하고 나서부터 그녀는 그에 대한 좋은 모습만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친절하고 매너 있었던 모습만 간직한 채 외로움으로 다른 남자의 친절에 기댔다. 그러다 그 시절 앨런처럼 어린 학생도 만났고, 학교에선 잘렸고, 살던 곳에서는 온갖 남자를 만난다는 평판을 견디다 못해 이곳에 온 것이다. 아마 그녀의 '신경쇠약'은 그녀 내면에서의 대립이었을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고, 이미 세상을 뜬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진실되고 순수한 사랑을 찾던 사람이, 과거에 매여 대용품을 찾느라 거짓말로 스스로를 에워싸는 게 아이러니다.


그녀를 가만히 살펴보자. 의도적인 거짓말, 미성년자와 부적절한 관계는 명백한 잘못이며 비난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남자를 많이 만났다는 건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녀가 관심을 표했을 때, 남자들 역시 거절하지 않고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녀에게서 자신의 욕망만 채우고 떠났거나 진심이었다고 해도 그녀의 거짓말이 멀어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잦은 만남과 이별은 욕망과 외로움, 진심 사이의 방황이었다. 화려한 여성편력이 부러움을 산 때도 있었지만, 화려한 남성편력에는 예나 지금이나 비난이 따라온다. 혼자만 좋아서 성사되는 만남이 없고, 혼자서 손뼉을 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미치는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도 모든 걸 감싸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나이가 많은 것이 문제는 아니라고 했지만 정숙한 여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그녀가 정숙한 여자라서 자신의 참아왔던 욕망을 채우겠다고 하더니 이내 그만두고 사라졌다. 신기했다. 정숙한 사람에겐 욕망이 억제가 되고, 정숙하지 않다는 걸 안 순간부터는 그 욕망을 억제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만약 그가 그녀를 받아들였다면 이야기는 험난하지만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블랑쉬가 거짓말하는 습관을 고치고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이 소문보다 그녀를 믿어준다면. 하지만 그녀의 소문은 모두를 수군거리게 했고, 그녀의 곁에 남은 사람은 없고, 그녀는 또다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더 견고한 환상을 쌓았다.


스탠리가 블랑쉬의 실체를 폭로할 때에도 즐기고 있는 걸 보면, 그에게 그녀는 가족이 아닌 외부인이자 적이다. 자신의 집을 그녀 마음대로 바꾸고 쓰는 게 싫고, 쥐뿔도 없이 거짓말만 일삼는 주제에 고상하는 게 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를 임신한 스텔라를 병원에 두고, 둘만 있는 집에서 블랑쉬를 강간한 것은? 힘으로 그녀를 짓밟고 싶다는 생각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다. 그녀가 수많은 남자를 만났기 때문에 자신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을까? 나폴레옹 법전에 따르면 아내의 재산이 남편의 것이니, 아내의 언니도 자신의 것인가?


그가 스텔라를 대하는 모습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녀는 그가 한밤중에 포커를 치든, 성질이 나서 그녀를 때리든, 후회하며 그녀에게 무릎을 꿇든, 그가 그녀를 원하면 언제든 모두 다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하고 아이를 가진 그녀가 힘들게 상을 차리고 있어도 도와주지 않는다. 이 집을 자신의 왕국이라고 외칠 땐 강렬한 말투에 비해 공허해서 관객석에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이 집이 그의 왕국이라면, 그는 왕이다. 그가 왕이라면, 그는 과연 어떤 왕인가?


코왈스키라는 이름을 쓰며 완전한 미국인이기를 꿈꾸는 욕망이 이뤄지는 게 쉬워 보이진 않는다. 그의 현실에선 때때론 스텔라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폴락이라고 불리고 있고 그의 왕국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더 많은 기회를 바라지만 그가 원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지키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쓰고 있다. 순간의 감정이나 욕망에 충실한 것 역시, 장기적인 여유가 전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현실이 따뜻하거나 자비로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빼앗고 쟁취하는 것이 더 익숙할 수 있다. 폭력으로 누르면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면서 그에게 빌지 않는가. 


그의 폭력은 상대적이다. 친구들과는 주먹다짐까진 하지 않으면서 스텔라와 블랑쉬에게는 너무 익숙하다. 그가 블랑쉬를 강간한 건 자신의 왕국에서 블랑쉬를 내보내기 위한 마지막 계획일 수도 있다. '나 하나쯤이야 더' 싶은 생각에, 그를 무례하다며 욕했던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악의 모욕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녀는 제 발로 이곳에서 나갈 생각은 없어 보이니까.


자신의 집이니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 그럴 수 있지만 스텔라를 때리고 블랑쉬를 강간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그나마 그에게 다행인 건 스텔라는 폭력에 비판의식이 없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녀는 스탠리에게 강간당했다는 블랑쉬의 말을 믿지 않고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아마도 블랑쉬는 아이를 가진 스텔라가 스탠리에게 맞는 걸 봤을 때처럼, 같이 떠나자고 말했을 것이다. 스텔라는 블랑쉬에게 마음 아파하면서도, 언니가 이상해서 하는 소리라고 합리화한 것이다. 스탠리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인데도.




비밀. 거짓말. 가정폭력. 강간. 자극적인 소재에 지루할 틈은 없지만, 진정한 가족이나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극락에 온 이들은 가난한 왕국에 살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걸 들키지 않으려고 환상 속에 사는 이가 있고, 이상한 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이가 있고, 몸으로 싸우고 부딪혀서 군림하려는 이가 있다. 사랑받고 싶고, 현실에 안주하고 싶고, 이름표를 바꾸고 싶은 어느 마음도 채워지지 않은 채.



- 이 리뷰는 문화예술의 소통을 강조하는 ARTinsight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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