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I시대 전문성에 대한 고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를 보다 보면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같은 재료, 같은 조리 시간, 같은 주방. 조건은 평등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결과는 전혀 평등하지 않다.
어떤 요리는 한 입에 완성도가 전해지고, 어떤 요리는 장황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의도가 이해된다.
그 격차는 단순히 손기술의 차이가 아니다. 손은 마지막 출력 장치에 불과하다.
진짜 차이는 조리를 시작하기 전, 셰프의 머릿속에서 이미 결정된다.
재료의 해석, 조리 시퀀스, 변수에 대한 대응책까지. 숙련된 셰프는 가스 불을 켜기 전 이미 사고(Thinking) 속에서 요리를 수차례 끝내 놓는다.
나는 이 장면에서 최근 테크 씬의 화두인 ‘바이브 코딩(Vibe Coding)’의 실체를 보았다.
AI가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코딩이다.
이제 복잡한 로직도 자연어 몇 줄로 생성된다.
언어의 문법을 몰라도, 시스템 구조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작동하는 결과물을 손에 쥘 수 있다.
겉으로 보면 개발의 문턱이 낮아져 요리가 대중화된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는 요리 세계에 밀키트와 고성능 주방 기구가 보급되었을 때와 닮아 있다.
“누구나 셰프가 될 수 있다”는 수사 아래 수많은 이들이 요리를 시작했다. AI 시대 역시 누구나 코드를 ‘만들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흑백요리사>가 증명하듯, 도구의 대중화가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도구가 고도화될수록,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수준 차이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두가 같은 모델(Gemini, Claude, GPT)을 쓴다. 마치 흑백요리사에서 모든 셰프가 같은 주방 설비를 공유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AI가 내놓는 결과물의 밀도는 천차만별이다.
• 어떤 결과물은 당장 동작하지만 확장 단계에서 무너지고,
• 어떤 결과물은 설계 의도가 선명하며 견고하다.
이 차이를 흔히 ‘프롬프트 센스’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센스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깊이가 인터페이스를 통해 발현된 결과다.
차이를 만드는 핵심은 두 가지다.
1. 문제 정의의 해상도: 문제를 해결 가능한 단위로 분해하고, AI가 최선의 추론을 할 수 있도록 맥락적 제약을 설계하는 능력이다. 요리로 치면 레시피를 보기 전 “이 요리가 어떤 페어링 속에서 어떤 경험을 줄 것인가”를 규정하는 단계다.
2. 선택의 안목 (Curatorial Insight): 숙련된 전문가는 AI의 출력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수많은 생성 결과 중 무엇이 ‘옳은 구조’인지 감별해내는 직관적 안목이 숙련도의 핵심이 된다.
‘바이브 코딩’이라는 용어는 종종 즉흥적인 감각으로 오해받곤 한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안정적인 바이브 코딩을 구사하는 이들은 결코 감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들의 ‘바이브’는 수만 번의 시행착오와 데이터가 축적된 휴리스틱(Heuristic)의 결과물이다.
숙련된 디자이너와 개발자는 AI의 결과를 보며 끊임없이 추론한다.
• “이 로직이 지금의 맥락을 완벽히 반영했는가?”
• “조건이 변했을 때 시스템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 보장되는가?”
이 태도는 셰프가 조리 중간에 맛을 보며 미세하게 화력을 조절하는 것과 같다.
겉으로는 즉흥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기저에는 탄탄한 구조적 이해가 깔려 있다.
결국 바이브 코딩은 ‘감’으로 하는 코딩이 아니라, ‘구조적 직관’으로 하는 코딩이다.
AI는 구현의 단계를 자동화했을 뿐, 숙련도 자체를 제거하지 않았다. 단지 숙련도의 위치를 이동시켰을 뿐이다.
• 구현의 숙련 판단의 숙련
• 문법의 숙련 구조의 숙련
• 손의 숙련 사고의 숙련
현대의 셰프에게 칼질보다 재료의 공급망과 고객의 총체적 경험을 설계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듯,
AI 시대의 개발자와 디자이너에게도 더 총체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수행자’에서 ‘설계자이자 심판자’가 되어야 한다.
전자레인지와 밀키트가 요리를 일상화했지만,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은 여전히 셰프의 몫이다.
AI가 ‘작동하는 코드’와 ‘보기 좋은 UI’를 생산하는 비용을 0원에 가깝게 만들지라도,
사용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한 끗(Edge)’은 여전히 인간의 사고 깊이에 비례한다.
이제 질문은 바뀐다.
밀키트 수준의 결과물이 시장에 넘쳐날 때, 우리는 무엇을 더 깊이 있게 끌어내어 전문성을 증명할 것인가?
기술이 상향 평준화된 시대,
전문가의 생존 전략은 역설적으로 기술 바깥의 설계와 본질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고민의 지점에서 다음 글을 이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