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방학이 끝나고 첫 수업이었다. 학생들에게 방학 동안 어떤 영상을 봤는지 물었다. 한 학생이 대답했다.
교수님, 정말 감명 깊은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제목이 뭐였더라? 내용도 정확히 기억이... 그때 나는 깨달았다. 감동했던 순간도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이 어렴풋 해진다는 것을.
촬영 현장에서 수많은 순간들을 렌즈에 담아왔지만, 정작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간 아이디어들은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새벽 2시 촬영 중 문득 떠오른 완벽한 조명 아이디어, 배우와의 대화에서 나온 연출 방법, 스태프들과 점심을 먹으며 나눈 기술적 통찰들. 그 순간에는 분명히 기억할 것 같았는데,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미 아련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아쉬움들이 쌓여갈 무렵, 나는 작은 변화를 시도했다. 주머니에 손바닥만 한 노트 하나를 넣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동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디지털 디바이스가 가득한 현장에서 아날로그 노트라니. 하지만 며칠 사용해 보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손으로 적는 순간 그 생각이 내 것이 되는 기분이었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아이디어들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이 확신은 더욱 단단해졌다.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카메라 조작을 시켜보니 정말 놀라웠다. 복잡한 설정도 척척 해내고, 조명 장비도 능숙하게 다뤘다. 하지만 편집실로 자리를 옮기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프리미어 프로의 화려한 인터페이스 앞에서 그들은 당황했다. 이것저것 클릭해 보다가 결국 손을 들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깨달았다. 기계를 다루는 기술과 생각을 정리하는 능력은 전혀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 멋진 장면을 촬영해도, 그것을 편집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막히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명확하지 않으면 어떤 도구도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학기부터 나는 학생들에게 특별한 숙제를 내주기 시작했다. 매일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보라고 한 것이다.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길을 걸으며 본 인상적인 장면, 영화를 보다가 든 생각, 친구들과 나눈 대화에서 나온 아이디어, 심지어 실패한 경험까지 모든 것을 기록해 보라고 했다.
젊은 학생들은 역시나 반발이 심했다. 요즘 시대에 굳이 손으로 써야 하냐고, 스마트폰 메모장이면 충분하지 않냐고 물었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자 변화가 보이기 시작됐다. 가장 많이 변한 한 학생이 있었다. 촬영은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편집기에만 앉으면 자신감을 잃던 아이였다. 그 학생이 어느 날 나에게 보여준 노트는 정말 놀라웠다. 단순한 메모가 아니라 자신만의 편집 백과사전이 되어 있었다.
매일 배운 기능 하나씩을 어설픈 그림으로 그려놓고, 단축키도 적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는지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둔 것이다. 더 인상적인 건 실패한 경험도 빠짐없이 적어놨다는 점이었다. 어떤 효과를 시도했다가 망쳤는지, 왜 망쳤는지,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지까지. 그 노트는 그 학생에게 완벽한 개인 맞춤형 가이드북이 되었고, 학기 말이 되자 그는 편집 프로그램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적자생존.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거창한 철학이 아니다. 작은 노트 하나면 충분하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생각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게 된다는 점이다. 영상 기법 하나를 배워도 그냥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활용할지까지 생각하면서 기록하게 되면 그것은 진짜 내 것이 된다.
사진으로 남기는것도 그러하다. 우리가 어떤 공간에 있었고, 어떤 순간을 경험했는지에 대한 기억을 지속시켜 주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찍어준 사진을 볼 때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별한 순간들을 의식적으로 기록으로 남기면, 그 경험은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어 우리 삶의 소중한 자산이 된다.
지금은 웹 3.0 시대다. AI 혁명의 한복판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챗GPT, 클로드, 제미나이 같은 도구들이 일상이 되었고, 심지어 프리미어 프로에도 AI 기능이 들어가 있고, 포토샵, 다빈치 리졸브에도 AI가 탑재되어 있다. 학생들은 종종 묻는다. 이제 AI가 다 해주는데 굳이 손으로 적을 필요가 있냐고.
하지만 나는 AI 시대일수록 더욱 기록이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AI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정확한 질문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마블 영화 아이언맨에 등장하는 자비스처럼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잘못하면 터미네이터에게 쫓기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책을 읽고, 현상을 정확하게 바라 보고, 사고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프롬프팅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내일 아침 일어날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오늘 하루를 그냥 흘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의미 있고 활기찬 하루를 보낼 것인가. 그 답은 주머니 속 작은 노트 한 권에 달려있다.
생각나면 나만의 작은 노트에 적어라.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생존 전략이다. 여러분의 손에 든 펜이 여러분의 미래를 바꿀 것이다. 지금 당장 시작하라. 오늘 느낀 것 하나, 배운 것 하나라도 적어보라. 그 작은 시작이 10년 후 완전히 다른 여러분을 만들어낼 것이다.
2025년 2학기,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고(誥)한다. 까먹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