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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완 May 20. 2018

척하면 망




 이번에 출간된 책과 관련해서 라디오 생방송 전화 인터뷰를 하게 됐다.

 인터뷰라…… 전에 한 번이라도 해봤으면 좀 덜 했을 텐데 내가 인터뷰 같은 걸 해봤을 리가 없지 않나. 이거 무지 긴장되는 일이었다. 생방송 중에 헛소리라도 지껄이면 어쩌지? 목소리가 떨리면 어쩌지? 별별 걱정이 들었다. 아아, 안 하고 싶다.

 다행히 방송국에서 질문할 내용을 메일로 보내줬다. 그러면 그렇지. 방송은 다 대본이 있는 거였어. 질문을 훑어본 나는 답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답변이 너무 딱딱하면 안 되니까 내 주특기인 위트를 살짝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군. 대본은 나왔다. 이대로만 대답하면 아무 문제 없이 첫 인터뷰를 마칠 수 있다. 방송을 들은 청취자들은 나의 재치 있는 답변에 흠뻑 빠져 서점으로 달려갈 테고, 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돈방석에 앉게 된다는 아름다운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느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생방송 전화 연결이 되고 나는 부드럽고 낮은 음성으로 인사를 했다. 후훗, 지금 내 목소리 여유 있었어. 계속 이렇게 가는 거다. 인사를 나눈 후 정해진 대본대로 질문이 이어졌고, 나 역시 정해놓은 답변을 마치 방금 생각해 낸 듯한 말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그러나 인터뷰 중반에 이르자 그 계획에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진행자가 질문을 조금 바꾸자 나는 당황했다. 정해진 질문과 비슷한 질문이었지만, 질문의 뉘앙스가 달라져 정해놓은 답변은 맞지 않았다. 다른 답을 해야만 했다. 거기다 내 답변에 대해 추가로 질문이 들어오자 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나만 알아챌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으며 목소리 톤은 점점 높아져 경박스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어찌어찌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마지막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일이 터졌다. 마지막 질문은 생각도 안 해본, 원래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나는 무너졌다. 내가 한 대답은 이랬다.

 “저기, 그러니까 그 문제는… 어버버. 현실적인 상황은 무시할 수 없지만… 어버버버.”


 망했다. 완전 망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소리를 질렀다. 멍청이! 멍청이!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마지막 질문에 대한 그럴싸하고 위트 있는 답변이 몇 개 떠올랐다. 아아, 지금 떠오른들 무슨 소용인가. 첫 인터뷰, 좀 있어 보이고 싶었는데…… 망했다. 그러고 보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그 사람의 본모습이 나오는 것 같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다지 위트 있는 사람도 아니고 여유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내 글을 읽고 나를 유쾌하고 느긋한 사람으로 상상하기 쉽지만 직접 만나보면 별로 유쾌하지도 느긋하지도 않다. 남다른 생각을 하고 사는 것도 아니다. 뭐랄까 그냥 평범하다. 물론 거짓말로 글을 쓴 건 아니다. 내 속 어딘가에는 분명 유쾌하고 느긋한 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글에서 드러난 나는 편집된 나인 셈이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준. 글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고 몇 번이고 고쳐 쓸 수 있으니 편집이 쉽지만 말은 그렇지 못하다. 이번 인터뷰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내 밑바닥이 드러난 기분이다.   


 

 가끔 꿈을 꾼다. 어쩐 일인지 꿈속에서 나는 종종 바지를 잃어버린다. 팬티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팬티도 없이 아랫도리가 휑하니 벌거벗었다. 위에 입은 티셔츠를 끌어 내려 가려보려 해도 티셔츠가 짧다(벗으려면 차라리 다 벗지 위에는 왜 입고 있는 걸까). 그 상태로 사람들이 많은 곳을 헤매게 되고 당황한 나는 딸랑거리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꿈에서 깨어난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아마 두려움이겠지. 감추고 살았던 내 본모습을 들킬까 봐 불안한 마음이 이런 꿈을 꾸게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숨기고 싶은 찌질함, 추악함, 음란함, 비열함,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별거 없음’. 그것들이 내게 경고하고 있다. 언젠간 다 들통날 거라고. 딸랑딸랑.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편집을 한다. 감출 건 감추고 드러낼 건 드러낸다. 하지만 편집을 함에 있어 부풀리거나 없는 걸 만들어 내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척'하지 말자는 얘기. 있어 보이려고 애쓰는 건 좀 안쓰러운 일이다. 위트 있는 척, 여유 있는 척, 아는 척. 그러다가 망했다. 이제부턴 척하지 말자. 그래야 자연스럽다. 만약 또 인터뷰를 하게 되면 어떤 질문도 자연스럽게 넘기고 싶다.

 

 “그 점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내가 제일 많이 하게 될 대답이지 싶다.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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