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화사하고 따스했다. 마음이 맑아지는 햇살의 기운을 깊이 호흡하면서 A는 잠시 눈을 감았다. 4월이었다. 출산 후 4개월이 지나있었다. 오늘은 아기와 함께 산책을 나가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마음이 설렜다. 신선한 샐러드에 바삭한 돈가스를 먹고 싶었다. 한 달 전, 아기의 백일 기념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꽤 쌀쌀했던 기억이 났다. 지난겨울 새내기 엄마가 되어 아기를 돌보며 창밖의 겨울이 지나가길 간절히 바랐는데 정말로 따스한 계절이 찾아온 거였다.
깜짝 외출을 계획한 덕분에 A는 즐겁게 집안일을 했다. 잠든 아기의 기척을 살피면서 기민하게 우유병을 소독하고 건조기에서 꺼내온 빨래를 분리해서 정리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신랑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혼자서 아파트 단지를 나가는 외출은 처음이었다. 짧은 외출이지만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에코백에 챙겨 넣었다. 온도가 체크되는 보온병과 분유도 챙겼다. 햇살이 금방 지나가버릴 것만 같아 마음이 분주했다.
외출준비를 마치고 아기에게 수유를 하고 트림을 시켰다. 띠를 이용해 아기를 안고 집을 나섰을 땐 배도 고프고 기운이 없었다. 그런데 아파트를 벗어나기도 전에 아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토하는 거였다. 트림을 시켜서 안심했던 A는 몹시 당황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아기를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녀의 앞섶에도 토사물이 묻어서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한 시간 후에야 아기를 데리고 다시 나설 수 있었다. A는 배가 몹시 고팠다.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오늘의 미션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아기와 함께 봄 햇살과 봄바람을 느끼고 싶었다. 기대한 대로 미풍이 불어왔다. 아기의 머리에는 면 모자를 씌웠고 포근한 블랭킷으로 아기를 감쌌기 때문에 발이 달린 바디슈트를 입은 아기가 추울 염려는 없었다. A가 아파트 단지를 막 벗어났을 때였다.
“아이구, 애기 얼굴에 찬바람 쐬면 감기 걸려. 얼른 들어가 애기엄마.”
언제 나타났는지 A의 앞을 딱 가로막은 노인이 말했다. A는 너무 당황해서 노인에게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노인은 혀를 찼다. 그리곤 몹시 바쁜 듯 A를 지나쳐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A는 순간 헷갈렸다. 누굴까? 아는 분이었을까? 생각나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데 내가 왜 죄송하다고 사과했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이게 그렇게 혼날 일인가? 아기랑 햇살 보러 나오는 게? 얼마나 벼르다가 나선 길인데, 왜 다짜고짜 야단부터 치는 거지?'
생각할수록 속이 상했다. 누군가 또 마주칠까 봐 블랭킷으로 아기 얼굴을 덮고 빠른 걸음으로 상가를 향해 걸었다. 햇살을 보면서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보송보송하게 말리려던 계획은 사정없이 구겨지고 말았다.
A는 나의 딸이다. A는 그날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A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양가감정에 휘말렸다. 나 역시 기성세대여서 그분들의 걱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성이 본능인지라 그 반대의 감정도 일었다. 딸아이가 느꼈을 그날의 곤혹과 설움이 연상되었다. 사정도 알지 못하고 다짜고짜 야단부터 치다니!
육아는 희생의 시간이다. 실로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온 여성은 출산이라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무장해제 된 상태로 육아라는 상황을 맞이한다. 여성의 일대기에서 아무런 예비도 없이 동물적 속성을 맞닥뜨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임신 후에 여성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신체적 변화와 고통, 죽음의 공포 속에서 생명을 얻는다. 그 생명을 키우는 일은 짧은 출산의 시간보다 더 가혹한 희생적인 역할을 요구한다. 생명이 나고 자라는 것은 반드시 누군가의 어마어마한 희생과 사랑을 필요로 하므로.
역할 성장을 하며 모성애를 확장해 가는 육아의 시기는 여성이 역설적으론 가장 연약해져 있는 시기다. 사회적 역할에서 배제된 채 동물적 역할로 몰리는 시기,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과정 속에서 모성은 강해지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경쟁력은 퇴화한다. 그 모두를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슈퍼우먼이 되도록 강요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임신과 출산과 육아의 기간에 여성이 느끼는 복잡하고도 고통스러운 체험은 남성의 이해를 초월한다.
사랑과 헌신이 전적으로 필요한 그 시기는 강제된 의무의 시간이다. (육아에서 남성의 역할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계속 확장해가고 있는 추세다. 다만 이 글이 여성의 육아에 초점을 두고 있을 뿐이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육아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 경험이다. 그래서 나는 육아야말로 인간을 성장시키는 생애발달과정의 정점이라고 믿는다. 육아를 경험한 여성은 결코 이전의 존재로 돌아갈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군대를 가고 여성은 출산을 한다고 말한다. 남성에게 군필은 분명한 스펙으로 여겨진다. 여성에게도 육아는 스펙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현재 많은 예산을 지원하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저출산의 원인 중에는 출산과 육아가 스펙으로 인정받기는커녕 리스크로 작용한다는 문제점도 한몫하고 있지 않을까?
육아는 여성들에게 있어 강렬한 공감의 영역이다. 모체에 부여된 모성은 세대를 초월하여 육아의 경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여성들에게 선험적으로 작동한다. 전쟁이나 기근 속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이 모성을 따라 동생들을 보살피는 모습은 익히 알려져 있다. 어찌 보면 어려운 시절에 많은 자녀를 낳아 기른 할머니들의 선을 넘는 참견은 육아 선배로서의 가르침이며 챙김이다.
문제는 세대 간의 소통이 단절되어 서로 소통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급하게 변화된 사회 경제적 시스템을 윗세대 분들은 적응하기 버겁다. 젊은 세대 역시 윗세대 분들의 사고방식과 일처리 방식을 수용하기 버겁다. 세대 간의 충돌에서 비극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쌍방 모두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조차 쉽지 않은 문제이다.