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람마다 이야기에 취향이 있다면 내 취향은 소꿉친구 이야기다. 첫눈에 반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하자. 이들은 대부분 성격이 정반대이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잘 이해한다. 그건 다른 사람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시간과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친구라고만 생각하던 사이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혼란스러워하고 말을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답답하지만 가장 보기 좋은 구간이다. 고민을 하는 건 내 감정을 앞세워서 상대방과의 사이를 혹시 망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고민은 깊을수록 좋다. 오래 돌고 돌아도 좋다. 그래야 나중에 같은 마음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에 둘의 표정이 극적이니까.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이 서로 친한 친구라는 이름 아래 쌍방으로 삽질하는 걸 보는 게 그렇게 마음 따뜻하고 기분 좋을 일인가 원. 그 과정에서 그들의 세상이 넓어지고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렇다. 답답함에 누군가 등을 밀어주기도 하고, 스스로 갑자기 깨닫기도 하니까 우리는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혹시나 같은 마음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갈등이 있거나 고백을 했다는 이유로 소꿉친구는 멀어지진 않는다. 현실은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소꿉친구 '이야기'는 그렇다.
그러니까 소꿉친구에 진심이라 <너를 위한 글자>를 좋아하지 않을 순 없었다. 작가 지망생인 캐롤리나(이하 캐롤)는 고향 마나롤라에 10여 년이 훌쩍 지나서 돌아왔다. 바로 옆집에는 발명가이자 사람도 소음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투리가 살고, 조금 떨어진 이웃집에는 로맨스 소설 <절벽 위의 천사>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친구 도미니코(이하 도미닉)가 있다. 캐롤과 투리, 도미닉은 삼각관계다. 어릴 적 도미닉의 첫사랑은 캐롤이고, 캐롤의 첫사랑은 투리였다. 투리는? 과거에 그에게 캐롤은 시끄러운 옆집 사람이었고, 도미닉은 별로 안중에 없었던 모양이다.
도미닉에게는 좀 안 됐지만 캐롤과 투리가 이뤄질 거라는 건 이미 쉽게 알 수 있다. 삼각관계가 완벽하다고 하지만, 사실 상당히 불공평한 관계다. 한 명의 마음이 무너지고 아파야만 완벽한 관계가 될 수 있다. 캐롤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표현하는 투리에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투리 역시 캐롤이 내는 소음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캐롤은 투리를 위해 작은 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데 익숙해졌다. 그는 그녀가 내는 소리에 반응해서 불이 켜지는 조명을 엉겁결에 발명하는데 성공하게 됐다. 그렇게 기뻤으면서 한다는 소리는 '너한테 버릴게'라는 거다. '오다 주웠다'를 넘어서는 '너한테 버린다'를 시전해버린 것이다. 예전엔 외면했던 그녀의 현관문도 고쳐주고, 귀여운 소리가 나는 초인종도 달아주고. 잘 안 써지는 글보다는 물리학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도 해본다. 큰일 났어 투리야, 너 캐롤한테 이제 스며든 거야.
그런 투리에게 뚝딱거리는 질투까지 보여주게 하는 건 역시나 도미니코다. 매주 목요일 빨간 지붕이 있는 곳에서 도미닉과 캐롤은 모여서 같은 주제로 글을 쓰고 나눠보기로 했다. 도미닉이 먼저 '소나기'를 주제로 쓴 글을 나누고 있다. 우산이 없던 참에 만난 소나기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다고.
그 틈에 투리는 과학 서적에 나올 것 같은 소나기의 설명을 읊으면서 방해를 한다. "뜨거워진 열기로 가열된 지표면, 상승되는 기류를 통해 만나는 차가운 공기, 응결된 수증기가 만들어내는 비구름, 열적 순환이 활발해지며 내리는 소나기". 아무도 없는데 자기도 모임 중이라고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질 않나, 다른 사람이 한참 말하고 있는데 끼어들어서 딴 소리를 하질 않나. 친구가 없는 이유를 알 것도 같고. 그래도 밉거나 싫지는 않다.
도미닉과 투리가 대놓고 경쟁을 하는 사이에, 밝고 쾌활했던 캐롤은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집에 물건을 던져버리고 오열한다. 관객 입장에서는 셋이 투닥거리고 있는 걸 보면서 즐거워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너를 위한 글자'라는 작품명과 포스터를 보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 '너를 위한 글자'가 나오는지, 왜 글자를 만드는지. 알고 보니 캐롤은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 때문에 고향인 마나롤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가 글을 썼으면서도 도미닉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며 보여주지 않았던 것, 한 작품만 쓴다면 어떤 작품을 쓰고 싶냐고 물어보는 것, 요즘 하는 생각은 이렇게 바람을 느끼고 바다를 보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 투리에게는 어둠이 무섭지만 익숙해져야 한다며 조명을 다시 돌려준 것, 모두 시력을 읽고 글을 쓰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단서였다.
문을 닫고 소리를 내지 않고, 기운이 없는 캐롤을 보면서 오히려 투리는 마음을 열게 된다. 그가 발명을 하게 된 것도 사실은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고, 그녀를 기쁘게 만들고 싶어서였다. 이젠 정말 그녀에게 그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와중에 투리는 런던에 발명가로서 초청받았고 곧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도미닉과 투리도 경쟁 대신 협력을 하기로 한다. 투리는 눈이 보이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기계를 만들기로 하고 작가의 입장에서 도미닉의 조언을 구한다. 물론 캐롤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실험'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도미닉 역시 캐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즐겁게 글을 쓸 수 있도록 투리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도미닉도 신간을 써서 로마로 돌아가려 한다. 캐롤에게 가장 먼저 초고를 보여준다. 그의 신간에는 캐롤과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걸음 뒤에서, 골목길 어귀에서 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사랑이 실패했다면 그건 그 기다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발 다가가지 않고 기다렸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마음에도 가까워질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받을 수 있는 마음은 사랑이 아닌 고마움뿐이다. 그저 인연이 아니었다고 해도 좋고. 아마 그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글을 썼을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 글을 쓰고, 심지어 책을 한 권 완성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놀랍게도 정리가 된다. 그 안에 그에 대한 기억은 모두 남기고, 내가 했던 말과 행동, 표현하지 못했던 모든 것이 담기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할 만큼 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지.
투리, 캐롤, 도미닉 모두 각자의 고민을 안고 고향 마나롤라에 있었다. 투리는 훌륭한 발명가지만 소중한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람들을 보지 않았다. 사람들 역시 그를 괴짜라고 하면서 그는 더 고립되었다. 캐롤은 눈이 보이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시력이 남아있는 동안에도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쓴 글은 숨기고, 집 안에서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면서 글을 포기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도미닉은 작가로서의 방향성으로 고민했다. 책이 잘 팔리는 작가가 되면서 개성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받고선 어떤 글을 쓸지 막막해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에게 그 고민은 더 이상 고민이 아니다. 이제 투리는 런던으로 떠나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날 것이다. 발명의 원동력에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에게는 이제 사랑하는 캐롤, 멋진 형 도미닉이 있다. 도미닉은 캐롤에게 자신의 글로 사랑을 다시 꿈꾸게 됐다는 말에 용기를 얻고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애초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어려운데 스스로의 색깔까지 찾아버리면 작가로서 그는 큰 벽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캐롤은 도미닉과 투리 덕분에 눈이 보이지 않으면 감각이 더 섬세하게 느껴진다는 걸 이제 손끝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글을 쓸 수 있고, 작가가 될 수 있다. 무슨 글을 쓸지 혼자 고민하기보다 편하게 쓰면서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생겼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 그 풍경 속에 나타난 첫사랑이자 옛 소꿉친구들. 그 사이 감정이 오가고 적당히 투닥거리지만 별다른 싸움 하나 없다. 마나롤라와 세 사람의 시간은 그들에게 답을 건네줬다. 마음이 고프면 집밥을 찾고 옛 고향과 친구들을 찾게 되는 것 역시 별다른 이유가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고, 배 아프지 않고 응원할 수 있는 공간이자 존재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투리와 도미닉이 캐롤을 위한 글자를 만들지 못했더라도, 투리가 인정받는 발명가, 캐롤과 도미닉이 인정받는 작가가 아니었더라도 그들은 괜찮았을 것이다. 어차피 성공은 쫓으려 한다고 반드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럼에도 우리가 찾는 소중한 것들은 우리의 가까운 곳에 있다. '너를 위한 글자' 역시 집밥 같은 공연이었다. 뮤지컬은 대부분 자극적이라고 했던 바로 최근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 이 리뷰는 아트인사이트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