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터 Y Jul 16. 2021

기타노 다케시의 <그 남자 흉폭하다>

  작년에 <기쿠지로의 여름>과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를 보고,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를 다시 봤다. 그러고 난 다음 내가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영화적인 호기심이 무언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 녹아있다는 인상을 받아 <그 남자 흉폭하다>를 다시 봤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는 내가 고심하고 있는 문제가 녹아있다. 그 문제를 다룰 생각은 없다. 이 문제는 연출을 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가져갈 숙제다. 다만 <그 남자 흉폭하다>를 다시 보고 기타노 다케시가 데뷔작부터 예술 영화를 찍었다는 것을 느껴서 그의 영화 전작을 전부 관람하고 각각의 영화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건 영화가 내뿜는 에너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데뷔작으로 <그 남자 흉폭하다>같은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감독은 그저 천재적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     


   기타노 다케시의 인터뷰나 여러 비평들을 찾아보았지만 흥미로운 글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어떤 도움 없이 순전히 나의 감각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려고 한다. 영화의 시작은 다시는 등장하지 않을 노숙자로 시작한다. 바보 같은 얼굴. 곧이어 돌발적으로 축구공이 프레임 안을 침투한다. 노숙자를 괴롭히는 고등학생들. 내가 생각할 때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감상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이상하다고 느껴진 순간을 부여잡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다른 영화도 비슷하겠지만). 노숙자를 괴롭히던 아이가 집에 도착하는 익스트림 롱 쇼트에서 아이가 집으로 들어가자 쇼트는 변화하지 않고 아즈마가 프레임에 들어온다. 쇼트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연속성은 이상한 감각을 자아낸다. 뒤이어 아즈마가 형사라고 소개했을 때 그는 마치 노숙자를 괴롭히는 장면을 보고 학생의 뒤를 쫓아온 것이라는 인상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이 시간적인 연속성은 아즈마가 빨라도 너무 빨리 등장한다는 이야기다. 그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면 초등학생 아이들이 작은 배에 쓰레기를 던지는 것을 보게 된다. 기타노 다케시는 아이들에게 어떤 불신이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음악이 깔리고 아이들이 사라진 화면에 아즈마가 등장한다. 마치 아이들이 아즈마로 되살아나서 다가오는 것처럼. 음악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아즈마는 경찰서로 향한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구도다. 야외이기에 카메라는 뒤로 빠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배우가 멀어지면 정확한 구도를 잡을 수 있는데 기타노 다케시는 일부러 머리를 잘라버렸다. 굉장히 이상한 구도. 한 인격체를 잘려버린 구도.      


  아즈마의 동생 아카리는 정확하게 영화에서 설명하진 않지만 정신 병원에 입원해있다가 퇴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건 음악이다. 앞에 경찰서에 출근할 때의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음악. 퇴원하는 순간에 쓰일 음악이 아니다. 마치 퇴원이 어떤 불길함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처음엔 아키라와 아즈마가 부부라고 생각했다. 여동생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는데 아키라를 퇴원시키고 난 다음의 장면에서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남자와 여자가 싸우는 것을 아즈마의 상사 경찰이 중재를 한다. 아즈마가 끼어들어 남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기둥서방은 자기의 여자를 돌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대사로 인해 아카리를 아즈마의 아내로 느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기타노 다케시의 데쿠파주 원리를 이 장면을 찍으면서 배웠거나 혹은 애초부터 그는 이 원리를 이용하여 영화를 찍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관객들은 아카리를 아내로 알고 있어서 뒤에 아카리가 잠자리를 한 남자와 아즈마가 대면했을 때 굉장히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여동생이라고 하더라도 감정의 강도는 세지만 아내라고 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벌써 3개의 장면이 마치 잉여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노숙자를 폭행하는 고등학생들, 두 번째 남자와 여자의 싸움을 중재하는 장면, 세 번째 아카리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하고 아즈마에게 들킨 장면. 이 잉여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이 이 영화를 예술 영화로 만드는, 아니 이 장면들이 없으면 이 영화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이 영화가 기이하다고 느껴지는 지점은 영화를 따라가는 우리가 정확히 어떤 것을 따라가고 있는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마약 사건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종종 샛길로 빠지고, 심지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추격전은 마약 사건을 다루는 영화라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리듬감을 보여준다. 내가 생각할 때 아즈마는 단순히 형사라는 직업으로 인해 노동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 노동 행위 속에서 실리를 추구한다. 살인 사건 현장에 가서 돈을 빌리거나 혹은 마약을 공급하는 양아치를 잡아서 때리고 싶은 만큼 시원하게 때리는 것 말고는 우리는 별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그가 반드시 범인을 잡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 지점 동료 형사가 자살 혹은 타살로 생을 마감한 뒤에는 적극적으로 수사를 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료 형사의 복수라는 명분.     

 

  하지만 가즈히로는 아즈마가 설계한 명분을 얻기 위한 덫에 걸리지 않는다. 가즈히로 안에 있는 어떤 폭력성과 아즈마의 폭력성이 묘하게 겹치는 것처럼 가즈히로는 아즈마의 수를 읽는다. 가즈히로가 흉기를 들었다면 아즈마는 동료 형사의 복수를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즈마는 실패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장면이 등장한다. 아즈마는 분명 가즈히로가 자신의 동생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아즈마의 복수가 실패로 돌아가면 그다음엔 동생과 함께 몸을 피하는 것이 순서다. 하지만 아즈마가 경찰 옷을 벗고 난 뒤 전시회를 가거나 야구장을 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더 이상한 건 기타노 다케시가 이 장면들과 아카리가 가즈히로의 부하들에게 성폭행 당하는 것을 교차편집했다는 것이다. 이건 충격 그 자체다. 교차편집이라는 것은 결국 A와 B의 연관성을 뜻한다. 그럼 이 두 장면에서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교차편집의 역사처럼 아즈마가 성폭행 당하는 아카리를 구하는 서스펜스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아니 아즈마는 아카리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아즈마는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체하며 시간을 때운다.      


 이후에 가즈히로는 보스에 대한 사랑으로 아즈마를 죽이려고 시도한다.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즈마는 가즈히로를 죽이기 위해 가즈히로의 보스를 찾아간다. 이상한 지점은 첫 번째 보스를 만났을 때는 보스를 죽이지 않았는데, 두 번째 보스를 만났을 때는 보스를 죽인다. 차이점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장소와 그렇지 않은 장소라는 점? 그게 아니라면 일전에는 동료 형사의 복수였다면 지금은 본인의 복수라는 점? 내가 생각할 때는 보스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만남에서의 보스의 태도는 키요히로가 누군지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는 본인이 시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아즈마는 그를 총으로 쏜다. 책임의 회피로 인한 결말.      


  그런 뒤 가즈히로는 아카리를 성폭행한 부하들에게 어차피 다 죽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카리를 성폭행했기 때문에 아즈마에게 죽거나 혹은 도망친다면 자신의 손에 죽는다고 이야기한다. 성범죄자 혹은 조폭 부하로서의 책임. 아즈마는 결국 가즈히로를 죽인다. 그러고 나서 보스와 항상 붙어 다니던 부하에게 총을 맞고 죽는다. 아즈마가 죽은 것은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복수에 대한 책임. 난 나머지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임의 의무로부터 벗어났을 때의 결말. 즉, 인간으로서의 의무. 아즈마는 계속해서 아카리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것이 의도적인 것이든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한 것이든 우리는 알 수 없다. 기타노 다케시가 인터뷰에서 말한 것이다.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을 때 버려 버리고 싶은 존재.” 아마도 아즈마는 아카리를 계속해서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실현시킬 수 없다.      


  그 이유로 가장 이상한 것 중 하나를 지적하고자 한다.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할 수도 없는 하나의 쇼트.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건 엔딩 쇼트다. 보스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속기사(?) 여성은 영화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즈히로가 보스를 대면할 때 밖으로 나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무심코 넘길 수밖에 없지만 엔딩 쇼트를 마주했을 때 그냥 넘길 수 없는 장면이다. 왜냐하면 속기사 여성이 나가는 장면은 두 쇼트로 찍혔다. 아무 기능도 없는 그녀의 동선을 맞춰서 편집점을 잡아야 하는 문제가 따르기 때문에 차라리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런데 굳이 등장시켜서 속기사가 나가는 동선과 가즈히로가 들어오는 동선을 일치시켜서 정확하게 나눴다. 그리고 엔딩엔 이 속기사의 쇼트로 프리즈 프레임 된다. 아즈마의 부하 형사가 새로운 마약 밀매범이 되는 장면을 그녀가 유심히 지켜보다가, 상당히 노골적으로 바라본다, 형사가 나가자 무언가를 타이핑한다. 아마도 새로운 책임에 대해서 적고 있지 않았을까. 즉, 기타노 다케시는 자신이 했던 말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을 때 버려 버리고 싶은 존재가 실현 불가능한 걸 말하려는 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누가 보지 않을 때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누가”는 “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쩌면 기타노 다케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벗어날 수 없는 도덕을 첫 번째 영화에서 너무나도 시네마틱 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2021년 07월 16일. 

작가의 이전글 제 22회 전주 국제 영화제 관람작 단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