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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ro Jan 09. 2023

네덜란드에서 죽음을 경험하기

이럴 땐 어딘가에 신이 있다고 믿고 싶어 진다.

'죽음'이란 참 이상한 개념이라고 느껴진다.

참 멀게만 느껴지다가도 사실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가깝다고나 할까.

우리가 평상시의 일상생활을 하면서 죽음에 대해 얼마나 골똘히 생각해볼 시간을 가지긴 할까?


2023년, 새해의 두 번째를 맞이하는 아침에 나는 내 파트너의 소꿉친구이자 정말 절친 중의 한 명으로서 나와도 꽤나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 29살의 창창한 내 친구 M은 평소에 잔병치레도 없이 건장했으며, 무에타이와 킥복싱을 즐겨하고 여느 또래와 같이 여행, 그리고 축제나 콘서트 가는 것을 좋아하는 네덜란드 청년이었다. 

사망의 원인은 허무하게도 폐렴. 

분명 새해전야 때까지만 해도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며 금방 나아질 거라고 파티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고까지 했는데, 그때까지 모두가 그냥 심한 몸살독감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증상들은 이틀 만에 급격히 악화되어 호흡곤란을 겪다가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정말 허무하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되질 않을 만큼 그렇게 M은 그토록 사랑하던 세상과 친구들과 가족들을 뒤로하게 되었다. 


소식을 듣고 무너져 내리며 흐느끼는 파트너의 어깨를 감싸 안고 서로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고 M의 죽음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으며 무엇보다도 뭘 해야 할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어렸을 적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던 것을 제외하면 나는 내게 가까운 죽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고 나니 갑작스러운 공포감과 걱정이 물밀듯이 몰려들어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던 파트너는 함께 자라온 다른 소꿉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몇 번씩이나 너를 혼자 두어도 되겠느냐고 묻는 글썽이는 그의 눈빛에 나도 눈물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20여 년을 함께 자라온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서로가 함께 있어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나는 대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무엇이든 간에 뭔가 한눈팔 일거리를 찾아내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봤을 때 M이 입고 있던 옷가지나, 미소, 함께 듣던 음악이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될 것만 같았다. 


약 4시간을 내리 청소하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다 보니 꾹꾹 눌러 담겨두었던 감정이 다시 북받쳐와 눈물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다른 일거리를 찾아 헤매도 마주해야만 하는 진실이라는 걸 깨달으며 다시 혼자 엉엉 울기 시작했다.


 



1월 4일, 우리는 화장터에 모두 모이기로 했다. M에게 작별인사할 시간을 가질 기회였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평생 내 주변에서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한국에서도 물론 없었으니 네덜란드에서는 이게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어리둥절했지만 분위기상 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눈치껏 어두운 옷을 챙겨 입고 파트너와 함께 화장터에 도착하여 어느 방으로 안내되어 따라가 보니 닫혀있는 관 주위로 이미 도착한 다른 친구들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 건강했고 너무 어렸으며 너무 갑작스러웠다. 가족들은 마지막에 행해진 응급처치들 탓에 몹시 망가진 시신을 존중하기 위해 관을 닫아두기로 결정하였다고 설명했다. 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그들의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다시 쏟아졌다.


이내 우리에게 펜이 나누어지고 한 명 한 명씩 관 주변과 위에 짧은 작별인사를 편지처럼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되었다. 나도 무릎을 꿇고 앉아 한 자 한 자 눌러 내 마음을 담아 짧은 편지를 썼다. 얼마나 고마웠으며 너를 만나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부디 그곳에선 네가 그토록 좋아하던 푸른 하늘과 맑은 바다에서 마음껏 수영할 수 있기를 온 마음을 다해 바랬다. 




나는 신을 믿지 않고 내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무신론자이며 회의론자에 가까울 정도로 사후세계 같은 것들은 마음기 댈 곳이 없는 이들이 만들어낸 허상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현생을 살기에도 벅차고 힘든데 사후세계까지 생각하고 고민할 겨를이 없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1월 7일, 내 생의 첫 장례식이자 내 친구가 영영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여행의 송별회에 참석하는 그날 생각이 바뀌었다. 내세가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세상은 M의 세상을 누릴 자격이 없었다. M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순수하고, 솔직하고, 착했다. 정말 착했다. 그래서 더 억울하게 느껴졌다. 왜 하필이면 M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길 간절히 바라다보니 내가 기도라는 걸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화장터와 같은 건물 한편에서 진행된 장례식은 총 약 250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강당 같은 곳에 모여 시작되었다. M은 물론 그의 가족들도 종교적인 편은 아니라 무교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두 개의 큰 TV스크린에선 살아있을 당시의 여러 사진들과 동영상이 슬라이드쇼로 재생되고 있었다. 슬픔이 흐르는 공기가 너무 무거워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앉아있을 만큼의 크기는 아니라 몇몇의 자리는 배정되었는데, 내 자리도 배정된 자리 중의 하나였다.


장례식이 시작되기 전 나와 나의 파트너를 포함한 친했던 친구들이 양옆 두줄을 섰고 그 사이로 6명의 또 다른 가장 친했던 친구들이 관을 들고 입장했다. 며칠 전에 편지를 쓰며 봤었을 때보다 다른 메시지들로 더 가득 찼으며 관의 뚜껑은 평소에 M이 좋아하던 문구인 '하쿠나 마타타'가 그라피티 스타일로 그려져 있었다.


이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하더니 눈물이 주체할 수가 없을 만큼 흐르기 시작했다. 강당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흐느낌에 나도 동참하여 M의 마지막길에 안녕을 고했다.

2시간여의 장례식동안 M의 부모님, 형, 여동생, 친구 대표 1명, 그리고 직장동료 1명이 차례대로 마지막 인사를 담은 짧은 발표 같은 담화를 했다. M의 가족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했으며, 심지어 애써 농담을 섞어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모두 네덜란드어로 진행되어 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나마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그들의 진심 어린 메시지는 전달되었다.


장례식의 마지막은 한 명 한 명씩 강당을 나서며 가족들과 M의 관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M과 친하게 지냈음에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었던 그의 가족들을 뜨겁게 끌어안으며 당신의 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이었는가를 강조했다. 특히 M의 부모님이 꽉 끌어안아주실 때 나는 또 한 번 흐느꼈다.


 



M은 생전 정말 재미있는 친구였다. 둥글둥글한 성격에 함께 있으면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금방 가깝게 느껴질 만큼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파티하는 것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고, 아무튼 사람을 무척 좋아하던 친구였기에 M의 절친한 친구들은 M의 마지막 송별회를 거창하게 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마지막 파티를 열 장소를 대관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에 모두 마음을 합치니 금방 어떻게 자리가 마련이 되었다. 그렇게 250여 명의 사람들은 장례식장을 떠나 파티장소에 모였고 적어도 맥주 한두 잔씩은 M을 기리며 마시게 되었다.


프로젝터를 통해 재생되는 그의 생전모습들과 그가 가장 좋아하던 플레이리스트 음악에 맞춰 우리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장례식들에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하나 분명한 건 M의 장례식은 여느 다른 장례식들과는 다르다는 것, 그것 하나는 분명했다.


특히 M의 어머니는 M이 가장 좋아하던 음악에 맞춰 춤을 추셨다. M의 영감이 되는 (inspirational) 성격이 그의 어머니를 똑 닮았음을 알 수 있었다. 생전 M은 나를 볼 때마다 남들이 평소엔 알아채지 못하는 점들을 알아봐 주며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존재였다. M의 어머니 또한 M은 떠났지만 그의 영혼은 우리와 함께하고, 그가 우리에게 남긴 영향력을 기리기 위해 춤을 춰야 한다고 하셨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은 그 누구도 헤아릴수가 없다던데, 그의 어머니는 글썽이는 눈으로 박자에 맞춰 연신 춤을 추셨다.


물론 M의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이 지난 며칠 동안 마를 새 없이 눈물을 흘린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연설을 하시다가도 몇 번이나 갈라지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셨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M의 인생을 말 그대로 축하(celeberation)하고 싶다고 했다. 어찌나 아름다운가. 우리 가족들은 과연 내가 세상을 예상치 못하게 떠났을 때에 이렇게 그들처럼 강하게 견뎌낼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거다. M의 단단한 마음과 안정적인 세계관, 그리고 그의 정서는 그의 단단한 가족관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청년 M이 아름다운 청년이 된 이유가 모두 더불어 설명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특정한 신을 믿진 않더라도 다음 세상 혹은 내세가 있다고 믿고 싶다. 그래서 M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다시 만났을 때엔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웃고, 우리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던 아티스트들과 우리의 공통 관심주제였던 여행, 지구와 인간들,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더 하고 싶다.


세상만사에 치여 인간애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내게 그의 죽음은 사고의 전환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매일 아침 운전하며 바라보는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볼수 있다는게, 좋아하는 음악과 음식을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나눌수 있다는것이, 그리고 내게는 내일이 있다는것이 감사한 일인줄은 그 전에는 정말 알지 못했다. 이제 나는 남은 생의 나날들이 곧 M이 뒤로 하고 떠나기 아쉬웠을 나날들이었음을 알기에 더 열정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살아가기라 다짐했다. 늘 나중에 해야지, 다음번에 해야지 미루던 여행들도 더이상 변명거리 없이 떠날거다. 그리고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M을 떠올리는게 그를 기리는 나만의 방법이 될거다. 


너무나도 이른 나이로 안타깝게 떠나게 된 M, 다음 생엔 꼭 우리 더 따뜻한 나라에서 만나서 해변가에서 더 많이 맥주를 나눠마실수 있길 바라. 이제 편히 쉬어. 사랑해. 꼭,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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