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마 야요이
커다란 노란 호박 가득히 검정 땡땡이가 그려진 작품, 혹시 본 적 있나요? 우리 나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도 늘 자리하고 있는데요, 바로 "야요이 쿠사마"라는 일본 미술가의 작품입니다. 독특한 작품에 만만치 않게 미술가의 개인적 배경도 화제가 되어 있는데요, 그건 바로 그 미술가가 '미쳤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고, 지금도 정신 병동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대표작인 ‘땡땡이 호박’은 실로 정신이 없고요. 그녀의 삶과 작품은 "미친 할머니가 만든 땡땡이 호박"이라는 잊기 힘든 스토리를 만들며 유명세를 탔습니다.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예술가의 광기’라는 클리셰가 있습니다. 정신병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굳어진 빈센트 반 고흐, 여성혐오와 병적 질투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에드바르 뭉크, 가난과 정신적 질병으로 불행한 삶을 살아 ‘한국의 고흐’라는 별명을 얻은 이중섭까지 그 리스트는 광범위하죠. 이성의 컨트롤을 벗어난 곳에서 붓을 휘두른 작가들이 풍기는 비범한 느낌이 ‘예술적’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정신병을 겪으며 정신착란을 불러 일으키는 듯한 작품을 선보이는 야요이 쿠사마는 이런 '광기에 사로잡힌 예술가'의 계보를 잇는 듯 합니다.
그러나 쿠사마의 작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녀의 작품에서 ‘광기’만이 부각되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제가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아픔, 즉 ‘광기’를 다루는 쿠사마의 태도에요. 부끄러워하거나 숨기거나 두려워 하지 않고, '정신병'이라는 어려움을 똑바로 마주했던 그녀를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단 한 순간도 뒷걸음치지 않고 당차게 나아갔던 그녀의 삶을 함께 따라가 보지 않으시겠어요?
“나를 구속하던 족쇄를 풀고, 일본을 떠나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쿠사마는 일본의 어느 한적한 시골, 상당히 부유한 가정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한 세기가 넘도록 광활한 땅에서 작물 재배와 판매를 담당하는 유서 깊은 집안이었고, 2차 세계 대전 중이었음에도 지역의 학생들이 견학을 올 만큼 크고 멋진 온실을 여섯 개나 소유하고 있었어요.
얼핏 좋은 환경으로 보이지만, 어린 쿠사마는 자신의 삶에 전혀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과의 관계 때문이었지요. 일종의 데릴 사위였던 쿠사마의 아버지의 바람기는 멈출 줄 몰랐고, 쿠사마의 어머니는 막내딸에게 아빠의 밀회를 염탐하러 오라고 지시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딸이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면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곤 했습니다. 어린 쿠사마는 부당함을 느꼈습니다. 남자는 밖에서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고, 여자는 집 안에서 그 상황에 대해 질투하고 분노하며 앉아만 있는 것은 남녀 차별이라 생각했고, 이런 관습이 당연한 일본을 답답해했습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어린 쿠사마는 온실에서 꽃을 그렸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초기작은 남에게 주거나 스스로 불태워버려서 몇 점 남아 있지 않아요.)
쿠사마가 바라는 것은 집을 떠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미래는 일본의 상류층 아가씨에게는 선택 가능한 항목이 아니었어요. 그녀의 미래는 얌전히 지내다 좋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지요. 쿠사마는 끝없이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집으로는 중매 사진이 매일 날아 왔습니다.
게다가 쿠사마의 어머니는 딸이 미술을 전공하면 결국 굶어 죽거나 자살에 이를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딸이 그림 그리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요. 그렇게 미술이 좋으면 수집가가 되면 되지 않겠냐고 회유했습니다.
그럼에도 쿠사마는 더 넓은 세계를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본을 떠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구체적인 계획으로 바꾼 것은 미국의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화집을 우연히 접하면서였어요. 뉴멕시코의 풍경이 그려진 오키프의 화집을 보고 쿠사마는 그 길로 6시간에 걸쳐 기차를 타고 도쿄 신주쿠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가서 오키프 주소를 알아내어 편지를 보냈습니다. 1955년 11월 15일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일본 여성 화가입니다. 열세 살에 시작해서 13년 동안 그림을 그려왔어요. 지금 저는 당신이 있는 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고, 화가로서 길고 어려운 인생의 첫 걸음을 뗐을 뿐이지만, 미술가로서의 삶에 다가가는 방법을 당신이 내게 알려주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미국에서 이미 최고 위치에 오른 화가 오키프는 듣도 보도 못한 일본의 여자아이에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나아가 오키프는 자신의 뉴욕 딜러들에게 쿠사마가 동봉한 수채화를 보여 줬고, 그 중 하나는 구매되기도 했지요. 친절한 미국인 화가의 호의에 쿠사마는 반드시 미국에 가리라 다짐했습니다. 쿠사마는 후에 오키프가 아니었으면 자신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라 회고했습니다.
“나는 지금 가진 것이 없지만, 바로 여기 뉴욕에서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은 손에 넣을 것이다.”
1957년 11월, 쿠사마가 스물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드디어 떠날 수 있었습니다. 여행 짐을 꾸리면서 허용 범위 밖의 달러는 옷에 꿰매고 신발에 감췄습니다. 60 벌의 실크 기모노와 2000여 점의 드로잉도 챙겼습니다. 가져간 돈이 모자르면 그것들을 팔아서 먹고 살 계획이었던 거죠. 그녀가 떠나기 전 날, 고향에서는 마츠모토 시장이 주최하는 성대한 환송회가 열렸고, 떠나는 날 아침 기차역에는 거대한 인파가 몰렸습니다.
장밋빛 삶을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뉴욕에서의 삶은 생각보다도 고되었습니다. 가져간 돈은 금방 다 써버렸어요.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미국의 경제가 좋지 않아 물가가 대폭 상승했던 때였거든요. 그래서 정착 초기에 쿠사마는 돈이 없어 굶는 날이 많았습니다. 굶지 않는 날은 친구가 준 땅콩 한 줌 주었거나 생선가게에서 버린 생선 머리와 야채가게에서 버린 거뭇해진 양배추 겉잎으로 국을 끓여 먹는 운좋은 날이었지요.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거주하던 작업실은 사무실 건물 꼭대기 층이라 오후 6시부터는 보일러가 꺼졌습니다. 쿠사마의 침대는 누군가 길에 버린 낡은 문짝이었고, 담요는 하나뿐이었어요. 매일 추위, 배고픔, 불편함과 싸워야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작품도 난항을 겪었습니다. 당시 뉴욕 미술계는 잭슨 폴록이나 마크 로스코와 같은 추상표현주의가 휩쓸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캔버스를 하얀색 그물로 뒤덮은 쿠사마의 작품은 그들과는 너무도 달랐지요. 권위 있던 미술제였던 휘트니 미술관의 연례전에 뽑히기를 바라며 작품을 들고 갔지만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유독 바람이 심한 날, 쿠사마는 반품된 커다란 작품을 들고 40 블록이 되는 길을 왕복한 뒤 죽은 듯이 잠을 잤습니다.
그래도 쿠사마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편지로 인연을 맺었던 오키프는 쿠사마를 찾아왔고, 그림을 들고 화랑들을 돌아다녀 보라고 조언했습니다. 쿠사마는 그 말대로 드로잉을 들고 뉴욕의 화랑 여기저기를 직접 찾아 다녔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야요이 쿠사마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왔어요. 잠깐 제 그림을 보여드려도 될까요?"
혹시라도 사겠다는 화랑 주인이 있으면 몇 점을 더 얹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무모하리만큼 용감한 그녀의 행보에 드디어 반응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59년 10월, 맨하튼 10번가에 위치한 브라타 갤러리가 쿠사마의 첫 개인전을 열어 주었습니다. 천정까지 닿는 크기의 회화 다섯 점을 건 이 전시는 금방 입소문을 탔고,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언론이네느 호의로 가득 찬 평론이 실렸고, 작품도 판매되었습니다.(한 점은 미니멀리즘의 대가 도널드 저드가 샀다고 하네요.) 일이 될라 하면 금방이지요. 이 전시로 물꼬가 트였습니다. 미국 전역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 등의 유럽 각지로부터 전시 초대가 줄을 이었어요. 그녀는 전시 오프닝에 금색 기모노를 입고 등장하여 주목 받기를 즐겼습니다.
이후 쿠사마의 행보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장르를 더욱 넓혀서 퍼포먼스, 영화, 패션에 도전했습니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성적으로 굉장히 도발적이었고, 쿠사마는 혹시나 있을 법적 문제에 대비해 5~6명의 변호사를 선임하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그 무렵 사업체도 몇 개 설립하였는데, 그 중 특히 패션 사업은 돈을 끌어 모았습니다. 점박이가 있거나 둥그렇게 뚫어 놓은 쿠사마의 옷들은 미국 전역 400 개의 매장에서 판매되었습니다. 뉴욕의 블루밍 데일 백화점은 ‘쿠사마 코너’를 만들었고, 그녀는 6번가 코너에 ‘쿠사마 샵’을 냈습니다. 그녀가 디자인한 드레스는 1960년대 뉴욕에서 한 벌에 2000 달러에 팔렸지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엠파이어 스테이틀 빌딩에 올라가 뉴욕을 내려다보며 했던 다짐대로, 쿠사마는 뉴욕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었습니다. 단 한 가지만 빼고요. 쿠사마가 손에 넣지 못한 것은 바로 건강이었습니다.
“나는 요즘도 매일 고통, 걱정, 공포와 싸웁니다.”
쿠사마는 십 대 무렵부터 환각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와 농가를 방문했을 때는 호박이 말을 걸었고, 집안 온실에 들어갔을 때는 온갖 꽃들이 대화를 건넸다고 합니다.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보고 눈을 감았다 뜨면 테이블과 바닥, 천장까지 그 무늬가 퍼져 종국에는 쿠사마의 몸까지 뒤덮어 육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곤 했지요.
뉴욕의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하얀색 배경에 하얀색 그물이 가득한 작품 또한, 그 무렵 자주 겪던, 그물이 온 몸으로 퍼지다가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환각 증세에서 비롯한 작업이었지요. 앰뷸런스에 실려 가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결국 쿠사마는 건강에 발목이 잡혀 한창 잘 나가던 리즈 시절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1973년, 그녀가 마흔 살이었을 때였습니다.
그녀의 정확한 병명은 “이인증”입니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느낌이라고 쿠사마는 설명합니다. 땡땡이 무늬가 천장에 보이다가 벽과 땅으로 퍼지고, 자신의 몸까지 뒤덮어 자신이 사라지는 환각. 더불어 몸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 거기에 이상한 소리까지 종종 들리는 것이 그녀가 겪는 증상입니다. 의학은 이인증이 정신이 너무 심한 고통을 겪을 때, 우리 몸이 그 고통을 차단하기 위해 발명하는 병세라고 설명하지만, 정작 쿠사마는 이인증이 돌발하는 순간이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쿠사마는 자신의 병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자기의 정신병이 불러오는 환각을 매일 반복해서 재생산합니다. 고통의 실체를 직면하는 것이죠. 그녀는 “병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 작품을 만드는 일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정신병 자체가 아니라, 정신병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쿠사마 야요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트레이드마크인 '땡땡이 호박'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정신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그것을 마주해서 작품을 통해 극복해내려 했던 쿠사마의 태도 때문이었으니까요. 우리가 쿠사마의 태도에 주목할 때 비로소 그녀의 현란한 작품 표면을 넘어 그 안에 담긴 괴로움에 맞서는 용기, 어쩌면 취약점일 수도 있는 부분을 드러내는 당당함, 자신의 한계를 딛고도 계속 전진하는 도전 정신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미친 여자의 정신 없는 작품’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 쿠사마의 삶과 작품의 의미는 훨씬 무겁고 깊지요?
“시간이 잠깐만 멈추었으면.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쿠사마는 요즘도 정신 병원과 건너편에 위치한 스튜디오를 오가며 작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하루는 단조롭습니다. 아침 7시에 피검사, 10시에 스튜디오로, 6~7시까지 일, 저녁에는 글을 쓰고 9시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반복되는 일과입니다. 규칙적으로 먹고 자면서 몸관리를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육체적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습니다. 요즘에는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며 죽음에 대해 부쩍 많이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저 옆방으로 가는 것이라 확신하지만, 그럼에도 쿠사마는 자신에게 시간이 더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여전히 영감이 솟아나기 때문이지요.
아흔의 쿠사마는 오늘도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들고 산책을 하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떠오른 생각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 곁에 영감을 주는 인생의 선배로 남아주면 좋겠습니다.
(본 글은 제가 지학사 고교독서평설 2020년 1월호에 게재한 내용을 다소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