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 앉아 있다. 너무 일찍 왔다. 아침 6시다. 예약한 KTX를 탈 때까지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부산에 거래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답답한 역내에 있기 싫어, 광장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담배 한 모금을 마시고, 내뿜는다. 하얀 구름이 실타래가 풀어지듯, 하늘 위로 올라간다.
멍하니,
허연 연기를 바라보다,
하늘에 하얀 구름을 보았다. 구름이 빛난다. 하얗게.
흘러가는 인생아. 어디로 가느뇨. 나는 또 여기서 뭘 하고 있느뇨. 뭐 얼마나 잘 살겠다고, 이제 동트기 시작한 이 새벽에 여기와 있을까...
늘어놓는다, 괜한 푸념.
난 누구, 여긴 어디. 여긴 서울 역. 나는 서울 역 벤치에 앉아있는 한 남자.
되지도 않는 생각의 꼬리를 물고 문다. 꼬리 잡기를 한다.
꼬리 잡기를 하다,
중간에서 한 명 넘어지면 정말 위험한데, 저 번에 체육 대회했을 때, 경리팀 소희 씨가 넘어지면서 밟힐 뻔했었지, 그때 밟혔으면, 병원으로 실려갔을지도 몰라. 데굴데굴. 퍽퍽퍽.
가속도를 주체 못 하고 우르르 넘어져 오는 군중들. 넘어진 한 개인에게 쏟아지는 발길질.
그게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간에 큰일 날 뻔한 거야. 연예인들도 그래.
우르르 몰려드는 군중들의 댓글 공격에 휩싸여, 자살하는 거잖아. 한 명의 사람은 무력해. 하지만 떼로 모이면,
떼로 모이면, 결단 나는 거야. 그것이 의도가 있든, 의도가 없든, 어떤 방향으로든 흘러가버리는 거야. 저기 흘러가는 구름처럼,
어디로든 흘러가는 거지. 구름은 아무 생각 없지만, 주변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사실,
구름은 가만히 앉아서 아이스 아메리카라도 먹고 싶을지 몰라. 케냐산을 좋아할까, 에티오피아산을 좋아할까. 케냐산 원두는 좀 신맛이 나고,
에티오피아산 원두는 좀 쓴 맛이 나지. 예전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했던 적이 있으니까, 이 정도 지식을 갖고 있는 거야. 26살 때였지.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을 때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다고 해서... 그 여자 이름이...
- 안녕하세요.
낯선 남자다. 보기에 행색은 멀쩡해 보인다. 때타지 않은 하얀 셔츠를 입었고, 회색 슈트를 걸쳤다. 머리는 그야말로 정확하게 이대팔 가르마. 서울역에 하고 많은 노숙자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이비 종교 권유자라 보기에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 일부러 편협한 시선을 두고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도를 아십니까 무리들은 80년대 패션에 어눌한 말투,
혹은 상대방의 말 따위는 기다리지 않겠다는 각오 투철한 빠른 말투이거나...
- 안녕하세요.
생각과는 상관없이, 남자의 인사에 대꾸한다.
남자는 웃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손을 앞으로 비비며 말한다.
- 제가 3일 전에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뭐? 말을 잇지 않는다. 빤히 쳐다보기 민망해,
대답한다.
- 아, 예에.
예를 길게 끌어서 대답한다. 볼일 없으면 딴 데 가라는 의미를 잔뜩 담아서.
- 제가 3일 전에 담배를 끊었습니다.
남자는 다시 한번 똑같은 대사를 읊는다. 또다시 침묵. 고요가 자리 잡는다.
이번에는 호락호락 대답해주지 않는다. 어쩐지 아, 예,라고 대답해 버리면, 남자는 다시 또, 제가 3일 전에 담배를 끊었습니다,
라고 말할 것 같다. 그리고 또 아, 예. 그렇게 반복, 또 반복.
무한반복이 되어도 남자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것만 같다.
- 무슨 일이세요?
무한반복되는 플레이어에 스톱버튼을 누른다. 물음표를 던진다.
- 지금, 담배가, 몹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3일 전에, 담배를 끊었습니다.
피식. 웃는다. 장난치나.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하지만 괜한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다. KTX를 타야 하니까. 타러 가기 전에 괜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다.
담배 케이스를 열었다. 담배가 두 개피 남았다. 겨우 담배 한 개비다. 그 정도 줄 수 있다.
한 개비를 꺼내서 준다. 남자는 두 손으로 받는다. 임금에게 하사품이라도 받듯이, 고개까지 숙이면서 받는다.
남자는 받은 담배를 앞뒤로 돌려보기도 하고,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한다. 냄새를 맡는 수준을 넘어,
흐으윽 하고 담배 끝에 코를 대고 깊게 들이마신다.
- 불 빌려 드릴까요?
- 아뇨. 라이터는 있습니다. 3일 전에, 물론, 담배를 끊었습니다만.
남자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는다. 게걸스럽게 10센티도 안 될 담배를 코로 훑는다. 코가 만약 진공청소기였다면, 담배를 쏙 빨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왜 이 남자는 내 앞에서 이러고 있을까, 싶기도 하다만, 담배를 코로 훑는 모습이, 코를 비벼 애정을 표현하는 코끼리 같아 차마 그만두라고 말을 하지 못한다.
그저 먼 산을 바라보다, 남자를 외면하려, 고개를 돌려 담배 케이스에서 마지막 돗대를 꺼내서 입에 문다. 그리고 불을 붙인다. 후우.
- 아.
남자가 탄식한다. 남자의 눈빛에 아련함과 간절함이 가득하다. 내 입에 물린 담배. 그리고 그 위로 피어나는 허연 담배 연기를 보고.
- 담배 끊으세요.
코에 담배를 비비고 있던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를 보고 하는 말이다. 말이야, 방귀야.
- 담배 끊으셔야 합니다.
간곡한 표정으로 남자는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눈을 맞춰 말한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던가. 낯선 남자에게서 진심이 비친다. 투명하고 맑은, 마치 정화조 같은.
- 담배 끊으셔야 합니다. 담배는 진짜 몸에 해로워요. 몸에만 해로우면 다행이죠. 담배는 당신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어요. 이미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쳤고, 사실, 내 인생도 다 이놈의 담배 때문입니다.
담배만 아니었다면, 제가 지금 당신한테 이러고 있지 않을 거예요. 우리 혜진이랑, 우리 마누라랑 셋이 알콩달콩 살았을 거예요. 담배만 아니었다면. 이놈의 담배가.
남자는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고 담배를 쥔 손아귀에 힘을 준다. 담배를 부러뜨리려는 듯이 힘을 주면서도, 온몸의 힘을 담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얼굴이 시뻘게지고, 이마에 퍼런 핏줄이 돋아나면서도 차마 담배를 부러뜨리지 못한다. 남자는 힘을 다한 듯,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아이처럼 눈물을 흘린다. 다 큰 어른이 후두둑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다.
남자에게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담배를 쥔 손만큼은 놓지 않고 있는 것일까.
- 담배 때문입니다. 제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담배란 녀석이 얼마나 악마 같은 녀석인지, 다 말씀드릴게요. 담배만은, 담배만은 끊으셔야 합니다. 그 시작이 제가 16살이었어요. 제 나이가 올해로 딱 쉰 살입니다. 그러니까 16살이면 34년 전이죠. 34년 전에...
6시 50분이다. 담배를 끈다. 그리고 일어난다. 아쉽지만, 흥미롭지만, 사연이 궁금하지만, 6시 50분이다. 7시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바이어를 만나러 가야 한다.
낯선 남자는 계속해서 주절주절 떠들어댔지만, 대꾸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승강장으로 걸어가 6-1번 칸에 올라 자리에 앉는다.
창가 자리에 앉아, 멀어져 가는 서울역을 본다. 거기, 남아있는 사람들을 본다. 거기, 남아있는 담배 끊었다는 남자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