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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 Jul 18. 2020

결혼 D-100일에서야 하는 고백

지금 나의 감정을 똑똑히 기억하기 위하여

약 두 달이 지났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지내니 다들 아무렇지 않은 줄 아는 것 같다. 아니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스스로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지내는 것 같다. 그 생각대로 정말 진짜로 아무렇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된다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도 불쑥 불쑥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과, 내가 똑똑히 보고 기억하는, 그래서 지워지지 않는 화려한 증거들이 여전히 나를 괴롭게 한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오빠를 만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오빠에게 다시 한 번 기회랍시고 내 시간과 사랑을 내어주었다.

걱정했던 것처럼 오빠는 반은 죄책감 반은 책임감으로 나를 만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난 그 역시 사랑이라 믿었다. 사랑 없이 그런 말과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런데 오늘은 오빠가 요즘들어 계속해서 소화도 안 되고 뭔가 불안하다고 했다. 오빠는 이유를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니 우리 둘 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오늘이 우리의 결혼을 100일 앞 둔 날이었다. (오빠는 대충 그쯤 되었겠지, 했던 날이지만 나는 그 날을 매일 매일 휴대폰 배경화면에 띄워놓고 있었다.) 우리 둘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가오는 그 날짜가 마치 아주 중요한 시험날이라도 되는 듯 여겼다. 얼른 끝내버렸으면 하는 마음과 동시에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은데 싶은 초조함과 불안함. 그 어디에도 "설렘"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오빠가 결혼에 대해서, 자기는 의지가 없는 것 같다며 이야기 했다. 나에게 이 말을 꺼내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지만, 어쨌든 대충 자기가 혼자 있는 시간이, 혼자 사는 지금이 좋다는 말을 하다가 나온 말이었다. 그냥 스쳐 지나가며 한 얘기였지만, 나는 드디어 오빠 마음을 잘 들여다봤구나,라고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내 속은 그 순간부터 복잡해졌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 날, 내가 오빠의 판도라 상자를 열기 전부터 느껴왔던 감정들이 새록새록 다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살아났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오빠는 지쳐했고, 결혼을 마치 하기는 싫지만 싫다고 피할 수는 없는 큰 과제 같이 느끼는 듯했다. 그런 오빠를 보면서 나는 좌절했고, 절망했다. 남들은 설레고 좋은 상상과 기대를 가득 품고 보낸다는 그 시기, 우리는 왠지 모르게 서로의 눈치를 평소보다 더 봐왔고, 꾸역꾸역 누가 떠밀려 하듯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더 솔직하게 들여다보기 위해, 아니 각자의 마음을 더 솔직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했고, 함께 기도했고, 전과 같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였다. "결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로. 불쑥불쑥 찾아오는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만 티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예전, 우리가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사랑하던 어느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결혼예정일"이 다가오는 것을 애써 무시할 때까지는.

작가님에게 수정본 파일을 보낼 시간이 다가오고, 플래너에게서 드레스 투어 일정을 잡자는 연락이 오고, 내 휴대폰 배경화면에 떡하니 D-100이 뜨기 전까지는.


비참했다. 분명 이별 앞에 나를 붙잡으며 울던 사람은 오빠인데. 한 번 더 기회를 준 건 나인데, 결혼이 더 이상 당장에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당당히 외치고 다니던 건 나인데, 이번에도 나는 나 혼자만 우리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여전히 나는 오빠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여전히 오빠는 나에 대한 미안함과, 절대로 자신은 5년동안 연애한 애인에게 결혼은 아직 아닌 것 같다, 헤어지자 말하는 나쁜 놈이 되기 싫어 그 말을 피하고 담아만 두는 찌질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지난 5년의 연애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시간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렸고, 그래서 어떤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는지를 너무 잘 알아버렸다. 모순되게도 그런 이유때문에 오빠는 나에게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빠가 그런 말을 절대 하지 못할 사람이란 걸 너무도 잘 아는 나이기에, 어쩌면 답이 보이는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한다. 결혼에 대한 의지는 없지만, 아직까지 나를 사랑한다는 그를 믿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우리 미래의 결혼을 기약하며, 그동안의 결혼 준비는 리셋하고 다시 "연애만 하는 사이"로 돌아갈지.

사랑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진 혼자가 좋다는 그의 이기적이고 배신감 넘치는 행동에 정을 뚝 떼고, 눈 질끈 감고 이제는 정말 "진짜 이별"을 고할지.


나는 아직 모든 게 어렵고 두렵다. 어떤 선택을 하든 나머지 선택에 대한 미련과, 내가 한 선택이 맞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이 동시에 나를 힘들게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정말 결정해야 한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질 것이고, 선택에 뒤따라오는 아픔과 후회, 혹은 시련의 순간들 또한 온전히 받아들이고 직면해야 한다.


더는 미루거나 피하지 않으려고 나는 오늘 이 글을 쓴다. 내 감정을 감추고, 덮어버리지 않으려고 이 글을 쓴다. 내일은 결정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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